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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14 09:28 수정 2019.06.14 09:28
"이봐 강씨, 읍내에서 회의가 있다고 오라대."
"읍내 어디요?"
"어디긴. 경찰서지."

강순구는 조준구(가명)의 전언에 대꾸 없이 집을 나섰다.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는 진주 강씨 집성촌인데, 강순구를 포함한 22명이 부여경찰서로 가기 위해 마을을 출발했다. 조준구의 반말지거리에 기분이 불쾌했지만, 어느 기관의 호출이라고 응하지 않겠는가. 평소에 장하리 마을에서 진주 강씨와 풍양 조씨 간에는 알력이 심했다. 강씨 중에는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조씨는 대부분 우익활동을 했으니, 그들 사이가 닭과 개와 같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강순구를 포함한 강씨 22명은 부지런히 걸어서 부여경찰서까지 갔다. 경찰서 안에 들어가자 조준구는 부여경찰서 사찰과 형사에게 이들을 인계하고 되돌아섰다. 이윽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야 이놈들 전부 유치장에 쳐 넣어" 부동자세로 있던 경찰은 형사의 지시에 "예"하고 이들을 유치장으로 밀어 넣었다. "왜 이래유. 우리가 뭘 잘 못했다고 그런데유?" "시끄러워 이 자식아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으르딱딱대는 경찰의 위세에 눌려 강순구 일행은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잠으로 자고 났을 때였다. "전부 나와"하면서 광목천으로 손을 묶기 시작했다. 일행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경찰이 총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사찰과 형사는 "빨갱이 놈들은 두드려 패야 정신 차린다니까"라고 하면서 이들을 인솔해 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행선지는 경찰서에서 멀지 않았다. 약 1.5km 떨어진 부여 낙화암 아래 구두레나루터였다. 일행을 일렬횡대로 세운 후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사찰과 형사의 신호로 총소리가 났다.

"탕탕탕"

22명이 세상과 연을 끊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재소자들을 학살하면서, 좌익에 대한 예비검속과 학살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런 와중에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강씨 22명이 부여경찰에 의해 낙화암 아래 구두레나루터에서 총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구두레나루터에서 죽은 인원이 총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백수십 명일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시신은 백마강에 버려졌고, 강물을 따라 서해안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시신은 충남 부여와 경계지역인 전북 군산의 섬까지 떠내려갔다. 인근의 주민들은 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 야산에 매장해 버렸다. 그리고 강씨들의 죽음은 반백년 넘게 역사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분노한 여성들이 금광으로 몰려간 이유

장하리 강씨 22명이 한날한시에 몰살한 것은 금방 마을에 전해졌다. 죽은 이들의 부인들은 통곡을 하며 울부짖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살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북한군이 내려왔다. 인공(人共)세상이 된 것이다. 강씨 부인들은 조준구 집으로 달려갔다. "준구 이놈의 새끼 당장 나와!" 그녀들의 손에는 식칼과 낫, 괭이들이 있었고, 눈은 살기등등했다.

조준구는 "살려 주시오"하며 손을 싹싹 빌었다. 맨 앞에 나선 여성이 "이 뻔뻔한 새X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와"하며, 조준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녀들은 조준구를 광목천으로 묶고 다른 조씨 집으로 갔다. 그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았지만, 그녀들이 붙잡은 조씨는 3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피난을 간 상태였다. 조씨 일행은 흥분한 여성들에 의해 근방 금광으로 끌려갔다.

구두레나루터에서 강씨들이 죽을 때처럼, 어떤 설명이나 절차 없이 조씨들은 순식간에 저승사람이 되었다. 다만 이들은 더욱 처참하게 죽어야 했다. 화가 난 여성들이 돌로 찧어 죽였기 때문이다. 좌·우 갈등과 국가폭력이 겹쳐지면서 마을에 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이 있고 약 두 달이 지난 후에 세상은 역전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후퇴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다시 왔기 때문이다.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여성들은 이미 도망간 상태였기에, 이 마을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런데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트럭운전수가 목격한 것
 

박경래부역혐의로 백마강변에서 학살된 박경래 ⓒ 박만순

 
서울에 살던 박경래는 전쟁이 나자 고향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로 피난을 갔다. 가족이 있었지만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며칠 후 박경래 처남 양승목이 누이와 조카들을 데리러 서울로 왔다. 수레에 이불보따리, 솥 등을 잔뜩 싣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해, 1주일 만에 부여읍 구룡면 주정리에 도착했다. 박노수(83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는 당시 14세였고, 어머니 양화목과 남동생 2명(8세, 4세)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피곤에 쩔은 양화목 모자는 친정집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만에 남편이 있는 용당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 어수선한 전쟁의 와중에 양화목 남편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구룡 분주소로 출근했다. 분주소원으로 활동을 한 것이다. 그가 분주소원을 하면서 누구를 해코지한 적은 없었지만, 국군이 수복하면서 검거대상 우선순위에 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경래는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용당리에서 비단 그만 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김광현, 유병기, 임양재, 김영채, 김영태가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들은 인공시절 분주소원도 아니었고, 특별한 감투도 쓰지 않았다. 다만 인민위원회에서 '밥 해놓으라'는 소리에 몇 차례 식사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적을 이롭게 한 이적행위(利敵行爲)로 둔갑한 것이다.

