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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6 10:29 수정 2019.05.29 16:17
알람벨이 방안에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인영은 눈을 떴다. 옆자리의 아들도 소리를 들었는지 몸을 뒤척인다.
 
"아들, 좀더 자. 엄마가 맛있는 아침 차려줄게."
 
잠이 한 가득 남아있는 아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인영은 기지개를 펴며 부엌으로 향한다. 아침 창가에는 말간 햇살이 한 가득이다.
 
오늘은 바쁜 날, 일곱 살 녀석은 아침에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한다. 인영은 국립극단 시즌 단원으로 오후부터 첫 번째 연습이 잡혀있다. 인영은 서둘러 아들이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두툼하게 하고 시금치국을 준비한다.
 
"이제 일어나야 해요? 벌써 여덟 시예요!"
 
인영은 아침 준비가 다 되어가자 아들을 깨웠다. 어제는 아들과 한 이불 밑에서 손을 꼭 잡고 얘기꽃을 피웠다. 여자친구 얘기부터 장래 꿈까지. 녀석은 기특하고 발랄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과학을 잘하는 화가, 그림을 그리는 요리사 등등. 그런 꿈을 늘어놓았다. 그런 아들이 인영은 "고맙고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국립극단에서 한컷겨울 바람이 아직 남아있는 국립극단 아침 창가에서 ⓒ 민병래


  
인영은 엉뚱하게도 네 살 때부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연극배우가 될래'라는 얘기를 주절거렸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공부하고 2002년에 데뷔했다. 많은 작품은 아니었어도 무대에서 신나게 놀았다. 신명나는 세월들을 보냈다.
 
하지만 생활은 막막하고 팍팍해 무대 뒤 어두운 장막 같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혹여 엄마의 무대를 아들이 동경할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들이 늘어 논 꿈 보따리에 '연극배우'가 없어서 맘 편히 수다를 나눌 수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부터 하늘반 아이들의 동화극으로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릴게요."
 
이제 기다렸던 녀석의 공연이 시작된다. 제목도, 아들의 역할도 모른 채로 허둥지둥 왔다. 그래서인가 인영의 가슴이 더 콩당댄다. "누구 아들인데 어련하려고" 되뇌이며 다독거려도 심장 박동수를 느낄 정도였다.
 
근심이 되어 유치원 차에 실려보내고 인영도 서둘러 도착한 구민회관. 소강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손주들 재롱을 보고팠는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손에 꽃다발도 그득하고 플래시 터지는 소리도 요란했다. 그 흥겨움을 조용히 잠재우며 선생님의 인사말이 소강당에 울려퍼졌다.
 
인영은 문득 첫 작품이었던 <기생비생춘향전>이 떠올랐다. 오태석 연출의 작품이었고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막을 올렸다. 오태석 연출의 인기에 힘입어 관심이 뜨거웠다. 암표가 돌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처음 서 본 큰 무대. 조명은 눈부셨고 음향은 뜨렁뜨렁했다. 게다가 객석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묘하게도 떨리지가 않았다. 무더위로 지친 몸에 소낙비를 맞을 때의 시원함이 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그냥 첫무대에서 뛰어 놀았다. 어차피 앞날의 기약이 없는 연극판에 들어왔으니 무대가 있을 때 맘껏 놀고 싶었다. 신명나게 신명나게. 그렇게 첫무대를 마쳤다. 돌아보면 행복한 추억이었다.

"와!"
 
소강당이 갑자기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로 왁자해졌다. 아이들이 콩콩 뛰면서 나와 무대를 메우고 배꼽인사, 시작 인사를 했다. 아들 녀석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제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놈! 정녕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다.
 
그렇지만 한때는 너무 미웠다. 아들과 멀어지고 싶은 적도 있었다. 인영은 데뷔 후 몇 해 지난 2006년에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에서 '경숙이' 배역을 잘 해 '뜨거운' 시절을 보냈다.
 
그해 동아연기상·히서연극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올랐다. 더 많이 날아오를 것이 생각했는데 결혼 후 많이 달라졌다. 작품을 받지 못했다. 출산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산후 우울증이 더해져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그 원망이 아들에게 옮겨졌었다.
 
그 무렵 어렵게 섰던 무대 '반신'!

극중에서 수라는 샴쌍둥이 중에 똑똑한데 괴물처럼 못생긴 아이이고, 동생 마리아는 바보인데 아름다웠다. 수라는 동생을 없애고 혼자가 되고 싶어 한다. 수라는 결국 동생 마리아의 희생 덕에 혼자가 된다.
 
