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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25 08:49 수정 2019.10.25 08:49
"여가 김태수씨 댁인가라우?"
"누구신디라우."
"아, 여 집 찾니라 엄청 고생했어요."


정순례는 자기네 집을 찾아 왔다는 여성을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하며 마루에 앉을 것을 권했다. "지저분하지만 편히 앉으쇼." 이 집을 찾아온 여성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속이 타는 것은 주인인 정순례였다. "근디, 우짠 일로 찾아오셨다요?" 재차 다그치자 여성이 입을 열었다. "잉, 여그 서방님이 지난 번 난리 때 돌아가셨담서요?" "예?"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경찰에서 보냈나? 아니 죽은 남편 뭘 알아보려고, 경찰이 이런 사람을 보냈겠어' 등등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상대방은 느긋했다. 정순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있었다.

수상한 여성의 정체

역시 답답한 건 집 주인이었다. "우리 집 남편이 6.25 때 죽은 걸 우찌 알았당가요?" "....." "답답항께, 그라지말고 속씨언하게 얘기 좀 해보쇼." 그제서야 여성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그 서방님이 대전형무소 있다가 죽었담서요. 그니까 그때가 경인(庚寅)년 5월 18일이었지라." 그 여성이 말하는 때는 양력으로 치면 1950년 7월 3일이다. 정순례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지난 번 사람은 5월 14일(양력으로 6월 29일)이라 혔는디." "어허. 내 말 못 믿으라우?"라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주인은 고분고분해지고, 거꾸로 손님은 목청을 높이며 말이 많아졌다. "여집 남편이 (여순)반란사건으로 대전형무소 있다가 객사(客死)를 했는디, 제사 날짜를 잘못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왔는디, 영 접대가 션찮은디라." "아이고 몰라뵀구만요. 대접할 게 없는디 어째야쓰까?"라며 부엌에서 찬 물을 가져왔다. "이거라도 씨언하게 드시고 말 좀 해보쇼."
 
냉수를 마신 여성은 별 신통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날이 5월 18일이고, 그렇기에 제사를 음력 5월 17일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는 망자(亡者)가 산 날에 맞춰 지내기 때문이다. 정순례는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주인은 여성 옆에 있는 보따리를 쳐다보았다. "이 보따리는 뭐라요?" 그때서야 그 여성이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참빗, 동동구루무(화장품), 거울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방물장수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공동우물에서 아낙네들하고 얘기 나누는 중에 6.25 때 김태수가 죽은 사연을 이야기 들었다. 방물장수 여인은 꾀를 써 김태수가 죽은 날짜를 거짓말로 꾸며댔다. 실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술수였다.

그 사실도 모르고 정순례는 방물장수를 점쟁이라고 믿었다. 그 해부터 남편의 제사를 음력 5월 17일로 지냈다. 몇 년 후 비슷한 사건을 또 겪은 정순례는 그때도 또 속아 남편 제삿날을 바꿨다. 그런 식으로 김태수의 제삿날은 총 세 번이 바뀌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마음이 약해진 아내의 심성을 이용한 행상들의 얄팍한 상술이었다.

극심한 좌우갈등
 

지난 6월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위령제를 마친 뒤 대전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들이 표지석 제막식을 갖고 꽃은 심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여순사건 발발 며칠 후 전남 순천군 상사면 오곡리 청년들이 면소재지가 있는 흘산리 성○○ 면장 집으로 몰려갔다. "성○○, 이 자식 빨리 나와!" 미처 도피하지 못한 성○○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방안에서 나왔다. 한 청년이 "이놈의 반동새끼 죽어봐라"하며 성○○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결국 주검이 된 상사면 면장 성○○을 뒤로하고 오곡리 청년들은 마을로 돌아갔다.

오곡리 좌익 청년들이 우익세가 강한 면소재지로 가서 테러를 감행한 이유는 뭘까? 평소에 오곡리와 흘산리 간에 좌·우 갈등이 격심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이 사건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전해들은 김종구(78세.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는 오곡리 청년들이 상사면 면장을 해꼬지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주철희는 "여순사건 당시 상사면장은 성○○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상사면 면장 테러사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상사면 내 좌·우 갈등이 극심했다는 걸 보여준다. 

