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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20 08:59 수정 2019.06.20 09:33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 왼쪽에서 중앙고등학교로 향하는 풍취 좋은 계동 길을 걷다보면 중간 왼편에 단아한 한옥 한 채가 나온다. 이 집은 근대기 동양화단의 거두였던 제당(霽堂) 배렴(裵濂, 1911-1968)이 1959년부터 1968년까지 10년간 살던 집이다. 그 이전에는 민속학자인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4-1948)가 살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계동 제당 배렴가옥 ⓒ 황정수

 
요즘은 서양화가 대세라 동양화가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1980년대 이전엔 동양화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어느 집이나 동양화 한 점은 걸려 있을 만큼 수요가 많았다. 그만치 화단과 애호가들 사이를 가장 많이 호흡한 미술품은 단연 동양화였다.

동양화라 하면 단연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의 '산수화'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인물화'가 유명하였다. 물론 다른 여러 저명한 화가들도 있었지만, 이상범과 김은호의 그림은 유난히 인기가 있어 동양화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그들의 제자들이 미술계를 호령하였다. 김은호의 제자로는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과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이 유명하였고, 이상범의 제자로는 제당(霽堂) 배렴(裵濂, 1911-1968)과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가 이름 있었다.

김은호의 제자들은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헌(樂靑軒)'을 중심으로 '후소회(後素會)'라는 모임을 통하여 활동하였으며, 이상범의 제자들은 이상범의 화숙인 '청천화숙(靑田畵塾)'을 통하여 활발히 움직였다.

지도력이 풍부했던 배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배렴 ⓒ 배렴 가옥

 
이상범의 제자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는 단연 '배렴'이었다. 보통 청전화숙을 대표하는 수제자로 배렴과 정종여를 꼽는데, 실제 이상범의 의발을 제대로 전수받은 이는 배렴이다. 정종여는 청전화숙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는 하였으나 실제 이상범으로부터 배운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정종여는 오사카미술학교로 유학을 가 당시 일본 화단의 새로운 경향인 '신남화(新南畵)'를 배운 신감각파였다. 이에 비해 배렴은 고향인 김천에서 상경하여 이상범을 통해 처음부터 그림의 기본을 다져가며 이상범의 미술세계를 그대로 전수받은 제자이다.

배렴은 근대기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어려움 없이 화단의 주요 인물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적으로는 매우 복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하자 스승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누구 못지않은 뛰어난 성과를 이룬다.

여기에는 전람회의 심사참여로 활동하던 스승 이상범의 많은 후원이 있기도 하였지만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도 있었다. 또한 해방 후에도 새로 생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화단을 이끈다. 이 외에 문화재 위원을 역임하고, 홍익대학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등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누린다.

특히 1954년부터 생긴 예술원 창설에도 깊이 관여를 하여, 예술원이 기틀을 마련하는데 많은 역할을 한다. 처음 예술원이 생겼을 때에 회원은 모두 25명이었는데 그 중 미술인은 7명이었다.

회장인 고희동과 동양화의 이상범, 배렴이 있었고, 서양화 부분에는 장발과 김환기, 그리고 조각부의 윤효중, 서예부의 손재형 등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스승과 제자가 모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니, 배렴의 미술계 위상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알 만하다.

금강산 기행과 금강산 그림
        

배렴 ‘산고수장’ 1958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금성출판사, 1975) ⓒ 금성출판사

 
배렴의 미술세계를 대표하는 갈래는 역시 산수화이다. 스승인 이상범으로부터 전수받은 그의 산수화는 전통적인 남종화에 바탕을 둔 담백한 그림이었다. 초기에는 스승의 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화풍을 보이다가 점차 자기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만들어 나갔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신남화'라 불리는 일본화풍을 참고하여 그리고 있었다. 이런 유행에 편승하여 배렴 또한 초기에는 신남화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점차 이에 염증을 내어 조선시대 남종화에 기반을 둔 담백한 화면의 남종화풍의 그림으로 전환하였다.

배렴의 산수화를 대표하는 모습 중의 하나가 금강산을 소재로 한 것이다. 당시 누구나 금강산을 좋아하긴 했으나 배렴의 금강산 사랑은 남달랐다. 배렴은 1939년 금강산을 방문하여 각 명승을 스케치한다.

그는 이때 남긴 방대한 양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금강산의 주요한 장면을 그려 이를 중심으로 1940년 화신화랑에서 개인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성황을 이루었고, 판매도 잘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린 그림을 그의 대표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렴의 대표작, '홍매'
           

배렴 ‘홍매’ 1957 ⓒ 황정수

 
배렴은 성격이 매우 단정하여 깔끔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화조 그림에서는 그의 단정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의 목련 그림이나 매화 그림 등을 보면 그의 성격이 얼마나 단정하고 깔끔했는지 알 수 있다.

필치뿐만 아니라 글씨도 매우 단정하여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주로 산수화를 많이 그려 필력 좋은 화조 그림을 보기 어려운데, 근래 우연히 한 소장가의 수장품 중에 매우 뛰어난 필치의 매화 그림 '홍매(紅梅)'를 보게 되었다.

'홍매'는 1957년 오당(悟堂) 김영세(金英世)란 이의 딸 결혼 기념으로 그려준 것이다. 지금껏 전해져 온 배렴의 화조 그림 중에서 가장 빼어난 필치를 보이는 듯하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송(宋)대의 대시인 매요신(梅堯臣, 1002-1060)의 시를 인용한 화제 또한 일품이다.
 
그대 집 시냇가에 매화 있었지만
보이는 건 꽃이 흰 매화뿐이었소 
우리 집에 홍매나무 기르고 있어
접가지 구해서 귀객에게 부치오
잘라 접붙임은 우정 맺음 같으니 
접그루 접가지 떨어져선 아니되오
내년에 꽃이 피어 술잔을 들 땐 
취기 오른 볼이 볼그름해질게요

 

시향이 그득한 글이다. 그림 또한 시에 못지않게 정취가 가득하다. 이 그림은 평소 배렴의 그림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흥취가 넘친다. 이 그림을 그리는 날 화가로서 배렴은 흥이 평소보다 더 고조되었던 모양이다. 화가의 솜씨는 처해진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발현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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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