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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30 14:09 수정 2019.08.30 14:37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중앙정치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재일대한청년단 간부 81명을 만나기도 했다. ⓒ 대한뉴스

  

대한청년단은 현직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총재를 맡은, 사상 초유의 조직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민방위군의 모태가 된 조직이다.


최귀근(1916년생, 1948년 당시 32세)이 지리산으로 올라간 지 얼마 뒤였다. 대한청년단(총재 이승만) 단장 김영준이 단원들과 의용경찰들을 대동하고 최귀근의 형 최규용(1904년생) 집에 들이닥쳤다. 1948년 전남 구례군 광의문 온당리에서 생긴 일이었다. 

"빨갱이 새끼들 모두 나와!" 최규용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어리둥절해하며, "단장님. 무슨 일이요?"라고 물었다. "시끄러워. 빨갱이 새끼야. 모두 따라와." 그때 김영준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니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최규용 가족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고, 주춤주춤 김영준 일행을 따라갔다. 그들 무리는 옆집으로 갔다. 그곳은 최규용의 동생이자 지리산에 입산한 최귀근의 집이었다. 가장이 입산한 집은 썰렁했다. 그 집에서 최귀근의 처 김후남과 어린 딸 세 자매가 김영준 일행 꽁무니를 이었다. 김영준은 같은 마을에서 다섯 집을 더 돌아다니며 가장(家長)이 없는 식구들을 찬바람이 부는 마을 한가운데로 내몰았다.

"지금부터 광의국민학교로 이동할 텐데 느리게 걷거나 말을 하는 놈들은 죽을 줄 알아!"

최규용 등 온당리 주민 약 20명은 쥐 죽은 듯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얕게 내린 눈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만 났다. 국민학교에 도착하자 다른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국민학교 작은 건물에 면내 18개 마을에서 끌려온 주민 약 8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온당리 주민까지 합세하니 100명이나 되었다. 얼떨결에 끌려온 그들은 얇은 옷을 입고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네 빨갱이 가족들은 오늘부터 이곳에서 지낸다. 도망가거나 개별적 행동을 하다가는 바로 총살이다." 김영준의 엄포는 염라대왕의 그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마을 이장들은 구금된 이들의 집에서 솥이며 그릇, 이불, 옷가지 등을 가져왔다.

1948년 12월 한겨울 구례군 광의면의 우울한 풍경이었다.
 
벼룩과 빈대와의 싸움
 

광의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했던 최기호 ⓒ 박만순

 
아버지 최규용을 따라온 최기호(당시 12세)는 광의국민학교 수용 생활이 1년이나 될 줄은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동생 2명과 최기호까지 가족 6명이 고스란히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게 됐다.

한겨울에도 학교 건물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집에서 가져온 멍석을 깔고 앉았지만 냉기는 엉덩이를 뚫고 들어왔다. 이불을 깔고 겉옷까지 입고 누웠지만 "딱딱" 이빨 부딪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라곤 햇볕이 비추는 낮 시간에 조는 게 다였다. 벼룩과 빈대와의 싸움도 끝이 없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며 학교에 구금된 이들은 소위 입산자(入山者)의 가족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수 14연대의 봉기는 진압군의 토벌작전으로 일주일여 만에 잦아들었다.

이후 14연대 봉기군과 이에 협력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한 봉기군과 접촉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가족들을 아무런 근거나 명분 없이 격리·감금한 것이다. 그러한 결정도 군인과 경찰이 아닌 대한청년단 광의면 단장 김영준 개인이 임의로 내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에는 장기간 숙식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수용자들의 몫이었다. 수용소에 구금된 이들은 친인척들이 갖다준 쌀로 가족별로 밥을 해먹어야 했다. 하루 세 끼는 사치고, 한 끼나 겨우 해결할 정도였다.

1년 6개월간의 수용생활

그나마 훤한 낮은 견딜 만했다. 밤이 되면 공포가 엄습했다. 김영준의 지시로 죽창을 든 의용경찰들은 몇 사람씩 불러냈다. 호출당한 이들은 성인 남성들이었다. 끌려간 사람 중에서 다시 돌아온 이는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사를 궁금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최규용이 나와" 하는 소리와 함께 출입구 문이 열렸다. 주춤주춤 일어선 최규용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최규용은 부들부들 떠는 아내 양태순의 손을 한 번 꼭 쥐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들 최기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최기호 옆에 있던 사촌누나 최복남(당시 14세)은 끝내 큰아버지의 눈물을 목격했다. 그렇게 끌려간 최기호의 아버지 최규용도 돌아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끌려간 사람은 끌려간 것이고 산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친인척들이 가져다 주던 쌀과 장작은 시간이 갈수록 뜸해졌다. 봄이 오고 여름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봄이 되자 사람들 머릿속은 온통 농사 걱정뿐이었다. 그리고 곧 배고픔도 따라왔다.

그렇게 광의국민학교에서 1년을 보내고도 입산자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에는 생활 공간을 옮겨야 했다. 국민학교에서 300m가량 떨어진 선태섭 집터였다. 양조장을 하던 집은 군경에 의해 부수어졌고 거기에는 대형 천막이 들어섰다. 그들은 다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제강점기 금란회원들의 단체사진: 뒷줄 왼쪽 세번째가 선태섭(출처: 선태섭, <분단에 부딪쳐 쓰러진 민족주의자>, 선인)

선태섭(1906~1975)은 구례군 마산면 마산리 출신으로 구례와 전남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구례지국장을 역임하고, 청년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수행했다. 해방 후에는 구례와 광주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 조선공산당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서울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1946년 월북했고, 그의 처는 광의면 소재지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다(최정기, <분단에 부딪쳐 쓰러진 민족주의자>, 선인, 2013).

