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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31 14:20 수정 2019.06.01 15:22
"모두 내려갑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침이 터졌다. 서울역 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장애인들과 활동가 1백여 명은 1호선 서울역 승강장에서 선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열차를 기다리던 승객들은 영문을 모르고 당황해 웅성거렸다. 역무원들이 이리저리 내달리며 "내려가면 안 돼요"라고 소리쳤다. 삑삑대는 호루라기 소리, 지직거리는 무전기 소리, "장애인 이동권 쟁취하자"는 구호소리가 승강장에 가득했다.
 
휠체어와 함께 내려선 중증장애인들은 서로 의지하며 차가운 쇳덩이 선로에 몸을 눕혔다. 역사로 진입하던 전철이 경적을 크게 울리며 전조등을 비춰대더니 가까스로 멈춰섰다.
 
서울역 바로 앞에 있는 남대문서 경찰들이 출동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들은 곧바로 대자보를 찢고 플래카드를 거칠게 뺐었다. 그리고 선로에 내려와 해산 작전을 개시했다. "들어올려" "빨리 움직여"라는 고함소리,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는 외침, 연행되지 않으려는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지켜보던 승객들은 "어떡해,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흐느끼기도 했다. 또 몇몇은 손가락질하며 "왜 시민을 볼모로 이러냐"고 목소리를 높혔다.

'우우웅' 울어대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김병태는 잠이 깼다. 쉰 중반에 이르러서인가 요즘은 아침 나절에도 선잠이 들곤 했다. 얕은 잠이었지만 꿈은 선명했다. 

장애인 운동가 김병태
 

안산단원장애인자립센터 사무실에서 소장 김병태가 얘기중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 민병래

  
이십 년이 다 돼가지만 김병태는 2001년 2월 6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해 1월 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지체장애 3급이었던 박소엽(72)씨가 수직형 리프트를 타고 역사에 오르다 7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박씨는 전남 순천에서 설을 쇠러 올라왔다가 끔찍한 변을 당했다.
 
사고 이후 서울장애인연맹·노들장애인학교 등 장애인 단체들은 대책위를 만들고 철도청(현 코레일)과 보건복지부를 항의방문했다. '책임자 처벌'과 '장애인 이동권 보장'이 요구였다.
 
당시 '장애인의 꿈 너머'에서 활동하던 김병태는 대책위 상황실장을 맡아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등과 함께 싸웠다. 2월 6일 서울역 선로 점거는 30분 만에 끝났지만 파장은 컸다. 그들은 직접행동과 함께 '이동권 법률 제정'을 위해 싸워 나갔다.
 
그리고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2004년 12월 마침내 '이동권'이 법적권리로 인정받게 됐다.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 설치가 의무화됐고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장애인들이 앞장서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지금은 노약자와 임산부 등 교통약자 모두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잠을 흔들어 깨운 휴대폰을 김병태는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미안하지만 후원금을 이번 달까지만 내겠다"는 전화였다. 이번 달에만 벌써 세 통째다.
 
김병태가 '안산단원장애인자립센터'를 만든 때는 2018년이었다. 사무실은 다섯 평 남짓 되는 단촐한 공간이다. 책상 3개, 회의 탁자 하나, 냉장고와 정수기, 그리고 힘들게 마련한 에어컨. 특이하다면 휴대용 변기가 있다는 점이다. 집회 현장 가까이에 화장실이 없는 경우를 대비해서다. 또 턱 때문에 휠체어가 넘나들 수 없는 곳에 놓는 발판도 있다. 

이곳 후원금은 한 달에 약 70만 원 정도, 경기장애인자립센터에서 보내주는 지원금 35만 원까지 합하면 월 110만 원이 전체 수입이다. 여기서 월세를 내고 기타 운영비를 쓰고 나면 재정은 금세 바닥이다. 김병태는 고작 50만 원의 상근비를 받는다.
 
전북 임실에서 1965년에 태어난 그는, 이듬해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서울 동대문구 홍능 판자촌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무허가여서 강제철거를 당해, 구리시 인창동 산동네에 집을 짓고 1972년까지 살았다. 그리고 다시 회기동으로 이사해 경희중학교를 거쳐 덕수상고를 졸업했다.
 
