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 08:16최종 업데이트 19.04.27 16:27
[기사 보강: 25일 오후 2시 24분]

이계동 당직 간수장이 1950년 7월 1일 허겁지겁 2층으로 뛰어왔다.


"이(李) 대장, 큰일 났어."
"왜 그래요?"
"검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을 기해서 대규모 적의 공격이 있다고 하네. 그러니까 공산당 책임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그대로 집행하래."


당직 간수장의 이야기를 들은 이준영은 간담이 서늘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형무소 간수 대부분이 후퇴하거나 출근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무소 재소자들이 탈출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준영은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지만 재소자들을 쉽사리 죽일 수도 없는 일이고, 어느 선까지 죽여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소장님한테 갔다 와야 겠습니다." 소장 관사에는 김택일 소장과 서울에서 내려 온 법무부 원태연 행정국장(현재의 교정국장)이 있었다.

그가 상황을 보고하니, 김택일 소장이 검사장을 만나서 확인하자고 한다. 둘이 검사장을 만났는데 같은 명령을 내렸다. 소장 관사로 다시 오니 법무부 교정국장과 장·차관들은 부산 방면으로 피난가기 위해 허둥댔다. 국난의 위기에 국가지도자들은 피난 가기에 급급했다. 형무소로 돌아온 이준영 특별경비대(특경대) 부대장은 형무소재소자들의 폭동을 진압했다.

이틀 후 헌병대 짚차에 이어 지에무씨(GMC) 트럭 수십 대가 대전형무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헌병대 심용현 중위가 "야, 재소자들 전부 인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헌병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경찰, 형무소 간수, 보병 군인은 그들에게 '고양이 앞에 쥐' 격이었다. 간수들이 재소자들의 손과 몸을 노끈과 광목, 철사로 묶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트럭에 실린 이들은 4사(倽)에 구금되어 있던 주요 정치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이관술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라 짐작한 이관술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명령에 응했다.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이었던 송언필은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실은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조선민족 만세!"

골령골에 도착한 인솔책임자 이준영은 이관술을 위시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헌병대에게 인계했다. 이준영이 등을 돌리고 내려오려는 순간 심용현 중위가 불렀다. "어이, 특경대장 이리 와." 이준영이 심용현 중위 근처로 가니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과 청년방위대원들을 시켜 파놓은 세로 1m80cm, 가로 50m의 구덩이였다. 제일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된 이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심용현 중위가 "어이~ 이관술. 너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냐?"고 하니, 이관술은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답변했다. 이관술이 "조선"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탕탕탕!" 이관술은 '악' 소리 한번 못하고 고꾸라졌다.

심 중위는 이관술의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 사살했다. 심 중위는 이준영에게 "특경대장은 저쪽으로 가면서 확인 사살해"라고 지시하면서 본인은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확인 사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2008).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48세에 산내 골령골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이관술은 어떤 인물인가?

동덕여고 교사에서 항일혁명가로
 

이관술 동경고등사범 졸업 앨범 속의 이관술 ⓒ 박만순


이관술(1902년생) 집안은 경북 울산군(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일대에서 이름난 양반 지주 가문이었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면서 이관술의 조부와 부친은 그를 가르치는 것에 주저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이관술이 '많이 배우면 다친다'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관술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경성의 중등고보를 나온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의 명문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를 나오면 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담대한 행동을 했다는 일화는 숱하게 많다.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 살고 있는 이수환(84)은 "관술 형님이요, 얼매나 똑똑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꾀돌이에요. 하루는 그 형님이 콩잎에 밥을 싸서 호박잎에 주먹밥 여러 개를 싸놨어요. 그리고는 소 꼴 먹이러 가는 친구들에게, 자기 소 풀을 먹이면 밥 한 덩어리씩을 주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단순히 영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양반·상놈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고 더불어 사는 호인이었다.
 

이수환 이관술의 어릴적 시절을 증언한 이수환 ⓒ 박만순

 
일본에서 귀국한 그의 첫 직장은 동덕여고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체벌을 하지 않은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제국주의동맹-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에서 핵심지도자로 일하게 된 그는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 1920년대 숱하게 명멸한 조선공산당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고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 정책적 대안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수배 중에 구두닦이, 고물장수, 솥땜장이로 위장해 일제경찰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그의 벗 이재유가 1944년 10월 26일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이관술은 해방을 대전 고물상에서 맞이했다.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인기정치인 5위에 오른 이관술이 무기징역

지금은 잊혀진 혁명가 이관술을 해방 직후 조선인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해방직후 선구회라는 보수적인 잡지사에서 정치인 여론조사를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결과는 놀라웠다.

요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인물 하면 대부분 김구, 이승만, 김규식, 조병옥을 떠올릴 텐데, 당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위는 여운형으로 33%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였다가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그였다. 다음은 이승만(20%), 김구(17%)가 뒤를 이었다. 놀라운 것은 다음부터다. 박헌영(15%), 이관술(13%)이 4, 5위를 차지한 것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이고,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총무이자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동안 '공산당'하면 '빨갱이'를 떠올렸고 '악마'같은 존재로 인식했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0~40년대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에 전향하거나 순응해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

이관술은 당시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거대정당의 주요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소속은 공산당이었지만 좌·우익 진영에서 고루 호감을 받았다. 

