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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18 08:46 수정 2019.10.18 08:46
"하숙 칩니다. 하숙 쳐요!"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유인수는 목청껏 외쳤다. 여수시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업무를 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숙 영업을 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신사는 유인수의 영업대상이 아니었다. 허름한 복장이거나 영업직원 같은 이들에게만 호객행위를 했다.

"일주일에 얼마요?" "예 손님, 이 주변에서 가장 싸게 드립니다. 믿고 가시죠." 박시현(가명)은 유인수를 따라 역에서 500미터가량 떨어진 주택가로 간다. 박시현 역시 일주일간 이곳에서 막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투숙할 경비가 따로 책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최대한 저렴한 방을 계약한다. 여인숙이나 그럴듯한 민박집은 애초에 염두에도 없었다.

"엄마 손님 모시고 왔어요." "잉 수고했다. 손님 이짝으로 오시요." 박시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말 그대로 '쪽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방이 아니었다. 천장에 붙박혀 있는 형광등은 옆방과 공동으로 쓰는 형광등이었다. 방 한가운데 칸막이를 설치해 한쪽은 주인이 쓰고, 다른 쪽은 손님이 쓰는 구조였다. "야들아, 손님 들어왔승께 조용히 하그라." 박시현 역시 많이 경험한 일이기에 놀랍지도 않다. 다만 항상 겪어도 항상 불편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인수는 새벽같이 일어나 하드(아이스크림)통을 메고 집을 나선다. 자기 몸의 1/3 정도 되는 크기의 통을 메고 도매점으로 간다. "잉, 인수 왔냐." 아이스크림가게 사장은 인수를 비롯한 20여 명의 소년들에게 하드를 배분해준다. "더운디 고생들 하그라." 하드를 받아든 소년들은 각자의 구역으로 뛰어간다. "하드 있어요." "목구멍이 씨언하게 얼어붙을 하드 사세요." 이렇게 종일 하드 통을 메고 뛰어다녀봐야 소년들이 손에 쥘 수 있는 건 보리쌀 한 됫박 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래도 모두들 열심이었다.
 
산비탈과 조각하늘만 보이던 마을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출처 : ,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 진실화해위원회

 
'탕' 소리를 신호로 흩어진 군인들은 청·장년들을 마을 한 가운데로 소집했다. 모인 이들을 대상으로 이장이 손가락질을 한 결과 유귀동(1922년생)을 포함해 몇 명의 청년들이 한쪽 귀퉁이에 섰다. "폭도 새끼들 전부 끌고 가!" 인솔 군인은 간단한 명령만 남긴 채 몸을 뒤로 했다.

끌려가는 이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남은 가족들도 군인들에게 사정을 하거나 매달리지 못했다. 진압군에게 항의하거나 사정하는 이들은 똑같이 폭도 취급을 받았고, 군인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버리는 일도 일쑤였다.

유귀동 역시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 없었다. 다만 봉기군이 마을에 와서 강요해 심부름을 한 죄밖에 없었다. 사실 유귀동이 사는 마을은 조각하늘과 산비탈밖에 보이지 않는 궁촌이었다. 논은 거의 없었고, 주민들 모두가 바다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남 여천군 화양면 이목리 서이동에 살던 유귀동은 그렇게 1948년 11월 군인에 의해 끌려간 후 다시는 고향 하늘을 보지 못했다. 그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산내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가족은 마을에서 쫓겨나 

스물여섯에 혼자가 된 조막진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살 길이 막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빨갱이 가족'이라고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본의 아니게 여수시내로 나온 그녀는 살기 위해서 닥치는대로 일했다. 하지만 그녀 가족이 할 수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반거지 생활이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역전에서 석탄을 얻어다 팔고,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미 원조물자를 주워다 먹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들었다. 결국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유일한 생계방안이었다. 유귀동의 아내 조막진은 하숙방을 치고, 장남 유타관(1943년생)은 시내 중국요릿집에 가서 일하고, 차남 유인수(1946년생)는 하드 통을 메고 길거리를 달렸다. 물론 조막진이 하던 하숙집은 무허가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인수 삼형제의 '가방끈'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삼형제 모두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유인수는 그나마 졸업장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월사금(수업료)을 납부하지 못해, 툭하면 담임선생에게 끌려가 혼쭐이 났다. 그는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 창피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유인수는 1980년 8월 ○○일까지 전남 여수 ○○○○부대로 입소하기 바람."