순천이 진압된 후 오곡리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오곡리 주민들 전체가 마을 한가운데에 집결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원들이 주민들을 에워쌌다. 경찰지휘자는 주민들을 가족 단위로 심문했다. "네 남편 어디 갔어?" "...." 간부의 턱짓에 경찰과 우익단체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성과 그녀의 가족들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갓난아이들은 앙앙 울어댔다.

이번에는 김태수 가족 차례였다. 가장(家長) 김태수는 도피한 상태였다.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에 마을 청·장년들은 유·무죄를 막론하고 모두 도피했다. 경찰지휘자의 신문에 김태수 아내 정순례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어디로 피신해 있는 줄 몰랐다. 정순례가 말이 없자, 이번에도 그녀에게 몽둥이찜질이 가해졌다.

진압군의 '빨갱이 색출작전'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며칠간 지속되자 주민들의 시달림은 극에 달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김태수(당시 31세)는 경찰들 앞으로 자진해서 나아갔다. 가족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나가 뭔 죄가 있다고 도망다닌다요?" 죄가 없어 당당했던 그는 경찰들 눈에 띄자마자 밧줄에 묶여 트럭에 태워졌다. 오곡리에서는 김태수만 연행된 것이 아니었다.

박생규(당시 28세)와 오지평(당시 25세)이 끌려갔다. 김태수와 이들은 1948년 12월 13일 광주지방검찰청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여 후에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후퇴하던 대한민국 군·경이 자행한 집단 학살이었다. 

아버지 없는 삶
  

김종구증언자 김종구 ⓒ 박만순

  
아버지가 학살 당한 후 김태수 아들 김종구의 청소년 시절은 늘 우울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오이 밭을 지나가는데, "니놈들 꼼짝 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서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오이 밭주인이 다짜고짜 호통을 치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무조건 줄행랑을 쳤다. 김종구는 뜀박질을 남들보다 잘해 제일 먼저 내달렸다. 하지만 오이 밭주인의 걸음을 아이들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잡혀 혼쭐이 났다. 그런데 이 사건이 김종구에게는 평생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붙잡힌 아이들 중 김종구만 밭주인에게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상사초등학교 다닐 때 당한 일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선생 중에는 고모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툭하면 김종구를 때렸다. '사람 만들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사랑의 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뺨은 물론이고 온몸을 매로 사정없이 맞았다. 발로 지근지근 밟히기도 했다. 김종구는 할머니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학교에 가지 않았다.
 
김종구는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상경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사회활동이라고는 하지만 노점상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리어커 끌고 다니며 소금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소금 사세요" 신촌로터리, 망원동, 성산동 일대를 다니며 장사했다. 초겨울에는 배추, 무등 김장거리를 팔고, 봄에는 고추장, 된장 등을 팔러 다녔다. 장사 구역은 서울에 국한되지 않았다. 부천 소사와 부평으로도 다녔다. 김종구 부부는 종일 노점상에 매달렸다. 그러니 집안일과 아이 키우기는 어머니 정순례 몫이었다.

경기도 구리에서 소곱창 장사할 때는 돈벌이가 좋았다. 15년 동안 장사하며 아이들을 모두 키웠다. 이후에는 다시 노점상으로 복귀했다. 팔십을 앞둔 그는 현재도 뻥튀기 장사를 한다. 물론 요즘은 매일 하지는 않고 주말에만 트럭을 몰고 다니며 뻥튀기 장사를 한다. 하루 벌이가 2~5만 원이니 품값도 되지 않지만, '놀면 뭐하나'라는 생각에 장사 길에 나선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해 진실규명 확인 결정을 받았다. 그런데 배상소송 과정에서 서류가 누락되어 배상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진실규명 되었지만, 배상은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진심으로 고대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시절'에 대한 보상에 대해 국가가 답해야 하지 않을까.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진실화해위원회의 김태수 결정문 ⓒ 박만순

덧붙이는 글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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