1946년 5월 4~7일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서울 소공동 74번지에 위치한 조선정판사 건물에 들이닥쳤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재무과장 박정상, 기술과장 김창선 등을 검거했다. 검거령이 내려진 이관술도 7월 6일 체포되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이란, 조선공산당 간부 및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공모하여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이용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어과 박사학위 논문)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은 경찰조사과정에서 피의자에 대한 고문, 충분한 변론기회 박탈, 증거 불충분 등의 숱한 조작혐의가 있었다. 소설가 안재성은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혐의가 짙다고 했으며, 임성욱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정판사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해방 후 좌익진영을 분쇄한 사건은 '모스크바 삼삼회의 결정에 따른 논쟁'과 '정판사 사건'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던 이 사건과 재판으로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송언필과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汚名)을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토지 기부 공적비 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공적비 ⓒ 박만순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벌어졌다. 4인의 독지가가 땅을 기부했는데, 총 5715평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인 중에 이관술이 포함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범서면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무기징역에 처해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가 가세가 기울어 가족의 생계도 걱정되었을 텐데, 그 와중에 500여 평의 땅을 반곡초등학교 세우는 데 선뜻 기부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태화초등학교에서 열린 합동위령제
 

합동묘 앞의 단체사진 백양사 아래에 만들어진 합동묘 앞에 선 유족들 ⓒ 박만순

 
학살 당한 것은 이관술만이 아니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총성에 사라졌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 여름이었다. 경남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10년 전인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된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해서다.

울산지구 CIC와 울산경찰서 경찰들은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최소 870명을 위 두 곳에서 학살했다. 유가족들은 4.19 후인 1960년 여름 두 곳에서 상당수의 유해를 발굴했다. 가마니 위에 부위별 유해와 보도연맹원들을 묶었던 철사 줄이 대량 발굴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태화국민학교로 간 박경희(경남 마산시, 70세)는 발굴된 유해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 이정환 역시 목 놓아 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어떤 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물론 일부는 유품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수환의 증언에 의하면 "울산 범서면 망성리의 최문호의 아버지가 학살되었는데요, 발굴 때 도장이 나왔어요"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유해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태화국민학교에서 위령제를 치른 후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약 30명의 유족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봉분을 세운 지 1년도 채 안 되어 묘가 파헤쳐졌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동토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울산경찰서는 비석을 깨부수고 유족들을 호출했다.

"빨갱이들이 묘를 만들었으니, 네놈들이 묘를 파헤쳐"라고 했다. 유가족들에게 파묘를 지시한 것이다. 인륜에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조치였다. 더군다나 경찰들은 파헤친 묘에서 나온 유해를 유족들에게 화장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경남북지역과 제주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파묘를 시키고, 유해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한 곳은 울산이 유일하다. 박경희의 부친 박동철은 이관술의 큰 사위다. 또한 울산에서 학살된 이중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학술도 포함되었다.

울산에서는 웃지못할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학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울산군 두동면 구영리 모(某)씨가 야음을 이용해 집으로 왔다. 그는 친지와 자식들도 모르게 다락방에 은거했고, 아내가 밥을 갖다 주었다. 그런데 몇 개월 뒤 아내의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남편도 없는 여자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오해한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다락방에서 내려와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몇 년 징역살이를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돼야
 

이관술 생가 이관술 생가 앞에선 외손녀 손옥희 ⓒ 박만순


울산 지역의 시민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이관술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소설가 배성동과 고려대학교 이명훈 명예교수는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애쓰고 있다. 배성동 소설가는 "이관술 선생의 따님 이경환과 외손녀 손옥희 선생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싶다"며 이 운동에 뛰어든 동기를 설명했다.

이관술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명훈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한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에요?"라며 기자에게 역으로 질문한다. 맞는 말이다.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정한 원칙이다.

이런 기준에 근거하면 이관술은 당연히 독립유공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이 문제는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병행되어야 할 것 같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다. 이관술 생가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으며, 현재 소유주가 집을 매각하려고 한다. 또한 생가 옆 작은 텃밭에는 이관술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유족들이 무덤도 없는 비석을 세웠지만, 울산지역 보수단체들의 항의와 공안당국의 압력으로 땅 속에 묻힌 것이다.

이관술은 1950년 대전형무소 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인했으며, 사법부 역시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었다. 다만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다면 이관술 개인이 아닌 '조선정판사 사건' 진실규명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15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에 전심전력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5년간의 옥살이와 8년간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이 울산과 경주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
 

지난 24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 ⓒ 박만순

 
"엉엉" 

지난 24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통곡이 터졌다. 잠시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세미나 내내 울음이 그치지 못했다. 그 어느 토론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울음의 주인공은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85세)씨였다. 

이날 창립한 '이관술기념사업회'는 평생을 조국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이관술 기념관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 세미나에는 박재동 화백, 임성욱 박사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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