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9 09:50최종 업데이트 19.06.25 17:27
기록에 따르면 삼일운동 직후 국내외 각지에 임시정부가 세워진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회의,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 평양의 신한민국정부 등이다. 각지 임시정부 요인들은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대표기구가 되기 위해 통합을 추진,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킨다.

민주 공화제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이 되기까지 상하이(19년 4월~32년 5월)·항저우(32년 5월~35년 11월)·자싱(35년 11월)·전장(35년 11월~37년 11월)·창사(37년 12월~38년 7월)·광저우(38년 7월~9월)·류저우(38년 11월~39년 4월)·치장(39년 4월~40년 9월)·충칭(40년 9월~45년 8월) 등지로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7박 8일간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를 따르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임정로드 탐방단 기념사진(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계단에서) ⓒ 조종안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가 안내한 임정로드 주요 이동 경로는 상하이(上海)-자싱(嘉興)-항저우(杭州)-난징(南京)-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藄江)-충칭(重慶) 등.

필자는 2017년 1월 모 단체가 기획한 '임시정부 발자취를 찾아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상하이-자싱-항저우 등의 유적지만 답사했다. 이번에는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진열관, 김구 선생 난징 피난처(회청교), 황포군관학교(광저우), 임시정부 요인들이 묵었던 건물(류저우) 임정 요인들이 광복을 맞이했던 충칭 등의 독립운동 흔적들을 직접 확인하고 느껴보기 위해 참여했던 것.


지난 4월, 임정로드 안내 메일을 받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접수부터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려가 하나둘 나타났다. 가장 큰 문제는 체력. 일정이 빡세게 잡혀 있는데 그 '고난의 행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럼에도 의열단원이 된 기분으로 집을 나섰고, 탐방 마지막 날에는 큰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한민국 역사가 시작된 거리 '서금이로'  

첫날(1일) 일정은 오전 10시쯤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 점심을 먹고 '중국의 명동'으로 불리는 서금이로(옛 김신부로)에서 시작했다.

서금이로는 명품 매장과 식당이 밀집한 번화가로 두 번째 청사가 있던 회해중로(淮海中路)와 이어진다. 김구 선생 가족이 살았던 영경방 10호와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등도 한두 마장 거리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여기(서금이로)는 당시 불란서(프랑스) 조계지였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이 거리 어딘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죠. 이 부근은 프랑스 조계지였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자주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겁니다. 조금 후 방문할 마당로 청사가 열두 번째 청사죠. 왜 그렇게 자주 옮겼을까요. 자금이 없어 집세조차 매월 내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이곳 김신부로 22호 청사에서 첫 회의가 열립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 임시헌장이 발표되죠. 제1조는 '민주공화제', 7조는 '평등'을 강조하고 있어요. '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한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시영 선생을 중심으로 왕정 출신 인물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겁니다. 실제로 김가진 선생 등이 의친왕(이강) 상해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죠."
 

이강(1877~1955)은 고종황제 다섯째 아들로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독립지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평소 '나는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하던 이강은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해 변복하고 한중 국경도시인 단둥(丹東)까지 갔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 송환된 것으로 전해진다.
 

버스에서 찍은 H&M 건물(대한민국 두 번째 임시정부 터) ⓒ 조종안

 
서금이로와 연결된 회해중로는 100년 전 '하비로(霞飛路)'라 불렸다고 한다. 그 중심에 있는 H&M건물(의류판매장) 자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번째 청사가 있던 장소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세 군데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가 하나의 통합정부로 재탄생했다는 것. 일제 감시망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던 첫 번째 청사와 달리 붉은 벽돌로 지어진 청사 외벽에 태극기가 당당히 내걸렸다고 한다.

김종훈 기자는 "그동안 수차례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 아쉬웠다"라며 "그러나 이 거리 어딘가에서 대한민국 역사가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인데 회해중로와 김신부로가 만나는 적당한 장소에 표지석 하나 세우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에서

탐방단은 예관 신규식이 거주했던 남창로(南昌路) 100농(弄) 5호 건물로 이동했다. 예관은 대한제국 시절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듬해(1911) 상해로 망명, 근대 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진독수(陳獨秀) 등과 교류한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과의 교류는 한국 청년들이 상해 여러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바탕이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관 신규식 선생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예관 신규식 선생은 불의에 항거한 '뜨거운 사람'으로 알려지죠. 선생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독을 마셨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을 때 독을 마셨다가 한쪽 눈을 잃었고, 경술국치(1910) 때도 독을 마셨는데 대종교 종사 나철 선생이 발견하고 극적으로 구해내셨죠. 그리고 이듬해에 상해로 망명하십니다.

그때 상해는 애국지사들이 없을 때였어요. 선생은 도시가 지닌 국제성에 주목한 겁니다. 일본의 힘이 미치지 않아, 외교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중심지가 될 것을 예견했던 것이죠.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오른 예관 선생은 외교사절 자격으로 쑨원과 회담하였고, 그 성과로 쑨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골목 두 번째 건물 2층에 예관 선생이 살았고, 건너편 건물에 진독수 선생이 살았어요. 진독수 선생은 중국 공산당 창시자이자 사상가죠. 1915년 <신청년>을 창간하면서 중국에 근대 사상계몽 운동을 일으킵니다. 이 잡지가 창간된 곳이 예관 선생이 살았던 그 건물이죠. 진독수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식에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요."

 

한 중국인이 자신의 휴대폰에 보관한 신규식 선생을 보여주고 있다. ⓒ 조종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김종훈 기자 설명을 듣던 낯선 남자가 다가오더니 신규식 선생 사진이 담긴 자신의 휴대폰을 내보였다. 김 기자와 일행들은 "그래 맞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현지 가이드 중계로 대화가 이어졌고, 그가 중국 문화재 관리인인 것도 알았다.

항일 유적지, 한글 표지판 보이지 않아 못내 아쉬워
 

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상하이 신천지 광장 ⓒ 조종안

 
탐방단은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으로 식사한 '원창리(元昌里) 13호'에 들렀다가 '영경방'으로 이동했다. 그 옛날 영경방 부근은 상해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으로 김구 선생 가족이 살았던 집은 식당으로 변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김구 선생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시장에서 주워온 배추시래기로 국을 끓여 끼니를 연명했다는 대목은 마음을 숙연하게 하였다.

영경방에서 5분쯤 걸으니 그 유명한 '신천지(新天地)'가 펼쳐진다. 상하이를 대표하는 패션 거리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 대표 대회가 열렸던 건물도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도 가까이 있다. 건물 하단에 부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푯말이 반갑게 느껴진다. 이곳 '마당로 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던 1932년 4월까지 사용했던 상하이 마지막 청사다.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전시실의 태극기와 김구 선생 흉상 ⓒ 조종안

 
임시정부 청사 1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와 김구 선생 흉상이 보인다. 그 앞에서 삼가는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조국의 독립만을 소원했던 김구 선생 집무실과 침실, 부엌 등도 옛 모습대로 재현해 놓았다. 이처럼 소중한 자료임에도 사진 촬영을 금해서 방문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2017년에는 주요 자료들을 카메라에 담았었는데...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여러 곳을 두 시간여에 걸쳐 돌아봤다. 가로수 우거진 도로변에는 지은 지 100년도 넘었을 고건물이 빽빽하다. 현지 가이드는 "개조하고 싶어도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귀띔한다. 그래서인지 유적지임을 알리는 한자 표지판이 나붙은 건물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봐도 한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없어 아쉬움이 밀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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