당시 덕수상고는 명문 상업고등학교여서 은행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소아마비를 앓은 그에게 취직은 먼 꿈이었다. 지금은 장애인의무고용률까지 있는 세상이 됐지만, 당시는 원서접수거부가 당연한 일이었다. 1977년에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한 박창권, 영남대 약학과에 지원한 정길석과 구본영 등이 장애를 이유로 불합격 판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의 첫 직장은, 작은아버지가 청계천에서 운영하던 신발도매상이었다. 1983년 가을,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디뎠다. 아쉽게도 작은아버지 가게는 신통치 않았고 그는 1986년 스물두 살 나이에 독립(?)하게 된다. 말이 독립이지 리어카에 신발을 쌓고 쟁여 답십리, 장안동 일대를 돌아다니는 노점상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 준 것은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였다. 정립회관 출신 대학생과 청년들이 만든 이 단체에 김병태는 총무 일을 맡았다. 그는 낮에는 노점상을 하고 밤이면 울림터 사람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1986년 "세상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고 결심한 김병태는 경기도 안양의 노동현장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30여 년 세월을 그는 안양과 안산에서 살아왔다.

'따릉 따릉' 알람 소리를 듣고 김병태는 사무실을 나섰다. 아내는 오늘 '함께크는여성 울림'에서 저녁 행사가 있다. 그래서 그가 애들 저녁상을 준비해야 한다. 

민들레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다
 

장애인자립센터 앞 포장마차에서 센터앞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주를 나누며 그의 인생역정을 들었다. ⓒ 민병래

  
김병태는 1996년 '장애우대학'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때 아내는 '노들장애인야학'과 형제조직인 '새날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대성리 MT 날, 경춘선 열차가 대성리역에 내렸을 때 마당에는 6월 장미꽃이 반겨주었다. 장미꽃을 무심코 어루만지는 김병태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장미꽃 좋아하세요? 난 민들레가 좋은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김병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저도 민들레꽃이 더 좋아요."
"어머, 그래요?!"

반기는 그녀의 머릿결 뒤에 북한강의 포근한 바람이 일렁거렸다. 그날 이후 아내는 늘 김병태 옆에 있었다. 그리고 딸 둘에 아들 하나를 거느린 대가족(?)을 일구었다.
 
사실, 처가에선 반대가 심했다. 전라도 출신에 고졸, 장애인이면서 당시 진보운동을 하던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인사를 갔지만 어른들은 단호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 일등을 했던 딸' '귀하디 귀한 딸을 내어줄 수 없다'고.

그런데 아내는 더 단호했다. 그날로 아내는 짐을 싸서 김병태가 살던 안산의 단칸방으로 왔다. 거기서 신접살림 아닌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2003년에 첫째를 낳았을 때 장인이 다니러 오시긴 했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쓸개가 터져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모셨다"는 전화가 왔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이었는데 안산에서 서울까지 얼음길을 한걸음에 내달렸다. 그리고 비로소 가족들과 손을 잡게 되었다.

지금은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 그나마 이사 걱정은 안 한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애들을 보면 "저 녀석들 미래를 잘 돌봐줄 수 있을지" 늘 근심이다.

김병태는 기름이 톡톡 튈 때 소시지를 올렸다. 둘째는 노릇노릇하고 살짝 탄내가 나는 소시지를 좋아했다. 계란도 듬뿍 풀었다. 셋째는 스프처럼 걸쭉한 계란국에 밥 말아먹는 걸 좋아한다. 우유까지 챙겨놓고 김병태는 다시 집을 나섰다. 5월 저녁 무렵인데도 한낮 더위가 남아있다. 먼 하늘에서 별빛이 조금씩 기지개를 켰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병태의 마지막 일과는 활동보조서비스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 밤 시간을 내어 중증장애인의 용변, 식사, 목욕을 지원하고 있다. 차에 올라 담배를 하나 물으니 웃음이 나온다. '장애인 활동보조 제도화'는 장애운동의 큰 축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자기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강대교 건너는 데 7시간   2005년 12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홀로 살던 중증장애인이 자기 집에서 얼어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파로 보일러 수도관이 얼어터져 물이 방안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의 필요성이 터져나왔다. 

"36년 동안 빈집에서 하루 종일 TV만 보며 살았습니다."
 
2006년 4월 27일. 흐느끼는 연설이 시작되자 한 명씩 한 명씩 휠체어에서 아스팔트로 내려갔다. 한강대교를 기어서 노들섬까지 가는 시위. 4월 말이지만 강바람은 매서웠다. 길바닥 냉기가 얼굴을 찌르듯 올라왔다. 80여 명의 장애인들이 목장갑을 끼고 무릎보호대를 찬 채 세상에서 제일 느린 행진을 시작했다.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였던 김병태도 대열에 있었다.
 
"저도 더 이상 가족들 눈치를 보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부르짓듯 외쳤다. 그 외침을 후려치듯 경찰의 확성기가 왝왝 댔고 구급대의 사이렌이 거칠게 울어댔다. 5개 중대나 달려온 경찰은 서둘러 방어벽을 치기 시작했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몸을 흐느적거리며 무릎걸음으로 나아갔다. 이마저도 힘들면 기어갔다. 그것도 안 되면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갔다. 행렬은 30분도 채 못 돼 탈진 상태가 됐다. 강바람은 할퀴듯 대열을 파고 들었고 여기저기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났다. 끙끙 대는 신음 속에서 "어머니에게 제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흐느낌이 들렸다.
 
