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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7.19 09:02 수정 2019.07.28 10:54
대구에서 73일간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GMC 트럭에 올라탄 이준영(1924년생)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전쟁 초기 대전 산내에서 목격한 민간인학살사건이 형무소 간수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구에 있던 차석태 충남도경찰청 인사과장에게 찾아가 "간수 생활 정리하고, 경찰로 가고 싶습니다. 아무 직책이라도 좋으니 경찰로 보내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처가 쪽 친척이었던 차석태는 "그럼 인천상륙작전 하는 대로 갈래?"하고 해서 '좋다'고 응낙했다.

숙소로 돌아와 대전형무소 동료와 상급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니, 상급자 박근식이 펄쩍 뛰었다. 그는 "자네 이제까지 같이 고생하고 무슨 소리여? 처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에"라며 만류했다. 이준영은 경찰로의 전직을 포기하고 1950년 10월 3일 대전으로 향하는 GMC 트럭에 몸을 맡겼다. 오전에 대구에서 출발한 트럭은 오후에서야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형무소 정문에 도착하니 미군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이준영 일행이 도착하자, 뭐가 그리 급한지, "Thank you(고맙다)"를 연발하며 지프차를 타고 형무소를 떠났다.

"악."

누구랄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영 일행 앞에는 가히 '지옥도'의 세계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형무소 담벼락 근처에 있던 온상 밭에 수백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이준영의 증언이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을라면은요, 온상을 했거든요. 12척(4m) 높이의 담벼락 앞에 (묘종을 키우는) 온상을 길게 두 줄로 만들었단 말여. 거기에 시커먼 송장들이 그냥 전부 널부러져 있단 말이여."

시신의 눈은 온데간데없고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차라리 저희를 죽여 주십시오"

시신 가까이 가보니 더욱 끔찍했다. 북한군은 총알이 아까웠는지, 우익인사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을 쏜 듯했다. 어떤 시체는 두개골이 부숴진 경우도 있었다. 둔기로 때려서 숨지게 한 것이다. 멀쩡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이준영이 온상 밭의 시신을 둘러보고 있는데, 간수 한 명이 "대장님, 저쪽에도 난리가 났어요"라며 울부짖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니, 우물 앞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우물 주변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코를 감싸 쥔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이준영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셀 수 없는 시신들이 새까맣게 쌓여 있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우물이 공동묘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 형무소 내 우물은 총 4개였는데, 북한군이 학살 장소로 이용한 곳은 2개였다. 직경 2m의 우물은 둘레가 6.3m에 깊이가 11.6m였다. 직경 1m의 우물은 깊이가 2m로 작은 것이었다.

형무소 인근에 있던 도마리와 탄방리 야산에서도 시신이 나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준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남도경 사찰과로 갔다. 그는 사찰과장에게 "공산당 피의자 있으면 주시오"라고 했다. 사찰과장이 이유를 묻자, "대전형무소에서 죽은 반공애국지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오"라고 했다. 사찰과장은 7명의 부역혐의자들을 내주었다.

이준영은 "야, 이놈들아 여기 있는 시신들이 공산당 너희 놈들한테 돌아가신 분들이여"하며 시신 수습을 명령했다. 가마니를 펴고 양쪽에 목재를 대 들것을 만들어 시신을 정리하려 했지만, 어불성설이었다. 시신이 벌써 부패하기 시작해  제대로 옷을 걸치지 않은 시신을 손으로 잡으면 뭉클어지기 일쑤였다.

부역혐의자들은 "대장님! 차라리 저희를 죽여 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이준영이 보기에도 이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대전시청 사회과로 가서 협조를 요청했다. 3개동에서 300~400명씩이 동원되어 3일간 수습했다. 우선 온상 밭에 있던 시신들을 일렬로 눕혀 놓았다. 그 일에만 3일이 걸렸다. 그런 후에 들것으로 옮겨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은 화장을 해 매장했다. 우물에 있던 시신도 건져 내어 마찬가지로 했다.

형무소 문에서는 가족들을 찾는 유족들이 모여들었다. 들것을 든 이들은 문에서 잠시 멈춰 유족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시신들의 옷가지, 치아 등을 보았지만, 시신을 수습해 가는 이는 극소수였다.

시신들을 화장하는 데만 10일이 걸렸다. 시신들을 헤아려 보니 온상 밭고랑에서 300구, 두 우물에서 171구, 도합 471구였다. 유족들이 찾아간 시신을 고려하면 약 500명이 대전형무소 내에서 북한군에 의해 학살되었을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보고서>)
 
아이 때문에 피난 안 간 아버지
 

기타를 치던 석만수 ⓒ 박만순

 
일꾼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과수원을 한 바퀴 둘러본 석만수(당시 30세)는 부리나케 용화리(충남 아산군 온양면) 집으로 향했다. 갓난아기의 얼굴이 아른거려 차분히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는 종옥이었다. 남들은 북한군이 내려왔다고 해서 전부 피난길에 올랐지만, 석만수는 아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피난을 가지 못한 게 불안하기는커녕 아침저녁으로 종옥이 얼굴 보느라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아가 잘 있었나?"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석만수 있나?"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내무서에서 왔소. 잠시 갑시다" 청년 3~4명이 석만수를 끌고 간 곳은 아산내무서(아산경찰서)였다.

