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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9.25 16:00 수정 2018.09.25 16:00
 

일진회가 다이쇼 왕세자를 환영하는 뜻으로 서울 남대문에 세운 대형 아치. 양쪽 기둥에 ‘일진회’란 문구가 있다. ⓒ 위키백과

 강압이든 사기이든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에 합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을사늑약 체결에는 을사5적들의 망동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송병준ㆍ이용구 등 친일 주구들이 다투어 친일조직을 만들어 일본의 막대한 비밀자금을 지원받고 친일매국에 앞장섰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일진회이다.
  

송병준. ⓒ 위키백과

 
일진회는 민씨 일파의 박해를 피해 10여 년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이 러ㆍ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 친일적 민의를 조작하려는 일본의 앞잡이로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송병준은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잔류인 윤시병ㆍ유학주 등과 유신회를 조직했다가 다시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윤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했다.
 
일진회는 4대 강령으로 ①왕실의 존중, ②인민의 생명과 재산보호, ③시정개선, ④군정ㆍ재정의 정리 등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개화를 서두르는 척 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지방조직을 가지고 있는 동학당(東學黨) 내 친일세력인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 13도 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이 취임했다.
  

이용구. ⓒ 위키백과

 
이후 일진회는 일본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으면서 친일활동을 전개하여 1905년 11월 17일 강제된 을사늑약을 지지선언했으며, 기관지 <민국신보>를 통해 온갖 친일적 망발을 서슴치 않았다.
 
일진회는 처음부터 일본의 막후 조종과 지휘를 받았다. 1904년 10월 22일에는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헌병대장 다카야마, 하야시 주한 일본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 군략상 조금도 방해됨이 없다"며 친일 본색을 드러냈다. 
 
일진회가 친일의 기치를 내세우자 일제는 5만 원의 운영자금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막대한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일진회는 러ㆍ일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한다는 내용이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1월 6일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일진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대저 일본은 선진국이라, 동양의 평화 극복에 주력하였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모두 의협심에서 일으킨 것이니…외교의 권리를 일본정부에 위임하여 재외 공사를 소환하고 주한 공사관을 철거한다고 해서 과연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는가?…우리 당은 일심동기하여 신의로서 우방과 교제하고 성의로서 동맹에 대하여 그 지도에 의지하며, 그 보호에 의거하여 국가독립을 유지함으로써 안녕과 행복을 영원무궁토록 유지할 것을 선언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을사늑약을 강요케 하는 명분을 주었다. 
일진회의 대표적인 매국노는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송병준, 일진회의 선봉장 이용구, 일진회 회장 윤시병, 매국적 출세주의자 윤갑병 등이다.

송병준(1858-1925)은본관은 은진, 함경남도 장진 출생이다. 
서울에 와서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다가 무과에 급제, 수문장ㆍ사헌부ㆍ감찰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조정의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한때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홍해군수ㆍ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1904년 러ㆍ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한 후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 윤시병 등과 함께 친일단체 유신회를 만들고 다시 진보회의 이용구와 손잡고 일진회를 조직, 매국활동을 전개했다. 
 
헤이그 특사사건 후 황제 양위운동을 벌여 고종을 퇴위시키는데 앞장섰으며,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ㆍ내부대신을 지내면서 한일합병 상주문, 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에 조선합병을 요청했다. 병탄 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다시 백작에 올랐다.

이용구(1868-1912)는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이다. 
23세 때 동학에 입교, 2대 교조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조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그후 동학을 진보회라 고치고, 1904년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쳤다. 러ㆍ일전쟁 때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고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법통을 이어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 총위원장ㆍ회장이 되어 국민들에게 한일합병을 제창하는 동시에 고종황제,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조선통감 등에게 한일합병 건의서를 올리는 등 친일망동을 자행했다. 죽은 뒤 일왕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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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