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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21 08:46 수정 2019.06.21 08:46
1960년대 초반. 청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은 청년은 대학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친구 몇이 인사를 한다. "상균이 왔냐?" "아침 먹었냐?" "어" 웅성거림은 잠시고,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자 이내 잠잠해졌다.

과대표의 "차렷, 경례" 소리에 맞춰 학생들이 일제히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허상균의 아침잠을 깨웠다. 조순 교수의 '경제학개론' 강의가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교수로, 경제학하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강사였다. 그러다 보니 조교수의 강의는 항상 수백 명의 학생들로 들끓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허상균은 친구들이 같이 커피를 마시자는 얘기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캠퍼스를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연세대학교로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뜀박질을 했다. 5월의 따스한 햇볕과 꽃내음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그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강의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의실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아는 체를 했다. 이번 강의는 김형석 교수의 '행복론'이었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조치(上智)대학 예과를 거쳐 1944년 같은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마쳤다. 이후 중학교 교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강사를 지내다 1954년부터 30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근무한 이다.

허상균은 어제 오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회계원론' 강의를 들었다. 1박2일 동안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청강(聽講)의 강행군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른바 도강(盜講)을 한 것이다. 그가 학생이었다면 당연히 한 개의 학교 학생이어야지, 여러 개 학교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는 터이다. 일부 친구들은 상균이가 자기네 과 친구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

허상균이 1960년대 초반 소위 'SKY'의 도강(盜講)을 하고 다닌 것은 다른 이에게 사기 치기 위해 대학생 흉내를 낸 것이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허상균의 아버지 허준(1920년생)은 일제강점기에 대전공업보통학교(5년제)를 나와 일본에서 측량을 공부하기도 했다. 허상균(1941년생) 역시 3년 동안 수업료가 면제되는 교통고등학교를 나왔다. 또한 그의 집안 대부분이 대학교를 나왔다.
 

대전고보 시절의 허준 ⓒ 박만순

 
이는 상균의 할아버지 허식(1894년생)의 영향 탓이었다. 허식은 시골에서 서당에 다닌 것이 배움의 끝이었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가 일본식 교육을 받는 것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허식은 배움이 모자란 것을 평생 후회했고, 자신의 후손들에게는 '배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가훈'으로 삼았던 것이다.

허준은 충남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에서 허식의 독자로 태어났다. 허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근대식교육을 받았으며 대전공업보통학교 졸업 이후 일본에 건너가 측량기술을 배웠다. 그런 후에 '만주철도'에서 측량기사 일을 했다. 그런데 허식은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이였지만, 나머지 문제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장남이 왜 객지로 다니냐"며 아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였다.

몇 년 후 해방이 되었고 허준은 농사일을 하면서 한량처럼 지냈다. 그의 집안이 지주는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허준의 오촌 아저씨인 허림은 그의 집을 자주 출입했다. 허림은 진잠초등학교 출신으로 사회주의자였다. 이런 연유로 허준의 사랑방은 자연스레 마을 좌익 활동가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허림은 빈농(貧農)으로 집도 작았기 때문이다. 허준의 집에서는 초저녁과 늦은 밤에 모임이 자주 열렸다.

허준의 처 송현순(1921년생)은 농사 일 하랴, 일꾼들 밥 주랴, 정신없는 와중에 남편 손님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농번기에는 아침 참, 점심, 오후 참 세끼를 일꾼들에게 챙겨주어야 하는데, 남편 손님들에게 저녁까지 챙겨 주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시부모와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저녁상을 차려야 했으니...

하루는 참다못한 허식이 허림에게 "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 우리 집에 그만 와라"고 역정을 냈다. 그 후에도 모임이 몇 차례 더 이루어졌고 1950년 초 충남 대덕군 기성면에도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졌다. 허림은 허준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다. "조카,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살 수 있네" "아저씨는요?" "나는 가입하지 않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카에게는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하긴 했지만 허림 자신은 전향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흑석역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걸어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1일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비추던 시간에 '쿵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송현순의 "누구세요"하는 소리에, "지서에서 나왔소"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지서에서 회의가 있다'며 아버지 허준을 데려가려는 것이다. 허준은 아래채에 살고 있던 아버지 허식에게 "잠시 지서에 댕겨 오겠습니다"라고 문안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간 허준은 이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허준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 왔다. "동생이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허준의 8촌 형 허엽이 갖고 온 것이다. 허엽은 당시 대전에서 지서장을 했다. 그는 허준이 기성지서에서 유성경찰서로 이송된 후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만을 남긴 채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나머지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전에 피난 짐을 싸야 했다. 그런 경황 중에 허준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보도연맹 예비검속 시 허림은 마을을 벗어났다. 그가 보도연맹원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마을에 남았다면 죽음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군 점령 시절, 그는 대덕군 기성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60여 일 후 세상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국군이 수복해서 인공(人共) 때 감투 썼던 이들을 붙잡아 들인 것이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허림은 친구 한양섭의 집으로 도피했다. 당시 법원 서기였던 한양섭과 거취를 상의한 허림은 경찰에 자수했는데, 경찰관 수십 명이 한양섭 집을 에워쌌다. 그렇게 검거된 허림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청주형무소에서 석방되던 날 허식이 손주 허상균에게 "오늘 허림이가 나오는 날이다. 흑석역에 나가봐라"고 했다. 흑석역에 마중을 나가니 잠시 후에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에서는 삐쩍 마른 이가 내렸다. 허림은 가족들과의 인사도 미룬 채, 허상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상균의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마을까지 걸었다. 오리(2km)를 걷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기 때문에 허준이 죽었다는 자책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의 아들 상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만약 그에게 6.25가 없었다면
  

대전관재국 입사초기 허상균(뒷줄 좌측이 허상균) ⓒ 박만순


자신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학살당하자, 허식은 '내가 만주에서 불러들이지만 안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하는 자책에 빠졌다. 하지만 아들이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것이 어찌 아버지 탓이랴.

그렇지 않아도 교육열이 강했던 허식은 자식이 죽자, 집안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허상균의 상급학교 진학에 무엇보다 열성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 허준의 죽음으로 인해 허상균이 마음 놓고 배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교통고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공채1기로 대전관재국에 입사했다. 관재국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던 곳이다. 그는 관재국 입사를 전후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청강을 했다. 직장에 근무할 때는 출장 기간에 청강을 했다. 출장 업무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한 후에 남는 시간에 대학교 강의를 들은 것이다. 이는 조부 때부터 내려온 교육열의 집안 내력이자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의 발로였다.

직장이 사세청(司稅廳)으로 통합된 얼마 후 그는 군에 입대했다. 경기도 가평의 통신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2급 비밀 취급 인가를 신청했는데 신원조회에서 거절당한 것이다. 화가 나 행정반에서 몰래 '기록카드'를 들쳐 봤더니,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자의 아들로 사상이 의심스럽다'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그였지만 허상균은 이후 직장생활을 즐겁게 했다. 매사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로 임한 것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성격을 내림받았으리라.

그는 팔십을 앞둔 나이에도 젊게 산다. 청바지에 연보라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인터뷰 내내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암울한 집안의 역사를 경험하고도 그의 품은 넓기만 하다. '만약 그에게 6.25가 없었다면'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 본다.
 

증언하는 허상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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