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06 16:50최종 업데이트 20.01.0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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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상하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마당로청사' 앞 벽에 새겨진 안내판. ⓒ 오마이뉴스 장재완

 
저는 임시정부100주년 역사탐방 참여가 확정된 후, 여름방학에 틈틈이 임시정부와 관련된 책을 보았습니다. 특히 <임정로드 4000km> 책을 보며 자세한 사진과 여러 가지 정보가 많아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저자들이 직접 중국에 갔다 온 영상 `로드 다큐 임정` 도 보았습니다. 탐방할 곳을 화면으로 미리 보니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 손꼽아 출발날짜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9월 16일이 됐습니다. 집에서 새벽부터 출발해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갔습니다. 


처음 방문한 곳은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이었습니다. 이곳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천장절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저격한 곳입니다.

공원안쪽에는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기념관이 있어 영상과 사진,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관에서 똑같은 사진과 비슷한 자료들을 봤었지만 직접 폭탄을 던진 곳에서 보니 너무 그때가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께 너무나도 죄송한 점이 저희 후손들이 당시 의거 현장의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윤봉길의거 현장 표지석`이 있는 곳이 실제 의거현장과 일치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의거 현장을 마음에 담아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이동했습니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사용하던 곳으로 매우 낡고 비좁았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김구, 이봉창, 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나라를 위해 일했을 거라 생각해 보니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좁은 곳에서 일을 하시며 얼마나 힘들고 불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송경령능원'에는 임시정부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선생의 묘가 있었습니다. 이들 5인의 애국선열 유해는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현재는 기념석판만이 남아 있습니다. 몇십 년 동안 외국 땅에 묻혀 있다가 지금이라도 한국에 돌아와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돌아가실 때 이렇게 유언을 남기신 분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고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만 모셔놨으니 너무 죄송하고 중국과 협력하여 빨리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걸어서 `서금이로`를 지났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곳이 서금이로의 `어딘가`일 것인데 알 수 없고 임시정부 2청사는 현재 H&M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항일 독립가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던 곳은 표지판 하나 없이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 잊혀지기 전에 이 곳에 표지석이라도 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역사를 나름 좋아하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 황포탄 의거지로 향했습니다. 중국 근대의 출발점이라는 상하이의 와이탄 한가운데 위치한 공동마두(과거에는 세관마두)가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의거를 일으킨 장소입니다.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키이치를 죽이기 위해 권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이제야 알았고 독립 운동가들을 기억해 내야하고 찾아내야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해설사 선생님의 말씀이 더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둘째 날에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원들의 피난처,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 등을 갔습니다. 저희는 버스로 편하게 이동하며 구경하는 것도 힘든데 그 시절에는 밀정과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옮겨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목숨 걸고 피난처를 제공한 주푸청 가족이 너무 대단해 보였습니다.

특히 김구 선생 피난처 매만가 76호는 뒷문으로 나가면 배로 피할 수 있었고 이동녕이 300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김구 선생이 어디 사는지 모를 정도로 보안유지를 잘 했다는 것이 중국인들에게 매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은 역사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남긴 '우리 동지들은 쟁두운동(爭頭運動)을 피하고 쟁족운동(爭足運動)을 해야 한다'는 말을 선생님이 꼭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친구들 사이에서 높아지려고만 했던 것이 후회가 되며 김구 선생 말씀처럼 쟁족운동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친구들도 잘 도와주고 제가 하고 있는 교통봉사활동도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3일 차에는 중국 난징에 있는 천녕사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의열단장 김원봉이 교장을 맡은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터입니다. 험한 산 속에 있어서 저희가 걸어가기는 힘들었지만 반대로 그 시절에는 천혜의 요새로 숨어 훈련하기 좋았을 장소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새벽부터 일어나 힘차게 훈련하는 모습이 상상되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군가를 들었을 때는 굳건한 기상이 느껴졌습니다. 

다음은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갔습니다. 1937년 12월부터 두 달에 걸쳐 난징 시내 민간인 및 포로 30만 명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대학살을 자행한 비극의 역사 기념관입니다. 중국인 가이드는 '학살'이 아닌 '도륙(사람이나 짐승을 무참하게 마구 죽임)'이 맞는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전시관을 둘러보며 바닥 아래에 실제 뼈가 묻혀 있는 것을 보니 잔인한 일본이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두 명의 장교가 100명을 누가 먼저 죽이나 내기를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들며 그 때 돌아가신 분들이 너무 불쌍하고 한국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에 더 슬퍼졌습니다. 

마지막 밤은 김구 선생이 1933년 5월 장제스 총통과 일대 일 회담을 준비하며 묵었던 곳, 중앙반점에서 잤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곳에 내가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고 긴 시간 자면서 머물렀기 때문에 어딘가에 김구 선생이 있는 것 같아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4일째가 되어 총통부에 갔습니다. 중화민국에서 난징을 수도로 삼은 국민정부 때의 총통부입니다. 임시정부를 많이 도와 준 장제스가 쓰던 곳이라고 하니 더 친근감이 갔고 이 곳에도 김구 선생이 오셨을 것 같아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나이가 어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에 들어가지 못 한 것입니다. 비록 전시를 보지는 못 했지만 직접 그 장소에 와 본 것만으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본 할머니의 외침 "내가 그 증거요"라고 하는 말과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가서 추모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마음이 울컥해서 그 곳을 지키신 대학생 형, 누나에게 가지고 있던 김밥을 주고 후원도 했었는데 실제 장소라는 곳에 서 있으니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 슬픔이 느껴지며 그 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시정부 탐방을 마치며 겨울에 헌법재판소 견학 때 배웠던 헌법전문이 생각났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실제 임시정부 청사 이곳, 저곳을 가 보니 정말 대한민국의 뿌리를 알 것 같고 왜 헌법전문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가 확실히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와서 본 현실은 너무 잊혀지고 방치된 느낌이 많았습니다. 너무나도 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들께 죄송하고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풍요로움이 어떻게 시작되고 목숨 걸고 이루어졌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시작이 된 임시정부의 유적을 찾고 지키려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분들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름도 모르는 독립 운동가들을 찾아내어 기억하고 알리는 일에도 많이 힘써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효원님은 도담중학교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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