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06 09:23최종 업데이트 20.04.2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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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이자 가산탕진형 와인애호가 임승수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며 습득한 와인 즐기는 노하우를 창고대방출하겠습니다.[기자말]
정확히 2015년 9월 6일부터 와인을 좋아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할 때, '나는 몇 월 며칠부터 그 사람(물건)을 좋아할 거야'라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돌발 사고다. 열대 섬에 몰려오는 태풍처럼,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그날 아내와 고양시 일산서구의 이마트타운을 방문했다. 이마트타운은 그해 6월에 개장한 대형 쇼핑몰인데 ㈜신세계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매장이라 개장 전부터 언론에서 크게 다뤘다.


무늬만 서울일 뿐 인근 경기도 광명보다도 집값이 싼 금천구 독산동 거주민은 부촌인 고양 일산에 새로 등장한 메가 쇼핑몰이 무척 궁금했다. 개장 후 1년간 이마트타운을 방문한 사람 중 20km 이상의 원거리 방문자가 38%에 이른다는데, 자동차로 33.8km를 이동해 도착한 우리 가족도 그중 네 명이었다.

여느 때처럼 억척스럽게 쇼핑 카트를 밀며 이동 중이었다. 와인 매장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불현듯 호기심이 발동했다. '손대면 집안 거덜 나는 취미가 카메라, 오디오, 와인이라던데 그렇게 와인이 맛있나?' '만화 <신의 물방울>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와인을 마시며 맛과 향에 대해 기막힌 표현을 쏟아내던데, 진짜 그런가?'

일부러 맛집 찾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미식가이지만 당시에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소주나 맥주가 맛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술 중에서 유독 와인에 대해서는 상찬을 늘어놓으니 기본적으로 궁금함이 있었다.

소주도 맥주도 안 마시는데... 와인을 만났다
 

패너 아쉬 윌라메트 밸리 피노 누아 이 와인을 마시고 가산탕진의 길로 접어들었다. ⓒ 임승수

 
매장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따로 잘 보이도록 세워 둔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 품종의 포도로 만든 패너 아쉬 윌라메트 밸리 피노 누아(Penner-Ash Willamette Valley Pinot Noir) 2007이었다. 패너 아쉬Penner-Ash는 와인회사 이름, 윌라매트 밸리Willamette Valley는 포도 재배 지역, 피노 누아Pinot Noir는 포도 품종, 2007은 포도 수확 연도다.

지금이야 라벨에 인쇄된 문자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는 까막눈이었다. 그저 정가 200,000원에 줄을 쫙 긋고 할인가 50,000원이라고 써놨으니 무려 75%에 달하는 할인율에 주목했을 뿐이다. 정가가 50,000원이었다면 되레 비싸다고 안 샀겠지. 와인 정가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게 된 지금이라면 그런 낚시질에는 눈길도 안 주었을 텐데.

와인 매장에서 쭈뼛대는 내 모습을 포착하고는 와인 수입사 금양인터내셔날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접근했다. 참고로 마트의 와인 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와인 수입사에서 파견 나온 분들이다. 이 직원의 친절한 응대로 할인가 50,000원의 그 와인을 구입했는데, 내가 와인 초짜임을 파악한 직원은 신신당부했다.

"와인을 드시기 30분 전에 냉장고에 넣으세요. 와인은 온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꺼내서 바로 드시지 말고 코르크를 연 후 최소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천천히 드세요.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이 점차 부드러워지거든요."

지금이야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스파클링 와인에 따라 시음 적정온도가 다르며, 온도가 변하면 맛과 향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알고 있다.

특정 와인의 경우 코르크를 열고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키며 최소 5~6시간 이상 기다려야 제맛을 느낄 수 있음도 숙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뭔 술을 그렇게 까다롭게 마셔야 하나 싶었다. 어쨌든 50,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으니,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직원의 지침대로 했다.

역시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갑자기 눈앞에 멋들어진 초원이 펼쳐지거나 웅장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그런데 후각세포와 미각세포의 활동이 심상치 않았다.