연행하는 이유는 붙잡아 갈 당시에도 설명이 없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산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동안, 석만수의 남동생 석광수는 매일 주먹밥을 날랐다. 하루는 석광수가 석만수 아내 문정희에게 "형수님! 내일이나 모레 형님이 대전으로 간다고 하네요"라고 했다. 갓난아기를 두고 남편 면회를 갈 수 없었던 문정희의 속은 타기만 했다.

대전형무소에 구금된 석만수는 자신의 미래보다 아기의 건강이 더욱 걱정이었다. '아기가 젖은 제대로 먹고 있나'하는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데 형무소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0년 9월 23일부터 3일째 밥을 주지 않았다. 전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벽에 끌려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감방에서 나간 후에 총소리가 난 것을 보면, 그들이 죽은 것은 확실했다.

1950년 9월 25일 1차로 나간 이들은 피난 가지 못한 경찰과 군인들이었다. 새벽에 총소리가 나면서, 그때부터 감방에 있던 이들은 전부 잠들지 못했다. 감방에 남은 이들은 하루 종일 불안에 떨었다. 이들 대부분은 지역 유지였다. 이들은 땅을 많이 갖고 있던 지주이거나, 장사를 크게 하던 이들이었다. 또한 공무원이나 전문직종에서 일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한청년단이나 국민회에서 감투를 쓰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반동분자'로 취급되었고, 충남도내 각 경찰서(내무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9월 말 대전형무소와 대전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고,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인 9월 25일과 26일에 집단학살되었다. 석만수 역시 9월 26일 새벽 대전형무소 내 우물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이들의 숫자는 구금되었던 471명을 포함해 총 1557명으로 파악되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재소자와 더불어 전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석만수는 어떤 활동을 했기에, '반동인사'로 분류되어 죽음의 대열에 끼었을까?
 
의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석만수 희생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명부. 출처: 이갑산, <집념을 불사르며>, 1984 ⓒ 박만순

  
석만수 아버지 석제경은 온양의 내로라하는 지역유지였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석재경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의전을 나와 서울 종로에서 개업을 했다. 그러다가 건강 문제로 충남 아산군 온양면으로 내려와 '온양공제병원'을 열었다.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큰 규모의 과수원과 논·밭을 소유했다. 그러다 보니 지역유지로 이름을 날렸다. 손녀 석종옥(70세,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의 증언에 의하면, 조부 석제경은 온양에서 인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악착같이 치부(致富)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석만수의 동생 석광수가 서울대 치대를 나오고, 그의 이복동생들이 연세대·가톨릭의대·숙명여대·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것을 보면, 석제경이 얼마만큼 부유했는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석만수는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안의 장남인 그는 평양에서 5년제 중학을 다니고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트럭 한 대만 사주세요, 그러면 어머니 모시고 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석제경은 본부인과 별거를 하고 있었고, 둘째 부인과 온양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석제경은 장남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석만수는 할 수 없이 온양에서 아버지 과수원을 도맡아 생활하고 있었다. 과수원에는 기술자와 일꾼이 있었기에, 그는 아등바등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해 기타를 끼고 살았다. 그런데 그에게 '반동'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왜 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소위 '반동'인사들을 잡아들였다. 검거대상은 월남인(越南人), 군인과 경찰 및 우익단체 활동가, 지역유지였다(임재근, '한국전쟁시기 대전지역 민간인학살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런 기준 때문에 석제경은 지역유지로 분류되었고, 검거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석제경은 전쟁이 나자마자 피난길에 올랐고, 석제경을 검거하지 못한 북한군과 지방좌익은 '꿩 대신 닭'이라고 그의 아들 석만수를 검거한 것이다. 석종옥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 활동을 했던 온양의 한 병원 의사가 밀고를 했다고 하는데, 이는 추측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석만수는 본인이 지역의 유지도 아닌데, 의사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군에 의해 구금 후 학살된 것이다.
 
용화리의 통곡
 

증언자 석종옥 ⓒ 박만순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석종옥은 이후 고된 삶을 살아왔다. 작은할머니에게 생활비를 타야만 했던 석종옥 가족은 눈칫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석종옥은 덕성여대에 입학했지만 졸업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어머니 문정희는 2012년에, 오빠 석종호는 2013년에 세상을 떴다. 어머니와 오빠 모두 말년에 기초생활수급자였기에, 그들의 뒷바라지는 그녀의 몫이 되었다.

대전 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석종옥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 특히 문학책을 좋아한다. 책 읽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도 좋아한다. 2014년 백제문학에 등단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묶어 글로 쓸 계획이다.

<용화리의 통곡>이라고 제목도 미리 정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그녀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우리민족이 겪은 비극이다. 민족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그녀가 좋은 작품을 써, 전쟁의 상처를 많은 이들과 나누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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