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2 13:12최종 업데이트 19.07.12 16:30
49년생 김영환.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지금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작업장으로 향한다. 그의 일터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좌전마을의 끄트머리,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집에서 몇 분 남짓 거리다. 스물여덟에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 집 뒷마당에 대장간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생선용 막칼'을 40년 이상 만들어왔다.

그는 아침이면 우선 화덕에 불을 지핀다. 그가 쓰는 재료는 '자동차 스프링 용 철'로서 KS 기호는 420·440B, 강도 65의 쇳덩이다. 화덕에선 금세 쇳덩이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덩달아 그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알맞게 익었을 때 그는 쇳덩이를 집게로 꺼내 기계 망치에 올려놓고 '쿵쾅쿵쾅' 두드려서 길고 납작하게 늘린다.
 

화덕에 칼을 넣는 김영환 장인 그의 하루는 화덕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 민병래

   
그 다음 대략 칼 길이에 맞게 '철컹철컹' 잘라낸다. 잘라낸 쇳덩이를 다시 달궈 칼 모양으로 재단하고 칼의 형상이 될 때까지 수도 없이 '땅땅 땅땅' 두드려준다. 수십 년 동안 해온 탓인가. 망치질을 할 때면 그의 심장 박동도 박자를 맞춰 '쿵쿵' 댄다.

망치질과 함께 달궈진 쇠를 찬물에 빨리 식히는 담금질 또한 중요하다. 연기를 마시고 '쉬익' 소리를 들으면 쇠는 몇 배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담금질을 거듭한 쇳덩이에게 '식은 망치질'을 더하면 칼 모양은 더욱 멋지고 평평하게 다듬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칼의 생명은 날과 빛깔이다. 은백색의 날카로움을 위해 갈고 또 갈아야 한다. 연마기에 칼을 대면 '끄아앙 그아앙' 소리를 내며 불꽃이 날카롭고 넓게 퍼진다. 그렇게 앞뒤를 섬세하고 꼼꼼하게 갈아내면 칼은 그제서야 매끄럽게 빛난다. 그런 다음 자루에 칼을 심으면 비로소 칼 한 개가 완성된다. 
 

연마기에서 날을 세우는 김영환 칼의 생명은 날이다. 연마를 통해 매끄럽고 빛나는 칼이 된다. ⓒ 민병래

 
이때쯤이면 대장간에는 쇳가루, 돌가루가 수북해진다. 열기는 한증막처럼 퍼져 김영환의 온 몸에선 땀이 뚝뚝 떨어진다. 불꽃과 물, 땀이 범벅되고 끝도 없는 망치질이 더해져 한 자루의 칼이 완성되는 것이다. 투박하지만 견고하고 뭉툭하면서도 예리한 그만의 칼, '좌전칼'이 완성된다.

불꽃과 물, 그리고 땀

김영환은 열여섯 살에 대장장이 길에 접어들었다. 초등학교에 늦게 들어간 그는 열다섯에 졸업반이 되었다. 용인중학교에 전체 3등으로 합격했지만 집안 형편상 돈을 벌러 나가야만 했다.


아버지가 천여 평 정도 되는 논을 일궜지만 추수가 끝나면 장리쌀을 갚아야만 했다. 한 가마를 꾸면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하는 고리 이자여서 한해 농사는 늘 꽝이었다. 그래서 5남매의 셋째였던 그는, 열세 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게 돼 늘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 급식을 나왔지만 강냉이 가루에 우유를 넣고 죽을 끓여주는 정도였다.

결국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인 1965년 8월 31일, 용인 가창리에 있는 대장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호미와 낫의 자루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망치자루도 만들었다. 초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 쉴 정도로 일은 고됐는데 월급은 500원이었다.

"그전에는 꽁보리밥도 먹지 못했는데, 보리가 약간 섞인 흰 쌀밥을 줬어요."

그때를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일이 힘들어 김영환은 10km 남짓 떨어진 집으로 걸핏하면 도망쳤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안쓰러워하며 묵묵히 받아주셨다.

그래도 손재주가 있어서 일을 빨리 배웠다. 그 덕에 대장간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이천 삼강공업사 김필상 대표에게 월 4000원을 받기로 하고 스카웃(?)되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2800원 정도였으니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거기서 강철과 연철을 붙여 접쇠를 한 다음 1200도 정도로 가열해서 낫과 호미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그는 철공소에서 먹고 잤기에 선배들이 퇴근하면 혼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화덕에 먼저 불을 지펴 놓고 연습을 거듭해 기술을 익혔다. 충북 제천에도 갔었다. 나중엔 여기저기 대장간을 떠도는 것이 몸에 익숙해졌다. 힘들 땐 노래로 외로움을 달랬다. '농부가 좋아' '연모' '이력서' 같은 노래가 애창곡이다.