다시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휠체어를 쇠사슬로 묶고, 헤져버린 무릎은 붕대로 감고, 옆 사람에게 물을 떠먹여주며, 멈추지 않고 멈추지 않고 노들섬으로 나아갔다.
 
7시간에 걸친 행진. 이날 한강대교 남북단은 마비됐고 서울시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날 밤 서울시장 이명박은 30억 예산의 '장애인활동보조 서비스' 시범사업을 약속하게 된다. 

일을 마치고 나오니 벌써 오후 11시가 다 됐다. 늦었지만 그는 안산 호수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또 걸려온 후원금 중단 전화는 김병태의 마음을 무지근하게 만들었다. 성인을 들어 올려 목욕을 시키다 보면 온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속옷까지 젖는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몸이 힘들면 그는 이곳 호수공원에 들른다.
 

트럼펫을 부는 김병태그는 안산 호수공원에서 달빛 별빛과 함께 하는 트럼펫 연주를 좋아한다. 아쉽지만 사무실에서 그의 연주를 들었다 ⓒ 민병래

    
날이 맑아 달빛이 고왔다. 저녁 무렵 기지개를 켰던 별빛들도 호수 위에 빛망울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트럼펫을 꺼냈다.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면 힘이 되는 놈이다. 덕수상고 밴드부에서 배운 악기다. 도금은 벗겨졌지만 손때가 묻어 더욱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밸브를 눌렀다. 대성리에서 아내가 좋아하기에 그날부터 좋아하게 된 꽃, 그 꽃을 노래한 '민들레처럼'이다.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그의 연주는 호수공원을 따사롭게 감싸면서 멀리 퍼져나갔다. 별빛은 호수 위에 민들레 모양의 별 그림자를 조금씩 수놓고 있었다.
 
<덧붙히는 이야기>

* 이 글은 김병태와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였습니다.
* 아래 자료가 큰 참조가 되었습니다.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 한국 장애인 인권포럼 정책위원 윤삼호
<한국 사회 진보적 장애운동의 역사> --'전국장애인철폐연대'(준)의 사무처장이었던 조성남
*  이 사수만보 연재는 사실에 입각하되 '문학적인 인물평전'을 써가고 있습니다. 일정 부분은 상상으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김병태의 프로필>

1965.11월 전북임실 신평면 출생
1966.10월 소아마비 전염
1978.2월 청량초등학교 졸업
1981년 덕수상고 입학
1983년 청계천 동문시장 신발도매상에서 첫 직장 생활시작
1986년 울림터 총무
1987년 안양 명학역 인근의 프린스전자 입사 87년 대투쟁에 참여
1987년 민중대통령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 참여
1989년 안산 반월공단 삼신금속 입사 노동조합 건설
1991년 박창수열사 대책위 투쟁기획부 참여
1992년 노동자후보 안기석 선거대책본부장
1999년 11월 서울장애인연맹 연대사업국장
1999년 민주노동당 안산지역위원회 공동대표
2000년 장애인실업자 종합지원센터 소장
2003년 안산노동인권센터 상근
2004년 경기장애인연맹 창립대표
2005년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
2007년 1월 에바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2011년 진보신당 경기도당위원장
2015년 경기장애인차별철폐 공동대표
2016년 에바다장애인자립생활센터 10년 근무 퇴직
2016년 10월 경기북부 장애인인권센터 센터장 근무
2018년 안산단원 장애인 자립센터 센터장 
 
< 김병태가 걸어온 시간들> 
 

청량초등학교에서 소풍을 갔을 때구리시 인창동에 살다가 청량초에 입학했다 ⓒ 민병래

   

경희중학교 합주부에서 연습하던 사진여기서 그는 선배였던 김광석을 만났다. 왼쪽에서 첫번째가 김병태다 ⓒ 김병태

   

덕수상고 밴드부에서 연습하는 장면트럼본의 맨 마지막 주자가 김병태다 ⓒ 민병래

   

2003년 안산노동인권센터에서 서명운동하는 장면이동권 쟁취를 위해 안산 전역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 김병태

   

촛불광장에 선 김병태가족장애우대학에서 만난 아내,그리고 세자매와 함께 광화문 광장에 섰다. ⓒ 김병태

 
 

가족들과 제주도에서 모처럼 가족들과 휴가를 즐긴 김병태의 행복한 모습 2017년 봄 사진이다. ⓒ 김병태

  

안산단원장애인자립센터를 만들기 전엔, 경기북부 장애인인권센터장으로 일했다. ⓒ 김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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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