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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06 15:06 수정 2019.09.06 15:06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여순항쟁 당시 국군이 투입된 가운데 불타고 있는 여수시내 모습을 찍은 사진. 당시 여수시내의 1/3이 불탔다. ⓒ 심명남

 
"오늘부터 채금동(1925년생)씨가 상사면 인민위원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948년 10월. "와"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졌다. 전남 순천 상사면 면사무소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선 채금동을 쳐다봤다. 채씨는 "제가 부족한 게 많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머리를 꾸벅였다. 앞선 박수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가 마당에 가득 찼다.

채금동의 어머니 박명순은 한 세상 살면서 오늘 같이 기쁜 날이 없었다. 당신 아들이 '면장'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구야. 하느님 만세다. 우리 아들 만세여"하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박명순은 너무 신이 나 집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마을 골목길을 다니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입에서는 "만세" 소리가 나오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질 줄 몰랐다. 박명순의 신명나는 춤에 마을 사람들은 덕담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명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날의 면장 당선이 집안의 큰 화(禍)의 불씨가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기징역에 처한다" 줄줄이 곡소리

두 달 후인 194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의 선고공판 있던 날은 무척 추웠다. 여순사건 관련자 선고공판이 있었기에 법정 안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전원 기립." 소리와 동시에 재판장과 판사들이 줄줄이 입장했다.

"착석." 피고들의 신원 확인절차가 뒤를 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객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판사 목소리가 워낙 작기도 했지만, 법정에 흐르는 긴장 어린 공기를 깨뜨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방청객들이 기다리던 순서가 왔다. 재판장의 선고였다. "피고 채금동을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여순반란사건에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기에 무기징역에 처한다." 방청석에서 터진 "아이고" 하는 곡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정숙, 정숙"하며 판사가 불호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어진 다른 피고들의 선고도 대부분 채금동과 같은 '무기징역'이었다. 실제 사건에 어느 정도 연루됐는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수십 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진 마당이었다.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감옥 속에 가두어 놓는다는 것인데, 판사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1948년 12월 13일 빛고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8년 제주도. 제주도민들의 열기는 용암보다 뜨거웠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와 '친일파-미군정 반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제주도민들의 저항은 '대한민국 건국'을 앞둔 이승만 세력에게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제주도 경찰과 군인만으로는 제주도 진압이 불가능했다. 이승만 정권에게 제주도를 진압하는 것은 최대 숙제가 됐다. 이런 연유로 전라남도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에 특명이 내려졌다.

"제주도로 출동해 반란을 진압하라!"

이제 14연대 군인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잘못됐더라도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잘못된 명령은 거부해야 하는가를 말이다. 국가를 따르면 동족 수만 명을 학살해야 한다. 

14연대는 후자를 선택했다. 국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선택했다.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봉기는 순천과 구례,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번져나갔다.(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흐름)

이승만 정권에게 14연대의 저항은 '반란'이었다. 14연대 군인들은 역도(逆徒)였고, 군인에 호응한 세력 역시 '빨갱이'였다. 때문에 여순사건 당시 군경의 토벌작전은 이성과 합리라는 고상한 단어가 존재할 수 없었다. 군인들에게 밥을 해주거나 옷을 준 이들은 여지없이 반란군을 편든 빨갱이가 됐다. 토벌대가 무서워 살기 위해 지리산에 입산한 이들도 빨갱이였다. 여순사건 초기에 붙잡힌 사람들은 즉결처형되기 일쑤였다.

그나마 재판에 넘겨진 이들도 10년, 20년 징역형이 숱했고, 채금동 같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채금동은 정말 인민위원장이었을까?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희생자 모습 .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 기타 일부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복구했다. 인민위원회는 식량을 분배하고, 우익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했다. 여수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최소한의 절차를 통해 인민재판을 했기에 우익학살이 비교적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순천에서는 그 피해가 무척이나 컸다.

