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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24 08:07 수정 2019.05.24 08:11
"순이 엄마, 케비에스(KBS) 틀어 봐."
"아따 성님! 일찍도 오셨소. 방송하고 있는갑소."


집에 TV가 없는 노연금이 이웃집으로 마실을 왔다. 그런데 이 마실은 특별한 마실이었다. KBS는 1983년에 6.25 33주년을 맞아 6.25 때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해 특별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노연금은 이 방송을 보려고 마실을 온 것이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6월 30일 오후 10시 15분부터 2시간 방송 예정이었으나 2시간 30분으로 연장되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 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시청률이 무려 78%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 경이적인 현상에 광주 황계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의 노연금도 합류했다.

"저 어렸을 때 이발소에 맡기고 갔었어요?"
"예, 맞어요."
"오빠. 엉엉엉."

TV에서는 연신 헤어진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사람들의 눈물은 강과 바다를 이루었다. 종이 팻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연금의 눈물도 쉴 새 없이 흘렀다. 어젯밤 이장 집으로 서울 사는 딸이 전화를 해왔다.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TV를 매일 봐요?" "시끄럽다. 네 아버지가 죽긴 왜 죽어!" 노씨는 역정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새벽에 집에 가서 쪽잠을 잔 노씨는 부리나케 순이네 집으로 다시 왔다. 노연금은 TV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렇게도 애타게 찾는 남편은 나오지 않았다. 비슷한 인적상황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도 허사였다. 

며칠째 TV에 눈을 고정하느라 눈이 쾡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순이 엄마를 포함해 동네 사람들 모두는 노연금이 헛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녀가 33년 전 죽은 남편을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 데에야...

마지막 외출
 

박정환14연대 헌병대에 근무한 박정환 ⓒ 박만순

 
"아빠 또 올게. 잘 있그라."
"하루 더 자고 가."
"안 돼요, 어머니. 집에 더 있으려면 휴가를 받아 와야 돼요."

군인 박정환은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리며 외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8세짜리 딸 귀덕이를 번쩍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소녀 귀덕이는 군복을 입은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빳빳한 군복에, 파리도 미끄러질 법한 군화는 얼굴도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

3대 독자인 박정환은 늦깎이로 군에 입대했다. 14연대 헌병대에 입대한 덕에 그는 남들보다 휴가나 외출이 자유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어린 귀덕에게 "또 온다"고 하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날 외출은 그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박정환은 부대 복귀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렀다. 전남 광주군(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면 황계마을에서 광주시로 나왔을 때 한 군인이 그를 붙잡았다. "잠시 실례 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가 연행된 때가 여순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그는 여순사건 관련자로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3대 독자 박정환이 대전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음은 진작에 알았다. 마지막 외출을 하고 간 며칠 후 시계, 옷 등 소지품이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가 검거된 직후 근처를 지나가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집에 전해 달라"고 한 것이, 며칠 만에 본량면 황계마을 집으로 왔다. 아들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한 부모가 백방으로 아들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옆 동네 사람 오○○이 박정환의 소식을 갖고 왔다.

"정환이 갸는 대전에 있어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오○○이 알려준 것이니 틀림없었다. 1년 동안 남편 소식을 몰라 가슴이 새까매진 아내 노연금이 옷가지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대전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불던 1949년 10월 말 대전형무소 면회실. 장발을 한 남편이 앉아 있었다. 미결수로 머리를 1년 동안 깎지 않아 장발이 된 것이다.

"나는 잘 있응께, 부모님 잘 모시고 있소. 내 나가서 잘 해줄팅께."

아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았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다음 달 노연금은 셋째 딸 박청숙(당시 5세)을 데리고 대전형무소를 다시 찾았다. 남편은 기결수로 처리돼 머리를 박박 깎았고, 장갑공장에 출역(出役)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면회가 안 된다는 형무소의 방침에 따라, 남편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가족과 마을 어른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었다. 집안 아저씨 두 명이 사망했다고 하자,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루는 대전형무소에서 편지가 왔다.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가루치약과 칫솔, 내의를 보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당시 형무소에는 의복과 생필품 보급이 형편없었다. 그러다 보니 월동 준비를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사는 김석암이 대전형무소에 있었기에, 면회 가는 그의 아버지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김석암은 도중에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박정환에게 전해질 물건들은 다시 집으로 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이후에는 가족들이 박정환 면회도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박정환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남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아내 
 

