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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18 08:35 수정 2019.04.18 08:35
몽트뢰이(Montreuil)는 파리 동쪽에 접해 있는 인구 10만의 도시다. 90여 개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놀라운 인종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곳엔 예전부터 노동자, 이민자들이 자리 잡고 살아왔다. 80~90년대를 기점으로 이곳에 있던 작은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그 자리를 예술가들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공장터가 예술가들의 아틀리에(공동제작공간)로 개조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이제 몽트뢰이는 프랑스에서 인구 중 예술가 비율이 제일 높은 도시로 꼽히기도 한다. 여전히 몽트뢰이 주거지의 1/3이 사회임대주택일 정도로 임대주택 비중이 높고, 난민 수용을 위해 지자체가 적극적 노력을 기울이는 곳이기도 하다. 몽트뢰이의 새 주민층이 된 소위 보보(부르주아 보헤미안, 히피적·좌파적 감성을 지닌 부르주아)들과 기존 주민들은 그럭저럭 마음이 맞는 이웃이 되어갔다. 단 한 번 녹색당 시장이 당선된 적을 제외하고, 근 1세기 동안 공산당 시장을 배출했다는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온 것만 봐도 그렇다. 
 
바로 이 도시에 유럽에서 제일 큰 공공영화관 멜리에스(Méliès)가 자리 잡고 있다. 공공도서관은 익숙하지만 공공영화관은 우리에겐 좀 낯선 개념이다. 프랑스엔 지자체가 소유주인 스크린이 1300여 개(전체의 약 15%) 정도 있고, 이들은 대부분 상업영화관이 들어설 만큼 인구가 많지 않거나, 기존 상업 영화관이 경영난으로 손 털고 나가자, 지자체가 주민들의 문화향유권을 위해 영화관을 사들인 케이스다. 절대 다수가 단관 혹은 2관 정도의 소규모이며, 대부분 민간단체에 다소의 지원금을 주고 위탁운영 한다. 이 가운데 6개관 규모(79석~319석)의 공공영화관 멜리에스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다.

영화관에서 '상업' 두글자를 뺐더니
 

붉은 카펫이 깔린 영화관 멜리에스 내부 ⓒ 목수정

 
파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이 영화관에선 매달 80여 편의 영화들이 상영된다. 국적으로 따져보자면 약 25~30여 개 나라의 영화들이다. 프랑스와 미국 영화가 가장 자주 보이지만, 터키, 마케도니아, 중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러시아, 브라질, 캐나다, 스웨덴, 보스니아, 한국...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의 국적 수만큼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을 멜리에스에선 익숙하게 만날 수 있다.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 고전 영화, 독립영화, 블록버스터 영화 등 영화의 형태에도 경계가 없다. 멜리에스의 프로그래머 눈에 들기만 한다면!

한국영화계의 고질적 악습인 '스크린 독과점'은 원칙적으로 불가하다. 프랑스의 모든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는 동시에 두 개 이상의 관에서 상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멜리에스는 최대치의 다양성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는다. 개봉 영화를 올릴 땐 최소 2주 이상 상영한다.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면, 그 다음 달에도 상영할 수 있지만 상영은 늘 단관에서, 최대 5~6주까지 이뤄진다. 매달 32쪽 짜리 상영표를 만들어 도시 곳곳에 배포하므로 미리 결정된 일정은 영화 흥행성적에 따라 변경되지 않는다.

관람료는 2.5유로에서 최대 6유로(약 3000~7000원), 일반 멀티플렉스들에 비하면 절반가다. 상영되는 영화의 85%는 소위 예술실험영화인데, 객석점유율은 프랑스 상업 영화관들의 평균을 두 배 이상 뛰어넘는다. 