그가 칼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김규복 사장 밑에서 일하면서였다. 거기서 쇳덩이를 달구고 작두로 자르고 벼림질 하는 것, 모양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런 세월들을 보낸 덕에 열여섯에 시작한 대장간 경력은 이십 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일정 수준에 올랐다. 쇳덩이로 만드는 연장은 웬만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젊은 날의 혈기였다. 용두동 시절 그는 일을 마치면 청량리에서 넝마주이들과 어울렸다. 밤마다 술병을 달고 살았고 패거리를 지어 야심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이런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않은 탓에 나중에는 위에 구멍이 나 청량리 성바오로 병원에 3개월이나 입원했다.

그는 퇴원 후 말없이 청량리를 떠났다. 살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경기도 시흥에 있는 칼 공장이었다. "일하는 것 보고" 월급을 받기로 하고 주인집에서 먹고 자면서 두세 달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아주머니 동생이 다니러 왔다. 그녀는 시흥에 있는 대한전선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스물네 살이었다. 김영환은 한눈에 반해 그날부터 구애를 했다. 그녀는 '대장장이'가 싫어 처음에는 거부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성실하고 일 잘한다"고 거들어준 덕분에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에 그녀와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28살, 고향으로 돌아와 대장간을 열었다

신혼살림을 서울 모래내에서 시작했는데 거기서 임춘섭 사장을 만났다. 고향이 황해도 은율인 임 사장은 제법 큰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영환이 "내가 고향에 가서 대장간을 차려 칼을 만들면 물건을 사주겠냐?"고 물으니,

"내래 니 물건 안 팔아 주갔소? 많이만 만들어 오라우."

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날로 정확히 1978년 9월 30일, 480만 원을 갖고 경기도 용인으로 왔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돌아온 고향이었다.

김영환은 형님 집 뒤켠 열 다섯 평 되는 공간에 대장간을 만들었다. 화덕과 스프링 함마, 머룻돌을 들여놓고 시작했다. 그날로부터 치면 벌써 대장간 연륜이 42년이다. 그가 가창리 대장간에 들어간 날부터 따지면 55년 세월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것이다.
 

김영환의 대장간 그의 대장간에는 거무스름한 빛과 푸르스름한 빛이 넘쳐난다. ⓒ 민병래

 
고향에 돌아온 무렵 그는 20대 중반이었는데 벌써 10여 년 경력이 있었다. 또 패기도 있었다. 그래서 전국을 다니며 열심히 영업했다. 물건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누구에게나 자신의 칼을 넘겨줬다. 이렇게 해서 대장간은 커져갔고 한때는 직원이 열 명이 넘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무리한 확대가 화근이었다. 1987년 무렵에는 전국에 깔린 외상 매출금이 1억원이 넘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외상 대금을 다 포기하고 규모를 줄이기로 결정했다. 직원 3명만으로 단촐하게 새 시작을 했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렇지만 2000년 들어서 그나마 있던 직원도 내보내고 19년 동안 혼자서 대장간을 지켜오고 있다.

사실 그가 만드는 수제칼은 스테인레스 칼과 공장 제조 방식, 그리고 중국에서 수입되는 칼 때문에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스테인레스 칼은 무엇보다 녹이 쓸지 않는 장점이 있다. 디자인이나 포장의 맵시도 달랐다. 그리고 공장 시스템을 통해 어느 정도 생산 규모를 가진 회사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칼을 만들었다. 하나하나 두드려 만드는 대장간 칼이 맞서기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안은 혼자서 살아내고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금도 인천어시장·노량진시장·가락동시장에선 그의 '좌전칼'을 찾는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은 "칼 가는 개인"들이다. 지금도 성남 일대에 살면서 자전거나 조그만 승합차에 숯돌을 싣고 "칼도 갈고 칼도 파는" 이동 소매상들이 있다. 이들이 꾸준히 '좌전칼'을 찾는다.