구룡면 용당리 사람을 포함한 부역혐의자들이 부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다가, 경찰서 트럭에 실리기 시작했다. 부여경찰서 트럭 운전수였던 박노연(당시 34세)은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부역혐의자들이 실린 트럭을 백마강변으로 몰았다. 장마에 범람했던 물이 빠져 나간 자리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박경래와 용당리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 이들만이 아니라 부여경찰서에 구금되었던 부역혐의자들이 학살을 당했다. 경찰들은 2인1조가 되어, 피로 얼룩진 시신들을 웅덩이에 쳐 넣었다.

시신들을 웅덩이에 가득 넣은 후 모래로 그 위를 덮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불과 2~3년도 안 있어, 고인들을 두 번 죽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부여와 청양사이의 전선을 연결하는 철탑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철탑을 그곳에 세운 것이다.
물론 철탑을 세운 장소가 부역혐의자 수십 명이 죽은 곳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철탑을 세우면서 유해가 엄청나게 훼손되었지만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독재정치가 판을 치는 1950년대 초반의 사회풍경이었다.

당시 트럭운전수였던 박노연은 반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동생 박노삼(84세. 부여군 부여읍)과 계수에게 당시의 비극을 전했다.
 

증언자 박노삼 내외부여경찰서 트럭운전사 박노연의 동생 내외 ⓒ 박만순

 
죽을 때까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은 어머니

부여에서 부역혐의로 죽은 이들이 모두 백마강변에서 참변을 당한 것은 아니다. 구룡면 주정리의 양일남과 용당리의 김영환은 국군 수복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다.

빨갱이 사냥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과 부여 백마강변에서 한스러운 죽음이 있은 직후 부여군 내 각 지서에서는 경미(?)한 부역혐의자들을 잡아들였다. 구룡지서에서는 면내의 좌익혐의자와 가족들을 잡아 들여 농협창고에 구금했다. 박경래 처 양화목과 매제 양승목도 창고에 잡혀 들어갔다. 구금된 지 며칠 후 경찰들은 창고에 갇힌 이들의 머리를 박박 깎았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양화목의 긴 머리가 바리깡으로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그런데 그녀는 머리가 잘린 일도 수치스러웠지만 더 큰 고통이 있었다.

2살짜리 아기가 젖을 먹지 못해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외할머니 집에 있던 아기 박노경(당시 집 나이 2세)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었다. 아기가 밥이나 죽을 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엄마 젖을 먹어야 하는데, 창고에 갇혀 있던 엄마는 먹을 것이 없어 젖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양화목의 친정엄마는 동네를 다니며 식량 구걸에 나섰다.

"우리 딸이 먹지를 못해 아기한테 젖을 못 주고 있어유. 사람 두 명 살리는 셈치고, 밥 한 덩어리만 주시유."

동네 사람들은 평소의 친분 때문에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동냥해 온 음식을 창고로 나르는 일은 양화목의 큰 아들 박노수의 몫이었다. "엄마 아기 왔어요" 하며, 아기를 건네는 걸 창고 보초는 차마 막지는 못했다. 포대기에 싼 아기를 건네면서 음식을 몰래 엄마에게 건넸다. 이렇게 해서 아기는 죽지 않고 생명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음식을 부지런히 날랐던 박노수의 특급작전이 항상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보초들은 "이 놈의 새끼 왜 또 왔어?" 하면서 군홧발로 조인트부터 깠다.

양화목이 몇 개월 만에 창고에서 풀려난 후 머리가 길을 때까지는 항상 수건을 쓰고 다녔다. 머리가 어느 정도 길면서 그녀는 평생 머릿수건을 쓰지 않았다. 전쟁 때 강제로 삭발 당했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계속된 주민 간 전쟁

이웃집 벼 타작 일을 하고 돌아 온 양화목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끝도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줄줄이 있는 자식들을 굶길 수는 없는 법이다. 쌀자루를 여는 순간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품삯으로 받아 온 한 되의 쌀이 돌 쌀이었다. 돌 쌀은 벼 타작을 하면 땅에 떨어지는 찌꺼기 쌀과 돌이 섞인 상태를 말한다. 이른바 쌀 반 돌 반의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이웃집은 구룡면 용당리의 소문난 부자인데, 품값을 그렇게 인색하게 준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집에 찾아가 항의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다음부터 그 집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난 남편 둔 죄'라고 스스로를 탓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된 생활에 새로운 고통 하나가 가중되었다. 구룡지서에서 "남편 어디 갔냐?"며 매주 찾아온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항의할 수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매주 찾아오는 윤 순경이 하루는 마루에 걸터앉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화목은 이웃집에 가서 급전을 빌려 구판장에서 담배 한 곽을 사다 윤 순경에게 주었다. 그제서야 윤 순경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양화목 모자가 그나마 용당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녀의 친정엄마가 침을 놓고 운수점을 볼 줄 알아 동네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 중 양화목의 친정엄마에게 침을 맞지 않은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용당리 유족부역혐의로 학살된 구룡면 용당리 유족들 ⓒ 박만순

  
구룡면 용당리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흐를 때까지 마을 사람들 간에 불화가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과 학살이 감정의 골을 깊게 팠기 때문이다. 마을 공회당은 톱질 전쟁의 와중에 좌우익이 상대편을 끌고 와 집단 뭇매를 가한 장소였다. 그러다보니 집안 간에도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일이 있기도 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이렇듯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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