세포들은 와인이라는 외부 대상으로부터 받은 자극을 평소처럼 부지런히 전기신호로 바꿨다. 생성된 전기신호는 신경계통을 타고 뇌에서 후각과 미각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전달되었는데, 뇌 속 뉴런들이 이 신호를 토대로 내린 결론은 '믿을 수 없도록 맛있다'였다. 지금까지 맛에 관한 한 인생을 헛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가산탕진형 와인 애호가의 삶이 시작됐다.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이성이 고장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모두 글 팔아 근근이 먹고사는 작가 부부인 주제에 몇 년째 꾸준히 (비싼 것도 포함해서) 와인을 마셔대는 것은, 적어도 와인에 있어서는 이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변화가 일어났다. 초반에는 이 와인 '진짜 맛있다'라고 감탄만 하다가, 몇 년이 지난 후 와인의 풍미를 과일 향, 바닐라 향, 담배 향, 젖은 낙엽 향, 흑연 향 같은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칠레 와인 특유의 풀냄새, 미국 나파밸리 와인 특유의 초콜릿과 연유 느낌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와린이'(와인 초보)가 자라서 키가 5cm 정도는 커진 것이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첫 와인... 변하지 않은 것
 

와인 매장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불현듯 호기심이 발동했다. ⓒ Pixabay

 
4년이 넘은 2019년 11월, 문득 '첫 와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고 싶은 심정이 이와 비슷한 느낌일까? 그동안 와인 경험치를 늘리고 레벨업 하면서 살짝 단 느낌의 미국 피노 누아보다는 달지 않은 프랑스 피노 누아를 더 선호하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다시 마셔도 과연 예전처럼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면 괜한 실망감만 느낄까? 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시 만나는 쪽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평소에 자주 방문하는 김포 떼루아 와인아울렛과 이마트 영등포점 와인 매장에 문의했지만 두 곳 모두 패너 아쉬 윌라메트 밸리 피노 누아(Penner-Ash Willamette Valley Pinot Noir) 2007의 재고가 없었다. 수입사인 ㈜비티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로 연락을 취했으나 답이 없어서 전화로 문의했으나 그 역시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네이버 카페 <★와쌉★ 와인 싸게 사는 사람들>의 게시판에 문의했는데, 감사하게도 고양 스타필드 PK마켓의 와인 매장에서 재고 한 병을 확인했다는 댓글이 달린 것 아닌가. 누가 채 가기 전에 얼른 방문해 남은 한 병을 냉큼 구매했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2007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니 원재료인 포도가 생산된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다. 여타 품종과 비교해 유독 섬세하고 예민한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이니 혹여나 과숙성 또는 변질됐다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어쨌든 4년 전과는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번에는 마시기 전 냉장고 30분이 아니라 와인 셀러에서 적정온도로 보관했으며 안주로 궁합이 잘 맞는 소고기구이를 미리 준비했다. 와인 마시는 이의 경험치와 레벨도 4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와인을 열다가 코르크가 부러져서 코르크 윗부분만 딸려 올라왔다. 오래 묵은 와인의 경우 이렇게 코르크가 부러지는 경우가 있다. 처음 겪었다면 당황했겠지만 이미 경험한 일이라 침착하게 코르크 부스러기를 털어낸 후 병에 남아 있는 코르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와인을 천천히 따라서 디캔터로 옮기고, 디캔터의 와인을 다시 와인 잔에 부었다. 코르크 가루가 소량 떠다니기는 했으나 큰 문제는 없으니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셨다.

4년 전과 비교해 과실 향은 다소 약해졌지만 오랜 세월 숙성된 와인 특유의 구수한 향미가 고성에 거주하는 중년 귀부인을 연상시킨다. 젊음의 넘치는 생명력은 감소했으나 연륜에서 오는 우아함이 빈 곳을 채운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첫사랑과 다시 만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4년 만에 재회한 첫 와인은 다소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오히려 더욱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와인 지식과 경험이 늘었다고 해서 맛있던 와인이 맛없어지거나, 반대로 맛없는 와인이 맛있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그 '맛있음'을 조금 더 깊게 음미하며 다양한 어휘로 표현하게 됐을 뿐.

문득 미국 오리건주의 2007년 포도 작황이 궁금해서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미국 오리건주 피노 누아 관련 빈티지 차트를 찾아보았다. 뭐? 84점이라니! 1996년의 83점 이후로 가장 낮은 점수 아닌가. 2006년 91점, 2008년 94점과 비교하면 얼마나 처참한 점수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와인 평가 사이트 cellartracker에 명기된 이 와인의 2007년 빈티지 시음 적기는 2011부터 2015년까지로 나온다.

이 정보로 판단하자면 시음 적기를 무려 4년이나 지난 것이다. 근래 와인 매장에서 이 와인을 처음 발견했다면 관련 정보를 검색한 후 구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우아한 귀부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점수는 점수일 뿐. 인간이 매긴 숫자를 맹신했을 때 빠질 수 있는 오류다.

물론 이러한 평가 또한 '나'라는 한 인간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가끔은 예전에 마셨던 와인을 다시 마셔봐야겠다. 간만에 어린 시절의 동무들을 만나러 동창회에 나가는 그 아련하고 묘한 감정을 와인에서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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