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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27 16:17 수정 2019.09.27 16:17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여순사건 당시 학살 모습을 찍은 사진. ⓒ 오문수

 
일제강점기에 '지까다비'라 불린 운동화를 신은 김형용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읍내를 걸었다. 하루 종일 읍내 뒷산을 오르락내리락 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등산이라면 운동도 되고, 땀을 흠뻑 흘려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몰래 나무를 베는 이들을 감시하는 일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산감(山監)'이다. 

석탄과 석유가 난방연료로 실용화되기 전까지, 서민들은 마을 주변의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했다. 그래야 한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산은 국유림이거나 사유림이었다. 그렇기에 주인이 없는 산은 없었다.

땅 임자가 아닌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커다란 나무를 자르는 것만이 아니라 잔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낙엽을 줍는 행위도 안 된다. 이런 불법 행위를 감시하는 사람이 바로 산감이다. 생존을 위해 산에서 땔감을 구하려는 청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 어린이까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당시 경찰이 호랑이만큼 무서웠다면, 산감은 경찰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김형용(1922년생)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학업을 하고, 여순사건 당시에는 광양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구체적 업무는 산감이었다. 찬바람이 심하게 불던 1949년 11월 그는 삭신이 노곤할 정도로 산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운동화 신었다고 '봉기군 협조자'

김형용은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아 다른 생각 없이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서봣." 뒤를 돌아보니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김형용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김형용의 아래 위를 쳐다보더니 그의 신발에 주목했다. 산을 타느라 운동화에 흙이 묻은 것이 문제였다. "잠깐 경찰서로 갑시다." "무슨 일이오? 나는 공무원이에요. 산감이란 말이요." "시끄러워, 자식아!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이어서 군인이 들고 있던 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그렇게 김형용이 흙이 묻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남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때가 1949년 11월 말이었다. 당시는 여순사건 초기로 진압군이 '봉기군 협조자'를 검거하던 때였다. 그렇게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고 나니 상황이 기가 막혔다. 김형용뿐만 아니라 소위 '반란군 협조자'로 의심돼 잡혀 온 이들 대부분이 억울한 사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어떻게 하다가 끌려 왔는가?" 나이가 지긋한 이가 젊은 청년에게 물었다. "형님이 군에서 휴가 나왔다가 속옷을 벗어 놓고 갔는데, 그 옷을 입었다가 그랬어요." "쯧쯧." '군용 속옷을 입고 있으면 붙잡혀 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쩐 일로 잡혀 왔대요?" 다른 청년이 나이 지긋한 이에게 물었다. "휴우." 한숨부터 쉰 그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듯이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 글씨 반란군이 물러간 후 군경이 왔다는 야그를 듣고 외출했다가 이 모양이 됐지."

"그게 어째서유?" "아, 경찰놈덜이 내가 고무신을 신었다고 붙잡아온 것이 아니겄어?" 흰 고무신은 당시 여수에서 지방좌익 세력에게 처형 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여순반란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는 사람들에게 흰 고무신을 배급했다. 때문에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인민위원회, 즉 빨갱이에 협조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실제 진압군은 흰 고무신을 신었다며 사람을 잡아갔다. 당시 절대 다수 서민들이 고무신을 신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선인).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기관총을 든 가운데, 운동장에 모여있는 여수시민의 모습을 찍은 사진. ⓒ 심명남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반란군 협조자라며 구금된 이들의 대다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혐의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들도 잡혀 갔다. 정식 공무원인 김형용조차도 신분 확인도 거치지 않고 잡아들일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될 것이다. 여순사건 때는 공무원조차도 힘없는 존재가 됐다. 

또 군경은 여순봉기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투서도 받았다. 이 때문에 개인 감정에 따른 허위 투서가 난무하기도 했다. 

김형용 역시 흙 묻은 운동화뿐만 아니라 투서에 의한 연행 혐의도 짙다. 김형용 아들 김홍기(72세,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는 "큰 아버지 집이 부자라서 돈을 뜯으려고 아버지를 연행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어요"라고 증언한다.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때로부터 50여년이 흐른 1994년. 김홍기가 '따르릉'하는 소리에 전화를 받으니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이순자라는 여성분이 "당신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했다. 김홍기는 너무나 흥분됐다. 이순자 할머니의 말이 이랬다.

"내가 남편 면회 차 대전형무소에 갔는데 거기서 김형용의 모친(김홍기의 친할머니)을 만났다. 당신 아버지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게 맞다. 그리고 다른 수감자들처럼 전쟁 발발 이후에 산내에서 학살됐다." 

이 할머니는 대전형무소에 면회를 다니면서 김홍기의 친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거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는데 그 이야기를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거의 50년 만에 그 손자를 수소문해 연락을 해온 것이다.  

김홍기는 전화를 받았던 1994년 당시까지도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긴 했지만 학살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엔가 살아 있겠거니 여긴 것이다. 

그래서 1983년엔 '이산가족 찾기'도 신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던 차에 이순자 할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몰랐다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가슴 후련했지만, 대전형무소에 있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가슴을 애끓게 했다.

평생 '행상'을 했던 어머니
 

증언자 김홍기 ⓒ 박만순


집안 가장의 부재는 한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김형용의 아내는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유기그릇, 양은그릇, 양말 등을 머리에 이고 광양과 인근지역을 다니며 행상을 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그의 행상은 가정생계의 주요 수단이었다. 그나마 큰 집에서 논 네 마지기를 줘 가족들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아들 김홍기는 악착같이 공부해 농협에 취직했다. 2003년도에 32년간 근무한 농협을 정년퇴직했다.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진실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성과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아버지에 대한 억울한 누명을 벗길 수 있었다. 김형용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로 진실 규명됐으며 유족들은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김형용의 연행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슴 한켠에 분노가 쌓여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운동화 신었다고 사람을 잡아가 학살하다니요" "그때 큰아버지가 돈을 썼으면 아버지가 살아 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진압군이 봉기군 협조세력을 색출한 기준은 한 편의 '코미디'다. 하지만 보통 코미디가 사람을 웃기게 하고 삶의 활력소를 주는 것이라면, 여순사건 당시의 코미디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잣대였다. 코미디 같은 김형용의 연행과 죽음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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