선태섭 집터에 세워진 대형천막에서의 수용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됐다. 총 1년 6개월간 100여 명의 광의면 주민이 집에 가지 못하고 감금 생활을 한 것이다. 이런 불법감금행위를 한 김영준은 어떤 인물일까?
 
최귀근이 지리산을 다시 올라간 이유

김영준은 일제강점기에 경찰을 지내며 소위 '문둥이 순사'로 이름을 날렸다. 해방 후에는 대한청년단 광의면 단장을 하며 좌익 탄압에 앞장 섰다. 광의면 대한청년단은 면소재지에 사무실이 두었다. 당시 청년단 위세에 마을 이장들이 쌀, 된장, 고추장, 배추, 무 등을 그냥 갖다 주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발발 후 대한청년단은 입산자 가족들을 광의국민학교와 선태섭 집터에 불법 구금했다.

그렇다면 최규용 가족은 왜 광의국민학교에 구금됐을까? 앞서 거론했듯이 최규용의 동생 최귀근이 지리산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최귀근은 학교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혀 마을에서 똑똑한 이였다. 해방 직후 광의면 온당리 청년들은 엉덩이가 들썩였다. 밤마다 마을 사랑방에서는 공북마을 이상암을 비롯한 외지의 지식인들이 와서 '토지 개혁'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소작인이거나 머슴인 마을에서 토지 개혁은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온당리뿐만 아니라 구례·전남을 포함 전국에서 토지 개혁은 시대의 화두였다. 자연스레 청년들은 좌익에 경도됐고 최귀근도 마찬가지였다. 최귀근은 시점이 불분명하긴 하나 여순사건 이전에 지리산에 입산해 야산대(野山隊) 활동을 했다. 하지만 여순사건이 터지고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자 최귀근은 하산해 자수를 택했다. 그런데 토벌군은 최귀근을 자유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토벌군은 최귀근에게 "네가 전향한 것을 증명해 보이려면, 지리산으로 다시 올라가 동료들을 데리고 와"라고 회유했다. 이에 최귀근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동료들을 데리고 하산하는 대신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최귀근의 아내와 자식들, 그의 노모와 형, 조카들은 광의국민학교에 불법구금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구례군 광의면에서 있었던 민간에 의한 수용소는 여순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과 관련해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해방 전후 임시 수용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 4.3 때 제주 주정공장은 한라산에서 체포되거나 자수한 이들의 임시수용소로 쓰였다. 하지만 이곳은 단기간 수용시설이었다. 또 거제도포로수용소나 광주포로수용소는 군에 의한 정식 포로수용소였기 때문에 광의면의 사례와는 다르다. 

당시 구례군 광의면 광의국민학교 등의 수용시설은 대한청년단이라는 민간 단체에 의해 운영됐으며 1년 6개월이라는 장기간 유지됐으며 시설에 수용된 사람 중 일부가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거나 살해된 점을 봤을 때 당시 군경의 암묵적인 묵인과 비호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온 편지
 

2차 수용생활을 했던 선태섭 집터 ⓒ 박만순

1년 6개월의 구금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온 최규용 아내 양태순은 망연자실했다. 집은 불타 버렸고, 논 여덟 마지기도 온데간데 없었다. 설상가상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대전형무소 소인이 찍혀 있었다. 양태순은 사위의 도움을 받아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언제 나오세요?" "나가 죄가 없승께, 1~2년이면 나갈 거여.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머님 잘 모시고 있으시오."

하지만 최규용은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들은 대전 산내에게 집단 처형당했다.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최규용도 마찬가지였다. 광의면 온당리의 최창수와 최○호 역시 산내에서 학살 당했다. 훗날 산에서 내려온 최귀근이 형 최규용의 시신을 수습하러 대전에 갔지만 시신은 수습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증언: 최복남, 84세, 전남 구례군 산동면 대평리). 

이후 북한군이 구례땅에 진주하자 지리산에 들어갔던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소위 인공 시대(인민공화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규용의 동생 최귀근은 광의면 인민위원장을 했고, 같은 최씨 집안 최정호는 분주소장(지금의 파출소장)을 맡았다. 하지만 인공 시대는 짧았다. 북한군의 퇴각과 함께 최귀근과 최정호는 다시 지리산에 들어갔다. 

세 번째 지리산 입산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도피가 장기화되자 최귀근은 자수를 택했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진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최귀근은 10년형으로 감형됐고 만기 석방 후 고향에서 생활했다. 

분주소장이었던 최정호는 한때의 동지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빨치산 동료였던 구○○은 변절 후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최정호는 '보아라' 부대원이었던 구례군 산동면 출신의 구○○에게 발각돼 지리산에서 학살되었다(증언: 최낙환, 79세, 서울특별시 강북구).

'광의면의 모스크바'로 불린 온당리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59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대부분 여순사건 관련자였다. 
 
짚신 신고 보초 서
 
광의국민학교와 선태섭 집터에서 1년 6개월을 강제 구금당한 최기호(82세,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는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13살이던 최기호는 빨치산 공격에 대비해 보초를 서야 했다. 

마을 공회당은 청·장년뿐만 아니라 소년까지 동원해 7개 보초막에서 2인 1조로 보초를 섰다. 하룻밤에 3교대를 해야 했기에, 하루에 42명이 동원됐다. 최기호는 13살 어린 나이에 짚신을 신고 보초를 섰다. 삼촌(최귀근) 같은 빨갱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이념과 전쟁이 한 가족과 마을을 좌우로 갈라놓았고, 생(生)과 사(死)의 길로 내몰았다. 삼촌을 잡기 위해 보초를 서야 했던 최기호의 어린 마음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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