인영은 '반신'에서 수라역을 맡았다. 그때 인영은 "아름답지만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마리아가 자기 아기이고 영양을 다 뺏기고 괴물처럼 변해 버린 채 나쁜 맘으로만 똘똘 뭉친 수라가 자신 같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런데 "수라가 '분리수술에 대한 대화'를 엿듣고 '마리아를 죽이고 나를 살렸으면 좋겠다'며 악을 써야 하는 신"에서 인영은 가슴이 너무나 죄어오는 경험을 했다. 마리아가 수라를 위해 희생을 선택하며 대신 죽을 땐 인영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껏 그가 겪었던 고통과는 깊이가 너무 달랐던 경험이었다.
 
그 극을 마치면서 마침내 인영은 아들을 받아들였다. 삶으로서. 그 뒤부터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은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축복이 되었다.
 
아이들이 시작인사를 마치고 퇴장하자 소극장의 불이 꺼졌다. 순간 숨넘어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무대 중앙을 약하게 비추는 스팟 조명이 들어오고 음악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영화 <쉐이프 오브 워터>의 OST였다. <쉐이프 오브 워터>는 '인어왕자'를 사랑하고 구출하는 동화같은 영화다. 아마도 아이들 버전으로 "이 환타지를 준비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인영은 몸을 무대 앞으로 숙였다.
 
그런데 반갑게도(?) 아들이 첫무대에 나왔다. 짝궁은 같은 반 수정이였다. 둘이 조명 한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아들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저 인어왕자를 구해야 해."
"...."
 

그런데 수정이가 대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객석에선 '어머' '힘내' 이런 수군거림이 일어나는 듯했다. 아들도 조금 얼굴이 상기되며 다시 대사를 말했다.
 
"우리는 저 인어왕자를 구해야 해."
"...."

 
다시금 차례가 왔지만 수정은 여전이 머뭇거리며 볼이 빨개졌다. 어둔 조명에서도 아이의 표정이 읽혀졌다. 인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무대 밑에 선생님도 당황한 듯 수정에게 힘을 북돋는 손짓을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소강당에서는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들 얼굴도 약간 울먹일 듯했다. 수정은 더욱 얼어붙었고, 인영은 침이 더욱 바싹 말랐다. 옅은 조명도 흔들리는 듯했다.
 
그때 아들이 한걸음 수정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꼭 쥐며 수정을 무대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다시 대사를 친구에게 말하듯 속삭였다.
 
"수정아, 우리 저 인어왕자를 구해주자."
 
그러자 수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 앞으로 주춤 반걸음 나오는 듯 싶더니 "그래, 우리 인어왕자를 살리자"라고 겨우 겨우 실같은 소리로 말했다.
 
수정이 마침내 입을 열자 소극장에는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마음 졸인 순간이었다. 설핏 수정 엄마의 얼굴에 눈물이 맺혔던 듯했다. 담임 선생님도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 퍼지며 가슴에 손을 얹고 즐거워한다. 인영도 체기가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들이 너무 대견해 보였다.
 
인영은 '나라면'을 해법으로 삼으며 연기 생활의 신인 시절을 보냈다.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접근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런데 '나라면'이라고 대입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작다는 것, 세상에는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 배역에 대해서 제대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 새내기 시절에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과 상황에만 충실했다. 어찌 보면 자기에게만 갇혀있었다. 상대 배역, 그들의 호흡과 감정선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기운, 상대의 기운을 주고 받는 것은 염두에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 앞에 고개 숙인 부모님 배역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몰입하는 대상이 옮겨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우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바로 결혼과 출산, 반신 무대에서의 깨달음이 준 변화였다. 이 모두 40줄에 이르르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서계동 국립극단에서붉은 셔터문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 민병래


 
 

국립극단에서 붉은 색을 배경으로주인영의 강한 생명력을 담고 싶었다. ⓒ 민병래


그런데 아들이, 일곱 살 아들이 첫무대에서 수정이 마음을 챙겨주고 수정이를 이끌어주고 극을 풀어낸다는 것이 너무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발표회는 그 뒤부터 일사천리였다. 몇 편의 단막극과 아이들의 율동들이 이어지고 웃음소리, 박수소리 그리고 몇 번의 커튼콜까지...
 
인영은 발표회 내내 행복했다. 엄마로서 또 관객으로서...

수정 엄마와 여러 학부모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을 뒤로하고 인영은 아들을 챙겨나왔다. 오늘 발표회 후 아들이 있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발표회 후 다들 가족들과 흥겨운 식사들을 할텐데...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국립극단 시즌 극 연습에 아들을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인영은 작년부터 시즌 단원이 되었다.
 