멜리에스에 들어서면, 먼저 넉넉한 공간 구성에 압도당한다. 3층, 총 3500m²의 공간에는 6개의 영화관, 도서관, 까페·레스토랑, 유아놀이방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1층 매표소에서 올려다보면 높은 천정에 커다란 달이 걸려있다. 영화관의 이름이기도 한 전설적인 프랑스 영화감독 멜리에스(1861-1938)의 대표작 <달 여행>(Voyage dans la lune·1903)을 상징하는 것으로, NASA가 찍은 실제 달의 모습을 축소해 만들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밟고 2층에 올라서면 테라스까지 이어진 탁 트인 공간에 넓게 펼쳐진 까페 겸 레스토랑 라 파뷔(la Fabu)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를 보고 나면 쫓기듯 지체 없이 뒷문으로 나와야 하는 일반 극장에서와 달리, 누구든 이 여유로운 공간에 걸터앉아, 착한 가격의 유기농 와인을 마시며, 보고 나온 영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로 눈길을 끄는 요소는 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매표소나 수표대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기계적 친절함과 유니폼 속에 자신을 감춘, 상업 공간의 그 흔한 직원들이 아니다. 제집에 온 사람을 맞는 듯 여유롭고 개별화된 친절함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직원들은 멜리에스의 '낯선 온기'를 구성하는 강력한 요소다.

영화 끝난 뒤에 시작되는 일
 

영화관 내 도서관 북 리브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책의 자유로운 이동을 돕는 운동. 북 리브 ⓒ 목수정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이 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화 내에서의 다양성 뿐 아니라 이 공간 안에서 경계 없는 문화 프로그램과 시민 활동가들의 다양한 활동들이 쉼 없이 꿈틀거린다.

영화관 2층에 자리 잡은 도서관은 '북 리브(Bouq Lib)'라는 이름의 도서운동 단체가 운영하는 코너다. 누구든 세상과 나눠 읽고 싶은 책을 북 리브 운동에 참여하는 공간에 갖다 준다. 그럼 그 책 등에 푸른 색 "Bouq Lib" 스티커가 붙고, 서가에 꽂힌다. 사람들은 그 책들을 거기서 읽어도 되고 마음 내키면 들고 떠나도 된다. 다 읽은 책은 사람들 눈에 띄는 어디에든 놔두어야 하는 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그곳이 까페든 화장실이든 공원 벤치든 상관없다. 프랑스에서 널리 상용화된 공공 자전거 벨리브(Velib)를 쫓아 작명한 듯한 이 책 돌려보기 운동은 2011년 바로 이 몽트뢰이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이다.

멜리에스엔 당연히 철학의 자리도 있다. 아이들을 위한 철학 아뜰리에가 한 달에 한 번씩 까페 한켠에서 열린다. 어른들을 위한 '철학으로 영화 읽기' 프로그램은 '콜레즈 인터내셔날 필로(국제철학개방대학)'와 파트너십을 맺고 매달 진행된다. 4월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1962년 영화 <에클립스>가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런가 하면 매주 토요일 오후엔 몽트뢰이 지역화폐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정기 모임이 멜리에스 내 도서관에서 열린다. 지역 화폐 사용자들끼리 화폐 교환도 하고, 지역화폐를 알리기 위한 홍보활동도 진행한다.

멜리에스가 예술영화관 지원금을 탈 수 있는 쿼터(75%)를 훌쩍 넘어 소위 "좋은 영화"들로 스크린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게, 여기에 있는 카페 '라 파뷔'도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평범하지 않은 카페다. 모두가 주인이고 주주이며 수평적인 역할 분배와 민주적인 투표방식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협동조합이다. 

카페에서 파는 모든 음료와 술은 유기농산물이고 60% 이상은 지역농산물이다. 멜리에스가 좋은 영화들을 틀어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것처럼, 여기도 지역농산물을 주로 파는 까닭에 지역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 대신 팝콘도 콜라도, 프랑스 아이들이 즐기는 전통의 불량식품 봉봉(젤리형 사탕)도 없다. 좋은 영화로 정신의 양식을 채운 후, 나쁜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종종 저녁엔 재즈 콘서트가 카페 한 구석에서 마련되기도 한다. 몽트뢰이에 무대를 필요로 하는 가수와 음악가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들을 위해서도 멜리에스는 기꺼이 문을 여는 것이다. 