그는 '좌전칼'이라는 이름을 세운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그가 '막칼'에 상호를 새기게끔 인도해 준 사람은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철공소를 운용하던 홍순명씨였다. 1970년대 초 홍순명씨는 미군부대 철조망을 재료로 칼을 만들어 '용'이라는 상표를 새겼다. 그렇지만 그를 본 따 아무나 '용'이라는 도장을 새겨 마구 칼을 팔았다.

그때 김영환은 "자신의 칼을 만들 때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고향 '좌전마을' 이름을 칼의 상표로 택했다. 특허청은 "마을 이름은 안 된다"고 했지만 변리사의 노력으로 상표등록이 됐다.
  

좌전칼 상표가 새겨진 칼을 그가 들고 있다. 생선용 막칼인 그의 대장간 칼, 이름을 얻어 더욱 값지게 되었다. ⓒ 민병래

   
그의 마지막 바람, '좌전칼' 명맥 잇기

가족들은 이제 일을 쉬라고 한다. 대장간 일이 워낙 힘들고 고된 데다가 그의 몸이 성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으깨지고, 손가락과 팔뚝이 부러져 스텐으로 부목을 삼아 치료하기도 했었다. 쇠가 너무 익은 것을 때리는 바람에 쇳가루가 퍼져서 눈이 다칠 뻔 한 적도 있었다. 연마기에 살이 베인 것은 부지기수다. 얼마 전에는 당뇨로 순간 혈당이 떨어져 갈음질을 하다가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늘 성화다. 이제는 제발제발 쉬라고. 쉴 자격도 있고 먹고 살 만하다고... 아내보다 두 딸이 더 보챈다. 김영환은 대장간 품에서 잘 자라준 딸들이 너무 고맙다. 대장장이로 막 발을 들여놓았던 시절, 그는 밖에 나가지를 못했다. 얼굴이 쇳가루로 범벅이 되어 남 보기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들은 사춘기 시절에도 친구들과 함께 집에 놀러오면 대장간에 꼭 들러 "우리 아빠셔"라고 자랑스럽게 인사를 시켰다. 그게 그때도 지금도 너무 고맙다. 마음이 울컥할 때도 많았다. 어쩌면 김영환이 55년 동안 대장장이로 살아오게 만든 버팀목이었는지도 모른다.
  

좌전칼을 만드는 게 김영환에게는 일상이 됐다. ⓒ 민병래

 

투박해 보이는 생선용 막칼이지만 아직도 좌전칼을 찾는 이들이 많다. ⓒ 민병래

 
이제 남은 바람은 오직 하나, 이 '좌전칼', 이 대장간의 명맥을 누군가가 이어줬으면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쉽지 않다. 나서는 사람이 없다. 기술과 솜씨는 물론 작업장도 통째로 넘겨주고픈 마음이다. 성공할 때까지 도와주고픈 마음도 가득하다. 어쩌면 그는 이 바람 때문에 일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장간에서 망치질과 씨름하면 김영환의 하루는 훌쩍 간다. 좌항리 언덕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면 그는 수건으로 온몸에 달라붙은 쇳가루를 툴툴 털어낸다. 숯검뎅이 같은 얼굴을 훈장처럼 들고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가 집으로 향하면 온종일 거친 숨을 토해냈던 대장간의 화덕도 그제서야 허리띠를 풀러놓는다.

시나브로 좌전마을에 밤이 찾아와 어둠이 깊어지면, 내일을 기다리는 쇳덩이들은 서로 등을 기대며 잠을 청한다. 얼기설기 얹은 대장간 지붕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내려앉으면 땀과 망치질로 생명을 얻은 '좌전칼'이 반짝인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검기(劍氣)가 어느새 대장간에 가득찬다.
 
 
<못다 한 이야기>

* 김영환 선생의 이야기는 용인시민신문(대표:우상표) 2018.9.16.자 함승태 기자의 글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우상표 대표님이 취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 김영환 선생의 이야기는 용인시민신문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용인시민방송YSB 영상 보기 https://youtu.be/3igI4KJGKfo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김영환 선생은 2018년 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생활문화장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김영환의 B컷>
 

김영환의 B컷 그의 작업공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들이다. ⓒ 민병래

 
<김영환의 프로필>

1949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출생.
1965년 좌항초등학교 졸업
1965년 용인 가창리 낫공장 취업
1966년 이천 삼강공업사, 제천, 서울 용두동, 현저동, 가리봉동, 시흥 일대의 대장간 거침
1978년 용인시 원삼면 좌항리 좌전마을에 대장간을 만듬
2003년 '좌전칼' 상표등록
2018년 경기생활문화장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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