시즌 단원은 서류심사와 오디션을 거쳐 뽑는다. 2018년부터 국립극단 시즌단원은 기존 1년이 아닌 2년간 활동하게 되었다. 한 배우는 1년에 3작품을 하고 개런티는 작품연습 들어갈 때와 공연 끝날 때 반반씩 받는 시스템이다.

오늘 무대에 섰어도 3개월은 물론 6개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연극배우의 현실, 인영도 늘 예외는 아니었다. 무대는 즐거웠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공과금, 핸드폰 요금, 월세를 늘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서 2년 계약은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벌써 두 해 째에 접어드니. 올해 여름쯤에는 내년 걱정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립극단 시즌 단원 위치는 정말 힘이 되고 소중했다. 이런 기회가 많은 배우들에게 널리 제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래서인가 올해 첫 연습에는 더 신경이 쓰이고 준비를 많이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 첫날을 아들과 함께 하되, 아들이 배우가 될 엉뚱한(?)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극장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한 귀퉁이에서 연습을 바라보게 할 요량이었다.
 
인영은 아들을 아끼는 경차에 올려 태우고 자기도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발표회 열기를 옮겨왔는지 쌀쌀한 날씨에도 차안은 따뜻했다. 극장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거리. 시동을 켰다. 인영은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아들하고 발표회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나 너무너무 많았다.
 
인영은 가방에서 우유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아들, 오늘 너무 잘했어. 근데 말이야. 아까 수정이가 머뭇거렸잖아. 너도 당황했지?"
"그럼, 아까 너무 속상했어."
 
인영은 아들과 대화를 늘어놓으며 <쉐이프 오브 워터>의 OST를 틀었다. 아들도 자랑하고 싶었는지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실수하면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너무 떨려' 그랬잖아. 그때마다 엄마가 실수해도 괜찮아, 실수하는 게 애들은 자연스럽고 더 재미있어. 그렇게 말해준 게 힘이 됐어."
 
아들의 말에 인영은 가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무심결에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내 말을 이렇게 가슴에 새겨두었다니... 기쁘고도 고마웠다.
 
이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차는 원효대교를 넘고 있었다. 차는 막히기 시작하지만 차안에 짜증은 없고 흥만 넘쳐난다. 갑자기 아들이 묻는다.
 
"근데 엄마 지금 차에서 나오는 노래, 우리 발표회 때 음악이지?"
"그래, 정말 신기했어, <쉐이프 오브 워터>에서 인어왕자를 구해주는 샐리 호킨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거든, 그런데 엄마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너희 공연 제목도 모르고 네가 뭘 맡았는지도 사실 몰랐어..."
"에이 엄마 내가 여러 번 얘기했는데..."
"그랬어? 아마 들었는데 엄마가 오늘부터 하는 시즌 공연 대본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나 봐, 아들 미안해."
 
원호대교를 넘고나니 곧 눈앞에 극장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반갑다. 아들과 나의 생활을, 삶을 지탱해주는 곳. 고맙고 고마운 곳이다.
 
"아들, 엄마가 사과도 할겸 <쉐이프 오브 워터>에서 나오는 엄마가 좋아하는 대사 한번 얘기해줄까?"
"그래 엄마."
 
인영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OST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나직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읊는다.
 
"너의 모습을 감지할 수는 없지만
어디에서든 너를 찾을 수 있지
너의 존재는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가슴을 겸손하게 만들어
너는 어디에든 있으니까..."

 
주인영의 프로필
출생 : 1978년 
학력 : 상명대학교 연극영화학 학사
데뷔 : 2002년 연극 '기생비생춘향전'
수상 : 2006년 제43회 동아연극상, 히서연극상
경력 : 2002년 국립극단 연수단원
출연작품 :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반신, 1945등

주인영을 만든 시간들
 

주인영의 4학년 학예발표회때 모습가운데 색동저고리가 주인영이다. ⓒ 주인영


   

주인영의 경숙이 초연때 모습아직 완전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그렇지만 열정이 있었던 무대다 ⓒ 주인영

 

야끼니꾸드래곤 공연할때사진들일본에서 연습하고 공연하던 때 어느 상점에서 ⓒ 주인영

    

야끼니꾸드래곤 공연할때사진들 옷이 땀으로 젖어서 몇장씩 갈아입으며 연습했던..정말 즐겁고 의미있던 때의 모습 ⓒ 주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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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