알수록 매혹적인 이 공간의 껍질을 한 겹 더 벗겨보기 위해 지난 8일 예술감독 스테판 구데(Stephane Goudet)를 만났다.

"우리에겐 이윤을 남길 권리가 없다"
 

스테판 구데 멜리에스의 예술감독 스테판 구데 ⓒ 목수정


- 멜리에스의 프로그램은 늘 감탄스럽다.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선정하나?
"다양성의 극대화, 원칙이 있다면 그거다.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워야 하고. 나와 또 다른 프로그래머 한 사람이 영화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주민들의 요구도 적극 반영한다. 몽트뢰이 내에 있는 영화동호회를 비롯, 다양한 시민단체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보길 원하는 영화들, 우리 프로그래머들이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에 대한 의견을 전달 받고, 반영하는 편이다."

- 좋은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서 꼭 많은 관객이 든다는 보장은 없는데... 
"멜리에스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먼저 시네필들과 영화인들을 사로잡았다. 일주일에 3~4번은 감독 초대 행사를 진행한다. 감독들, 배우들은 기꺼이 우리의 부름에 응해주었다. 멜리에스는 영화를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입체적으로 즐기고, 소화하고, 논하는 장소로서의 성격을 획득해 나갔고, 그런 것들이 관객들을 만족시켜갔다."

- 이 정도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매주 3~4차례의 행사들을 치러내려면 다른 영화관에 비해서 예산이 더 많이 소요될 것 같다. 멜리에스의 재정구조는 어떤가?
"인건비를 포함해서 우리가 쓰는 모든 비용의 80%가 관객들이 내는 입장료로 충당된다. 나머지 20%는 정부와 지자체 지원이다. 즉 프랑스국립영화센터(CNC)에서 예술실험영화전용관에 대한 지원금으로 8만유로(약 1억 원)을 주고, 지자체에서 홍보에 드는 프로그램 제작비,  관객개발을 전담하는 직원들에 대한 인건비 조로 일정액을 지원한다. 관람료를 조금만 인상하면 재정 독립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멜리에스의 목표도 지자체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지난해에 1유로 정도 입장료 인상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시의회에서 반대했다. '우리는 멜리에스가 관객층을 더 폭넓게 확대하는 걸 목표로 한다. 입장료가 저소득층에 부담이 되어선 안 된다.' 이게 시의회의 논지였다. 바로 그런 목적을 멜리에스가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의회는 새로운 관객 개발을 위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다. 

우리는 이윤을 남길 권리가 없다. 이윤이 발생하면 그걸 어떤 식으로든 관객에게 돌려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윤이 발생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돌아가는 득이 최대치가 되도록 극장을 운영한다. 예를 들면, 좋은 영화들을 틀고, 입장료를 낮게 책정하는 것. 직원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도."

-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영화 프로그램 선정에 있어서 이런저런 외압이나 간섭을 받는 경우도 있나?
"며칠 전, 영화 <나는 태양을 원해(Je veux du Soleil)> 시사회가 있었다. (프랑스 극좌정당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 소속 프랑수아 뤼팡 의원이 영화감독 쥘 페레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마크롱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 노란조끼 운동을 취재한 다큐 영화. - 기자 말) 이 시사회를 위해 3개의 관을 할애해했는데, 좌석들이 순식간에 매진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아시다시피 몽트뢰이 시장은 공산당이다. 두 정당은 내년도 지방선거에서 라이벌 구도를 펼칠 거다. 시장 입장에선 라이벌 정당의 정치인이 만든 영화 시사회가 몽트뢰이 시민들 앞에 초대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은 우리에게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멜리에스의 프로그래머에겐 100%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다."

- 그날 시사회에 있었다. 시장도 왔는데, 관객들 앞에서 발언하지 않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가끔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거의 그러지 않는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된다는 걸 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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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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