박정환과 동료14연대 근무시 동료와 촬영한 박정환(왼쪽) ⓒ 박만순

 
노연금은 용하다는 이웃 마을 점집으로 향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개다리소반 위에 쌀과 동전을 놓고 한참 운세점을 보던 노파는 "죽었어. 그냥 시부모 모시고 잘 살어"하는 것이 아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러 군데서 점을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그리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이 허망하게 죽었을리 없었다. 자식과 친지들이 남편이 6.25 때 죽었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느그 아버지는 탈옥을 해서 북으로 넘어갔어야. 북한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여"라는 그녀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집안 가장이 부재하고 시어머니는 노인이라 일 할 수 없다 보니, 먹고 사는 일은 노연금과 둘째 딸 박귀덕(1941년생)의 몫이 되었다. 시골에 논도 밭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의 일 하는 것과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파는 일이었다. 마을 뒷산에서 나무를 해 광주 5일장까지 가려면 30리(12km)를 걸어야 했다.

"동지섣달(음력 11, 12월)에 머리에 나뭇단을 이고 가는데요. 개울을 건너는데 자갈이 발바닥에 붙어요." 양말과 신발을 신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귀덕은 "양말이 어딨어요. 버선밖에 없는디, 안 젖을라고 맨발로 걸어강께 자갈이 자석처럼 붙더랑께요"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울먹인다. "엄마, 더 이상 못가겠어요" "아가야 어쩔 것이냐. 이거(나뭇단) 못 팔면 식구들 전부 굶어 죽을 판인디..." 어머니의 얼굴을 본 귀덕은 다시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행운의 여신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판 나무는 서속(黍粟)과 꽁보리 한두 되를 사고 나면 그만이었다. 끊어질 것 같은 창자를 움켜쥐고 집에 와서 꽁보리밥과 고구마를 먹은 것이 그날 끼니의 전부였다. 이렇게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노연금 모녀편이 아니었다.

박정환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내는 임신하게 되었다. 노연금이 4대 독자 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은 대전형무소에 있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갑자기 앓더니 3일 만에 죽었다. 남편 면회를 갔을 때 이 일은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박정환이 죽은 지 몇 년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넷째 딸이 늑막염에 걸렸다. 당시 집에는 먹을 양식이 한 톨도 없어 10세 박귀순이 병원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귀순은 10세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단칸방 신세는 수년간 이어졌다. 방 하나에 할머니, 어머니, 딸 셋이 이불에 발만 넣고 잤다. 발 10개가 한 이불 속에 들어간 형국이었다. 경찰의 감시와 차별도 참기 힘들었다. 1950년 가을 군경 수복 후에 지서에서 툭하면 집뒤짐을 했다.

순경은 다짜고짜 "박귀덕이 어디 있어?"라며 신발을 신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 번은 소녀 박귀덕이 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을 때였다. 순경은 변소 문을 벌컥 열며 총부리를 들이대고 "아버지 어디 있어"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본 끔찍한 장면
 

증언자 박귀덕 ⓒ 박만순

 
박귀덕은 6.25가 지난 반백년동안 경찰만 보면 사지가 떨렸다. 군경 수복 후에 총을 들이대고 집에 수시로 찾아오던 경찰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목격한 끔찍한 장면 두 가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경이 수복한 지 얼마 안 있어, 박귀덕이 밭에 새를 쫓으러 가는데 강둑에서 경찰들이 부역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손이 묶인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직면하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들의 총알이 그들의 발보다 빨랐다.

며칠 후에는 본량지서 앞에서 못 볼 것을 봤다. 박귀덕이 지서 앞을 지나갈 때였다. 당시 지서에는 대나무로 죽창을 깎아 담을 둘렀는데 정문 앞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 목을 잘라 죽창에 걸어 논 것이다.

그것을 본 소녀 박귀덕은 한참을 토했다. 집에 간신히 돌아 와 며칠을 누워 있었다. 이 두 가지의 기억은 그녀의 뇌리에서 반백년 동안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 박정환도 어디에선가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들이 아버지 사망신고를 1960년도에 했지만 어머니 노연금은 남편이 죽은 지 33년 동안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밤새워 보았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신청한 박귀덕은 '진실규명결정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죽음의 불법성에 대한 인정일 뿐, 여순사건 당시의 재판자체가 불법이라는 국가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 관심이 무척 많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그녀는 카네이션을 들고 대전 골령골을 찾았다. "아버지"하며 수차례 불렀지만 아버지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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