유인수는 통지문을 받아 본 순간 기절초풍했다. 소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양복점을 하고 있었는데, "인수 자네는 양복점을 하니라 바쁭께 낭중에 한가할 때 훈련 받으소"라는 예비군 중대장 말에 예비군 훈련 소집에 한 번 빠졌을 뿐이다.

유인수는 동사무소로 달려갔다. 중대장에게 하소연하니, 중대장은 "글씨 그게 나는 분명 그렇게 처리했는데, 동사무소에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신고했는갑다"라며 얼버무렸다.

유인수는 양복점 문을 닫고 정해진 날에 여수에 위치한 군부대에 입소했다. "깡패새끼들, 줄 똑바로 못 서"라며 군인들은 진압봉을 휘둘렀다. "와 그러십니까? 말로 하쇼"라고 대꾸하는 이에게 군인은 군홧발을 내질렀다. 여러 명의 군인들이 대꾸한 이에게 몰려들어 몽둥이찜질을 했다. 진압봉, 주먹, 군홧발, 곡괭이 자루 등으로 몇 시간동안 몰매를 가했다. 기절해도 소용 없었다. 기절하면 찬 물을 쏟아 붓고, 깨어나면 다시 때리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 상황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다.

예비군 한번 빠졌다는 죄로 생지옥 경험

그날부터 시작된 2주간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 유격체조, 봉체조, 구보, 기초 장애물, 포복, 공수접지훈련이 연일 이어졌다. 특수부대에서나 받는 훈련을 일반 시민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저녁시간이라고 자유시간이 주어지진 않았다. 정신교육이라고 하면서 '반성문'을 강요했다. 그나마 편한 정신교육시간은 많지 않았다. 2주간의 교육기간 중 12시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육체훈련이었다. 말이 육체훈련이지 군대식 훈련에 구타가 전부였다.

그러면 유인수가 1980년 8월에 여수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2주 동안 받은 삼청교육은 무엇인가? 소위 '한국판 수용소군도'라 불린 삼청교육대는 불법의 대명사였다. 전두환은 1980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불법적으로 탈취한 후,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전두환은 그렇게 함으로써 군사정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양심적 정권이라는 가면을 쓰려했다.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6만755명의 시민들이 끌려간 이 사건에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되었다. 검거된 이들은 A, B, C, D 등급으로 나뉘었다. A등급은 전방부대에 입소해 4주간의 교육을 받았고, B, C 등급은 지역 군부대에서 2주간의 교육을 받았고, D 등급은 훈방되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8개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상', 2007)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불량배와 비위공직자를 검거해 삼청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물론 그런 이들 중의 일부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지역할당에 의해,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생지옥을 경험했다. 어찌 보면 한국전쟁 직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과 유사하다.

유인수 역시 예비군교육에 한 번 빠졌다는 죄(?)로 삼청교육대라는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몸 추스릴 새도 없이  
 

양복점에서유일라사에서 딸과 함께 ⓒ 박만순

 
2주 만에 풀려 난 유인수는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양복점 문을 열었다. '유일라사'가 어떤 가게인가. 그가 양복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광사양복점'에 취업한 것이 17세 때였다. 한겨울에도 새벽 6시에 출근해, 숯불을 피우고, 작업준비를 했다.

시다부터 시작해 그가 직접 바느질로 바지를 만드는 데까지 3년이 걸렸다. 시다생활 3년 동안 그는 툭하면 선배 노동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기술을 배워 언젠가는 독립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차린 '유일라사'를 문 연 지 1년 만에 닫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2주간 문을 닫았던 일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수군거림이 치명타였다. '저 놈아 알고 보니 불량배 였드라'라는 소문은 일파만파 번졌다.

가게를 정리하니 빚이 천만 원이나 되었다. 그 빚을 갚는 데 10년이 걸렸다. 빚 덩어리를 진 그는 여천공단 노가다 판에 뛰어들었다. 6년 전인 2013년까지 '아시바 기술자(비계공)'로 일했다.

유인수(74·전남 여수시 여서동)는 살아오면서 청소년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애비 없는 새X" "저놈의 XX자식" 하는 소리가 견딜 수 없었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아버지가 학살되지 않았다면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그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것이 여순사건과 무관한 걸까.
 

유인수증언자 유인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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