때문에 진압군은 여수와 순천을 완전히 점령한 1948년 10월 27일부터 '빨갱이 사냥'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상사면 인민위원장을 했던 채금동 예외가 아니었다.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실제 채금동이 인민위원장 직을 수행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의 아들 채성묵(75세,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은 "아버지는 면장에 취임도 못해 보고 일주일 만에 경찰에 잡혀 갔어요"라고 증언했다. 채성묵과 그의 할머니 박명순이 말하는 '면장'은 인민위원장과 같은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초대 면장 선거가 이루어진 것은 1952년 제1회 지방선거 때였다. 때문에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면장이라고 하면 '인민위원장'이다. 그렇다면 채금동은 정말 상사면 인민위원장에 선출됐을까? 역사학자 주철회에 따르면, 당시 상사면 인민위원장은 '박대규'였다. 

채금동이 인민위원장을 맡았는지는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설령 그 직을 맡았다 하더라도 그가 범법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없다. 그런데 '내란'죄로 '무기징역' 형을 받은 것이다.

채금동이 순천경찰서에 연행된 직후 그의 아버지 채윤명(1869년생)은 부인와 함께 면회를 갔다. 하지만 아들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뒤늦게 광주로 찾아갔지만 이미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후였다.

박명순이 손자 채성묵을 데리고 순천에서 대전까지 면회를 갔을 때, 아들 금동의 얼굴은 초췌했다. 박명순은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을 억눌렀고 채금동은 아들 성묵을 보고는 통곡했다. "어무이, 뭐할라꼬 아를 이 먼데까지 데리고 왔소."

박명순과 손자 채성묵이 채금동을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무기징역' 형이라는 어마어마한 죄에도 '살다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한국전쟁으로 물거품이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채금동은 대전형무소 수인들과 함께 산내 골령골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했다. 
 
새 아버지 집에서 머슴처럼 살았소
 

증언자 채성묵 ⓒ 박만순

 
올 여름 순천에서 만난 채성묵은 6.25를 겪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한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울음 반 한스러움 반'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학살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개가(改嫁)했다. 해방둥이(1945년생) 채성묵이 집 나이로 6세 때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죽은 후 살림은 성묵의 배다른 형이 도맡았다. 그러다 보니 채성묵에게 돌아올 재산이 한 푼도 없었다. 할머니 박명순도 할아버지가 죽은 후 5년 뒤에 세상을 등졌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채씨는 머슴살이를 했다. 견디다 못해 서울 행을 결심했지만 차비가 없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재가한 어머니 집에 가 손을 벌렸다. 하지만 "같이 살자"는 어머니 설득에 눌러앉았다.

재가한 어머니 집에서 성묵은 집안 머슴이나 다름없었다. 농사짓고, 풀 베다주고, 거름 만드는 일을 했다. 배다른 동생들의 맏형 역할도 했다. 동생들이 중학교·고등학교에 낙방하면 돈을 들고 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의붓아버지는 자나 깨나 노름이었다. 결국 새아버지의 노름빚을 갚아주고 집을 나왔다.

평생을 생선장수로... 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다
 

채금동의 무기징역 형이 기록된 판결기록 ⓒ 박만순

 
채성묵은 새아버지 집에서 13년을 살았다. 그가 결혼하면서 분가할 때 어머니와 새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은 쌀 2말이 전부였다. 국가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채성묵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생선도매상을 했다. 거래처는 군산, 인천, 여수였다. 채씨는 평생 장사하면서 누구를 속인 적도 없고, 빚을 갚지 않은 적도 없다. 말 그대로 '정직'한 삶이었다. 장사를 해서 4남매를 결혼시키고, 현재는 '벌교형제회', '라이온스클럽'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7년 전인 2002년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올해 7월 15일 국가기록원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다. '내란죄'로 '무기징역' 형을 받았다는 기록이었다.

채금동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당시 "시국이 안 좋으니 며칠 피해 있자"고 권유한 집안 조카에게 그는 "내가 뭔 죄가 있간데 도망가야?"하면서 집에 머물렀다. 결국 채금동의 정직한 선택은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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