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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2.27 13:31 수정 2019.12.27 15:59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산내에서 불법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도망쳐 나오다가 벽에 뭐가 붙어 있어서요."
"뭔데 그래? 네가 한 번 읽어 봐."
"소개령?"
"바다에서 5km 밖에 있으면 폭도라고 할 테니 안 내려오면 다 죽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 바다 쪽으로 내려오라는 건가?"
"바다 쪽도 난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안전한 데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제주 중산간마을에서 피난 온 마을 사람들은 경준이의 안내로 눈이 쌓인 한라산을 헤맨다. 어렵사리 찾은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배고픔에 시달린다. 그때 순덕이 엄마가 보자기에 담긴 지슬('감자'의 제주어)을 꺼낸다. "하나씩 드세요." 배를 채우자 굴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에 쌓인다. 산속으로 모시고 오지 못한 노모 생각과 며칠간 굶고 있을 돼지 걱정에 안절부절 못한다. 영화감독 오멸이 만든 <지슬>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2013년 개봉한 독립영화로 선댄스영화제 대상을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대부분 전문 영화배우가 아닌 아마추어들이다. 즉, 평범한 제주도 사람들을 출연시켜 4.3의 역사적 아픔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14만5000명이 관람했다. 천만 관객 시대에 하품 나올 수 있는 얘기지만, 독립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졸업생 이경준이 출연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4.3사건의 유족이거나 피해자이다. 영화 <지슬>은 본인 가족의 이야기라는 심정으로 열연했다. 그를 포함한 배우 모두의 열연으로 <지슬>은 독립영화계의 전설로 남았다. 이 영화는 2014년 김금숙에 의해 만화 <지슬>로 그려지기도 했다.
  
4형제가 몰살돼
 

육지형무소로 가는 이들 4.3평화공원 ⓒ 박만순

 
이성로는 아내와 자식에게 서두르라고 이야기 했다. 그날이 바로 형님들의 삼우제(三虞祭)였기 때문이다. 그의 큰형과 작은 형의 삼우제가 같은 날인 것은 왜일까? 4.3사건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1948년 4.3사건이 난 이래 살육의 땅이었다. 중산간마을은 방화와 학살의 주된 타깃이 되었고, 그 와중에 이성로의 큰 형 이성근과 작은형 이성모가 학살되었다.

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주도 서귀포군 대정면에 있던 대정고등학교 앞에서 있었던 학살이 그렇다. 여러 명의 주민들이 대정고 앞 이교동 길 한 가운데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이현만(당시 6세)은 말한다. "대정고 앞에서 공개처형하는데요.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어요." 어떤 일로 그랬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낸들 아나요? 하지만 당시에는 영문도 모른 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 게 다반사였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이성로가 두 형의 삼우제에 참석했을 때이다. "저 새끼들 연행해"라는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제사를 막 지내려는 삼형제 중 셋째 이성로와 넷째 이성희가 몽둥이로 맞아 피를 흘린 채 연행되었다. 가족들이 울고불고 했지만 감히 경찰들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제삿날이 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연행된 형제는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가 형은 대전형무소에, 동생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형 이성로는 대전 산내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 처형되었다. 동생 역시 불귀의 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와 백부, 숙부를 4.3 때 잃은 이현만은 '들꽃'처럼 성장했다.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툭하면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고, 대정중학교를 다니는 듯 마는 듯 했다.

농사일을 하며 품팔이하던 그에게 군대는 도피처나 마찬가지였다. 제대 후에는 다시 생계 전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기 일을 배워 제주도 내 여기저기 일을 하러 다닐 때다. 어머니가 "현만아 좋은 사람이 있단다, 선 보거라"고 해서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했다. 아내는 이웃 마을의 24세 여성 문인숙이었다.
 
16세 소녀가 밀항선을 타다

"자 조심해서 타거라." 선장이 손을 내밀었다. 파도에 출렁이는 통통배를 타는 일은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파도에 휩쓸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 휩쓸린다고 해서 구조해 줄 상황도 아니었다. 모두 일본으로 밀항을 하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큰 소리가 나기만 해도 대한민국 해경에게 단속될 것이 뻔했다.

문인숙은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조심스레 통통배로 올라탔다. 배에 안전하게 올라타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배 안의 광경을 본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30명이나 오밀조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장에게 자신의 가족을 일본으로 밀항해 달라는 부탁을 한 이는 문인숙의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4.3사건이 난 후의 제주도는 그야말로 지옥의 섬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육지로 탈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산이나 목포, 서울은 갈 수가 없었다. 제주도 출신인 것이 발각되면 '빨갱이'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일본이다. 하지만 당시는 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기 전이다. 그렇기에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일본으로 간 이들이 돈을 모아 제주도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들이는 상황이었다. 문인숙의 아버지 문덕수는 4.3사건이 터질 때 대구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가족이 걱정이 돼 제주도에 내려온 그가 선택한 길은 일본으로의 밀항이었다. 특별한 활동을 해서가 아니라, 청년이 제주도 중산간마을에 멀쩡히 살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문덕수가 먼저 일본으로 가고 아내 이인정이 2년 후에 남편 뒤를 따랐다. 문인숙은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간 지 12년 만에 연락이 왔다. 문인숙과 마찬가지 신세였던 소년·소녀와 노인들이 선장과 함께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와, 드디어 시모노세키행 통통배를 탔다. 
 
2년 만에 제주도로 쫓겨 와
 
이동은 대부분 삼삼오오 야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는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문인숙은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헤어진 것이 만으로 2살 때였으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만났는데, 아버지가 나를 기억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일본에 가기까지 며칠 동안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젠장, 망했네"라는 선장의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본해경이 비추는서치라이트가 밀항자들의 얼굴에 비췄다. "엄마"하는 비명과 함께 밀항자들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통통배에 탄 밀항자들은 일본해경에 의해 시모노세키 임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일주일 만에 문인숙은 아버지와 상봉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아버지와 함께 오사카로 간 문인숙은 동생들이 다섯이나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에서 낳은 동생들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서운한 것이 소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문인숙이 오사카에서 다닌 학교는 총련계였다. 대수, 자연지리, 세계지리, 일본어를 배웠다. 그녀가 다닌 중학교 규모는 꽤 컸다. 한 반에 50명이었는데, 한 학년에 13학급이나 되었다. 그만큼 오사카로 밀항 온 제주도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문인숙의 오사카에서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중에 일본해경에 적발되었기에 체류기간이 1년으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이 연장되어, 총 2년 만에 일본에서 강제로 출국 당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겨우 정이 들만 할 때 동생들과 헤어지는 것도 서운했다.
 
대(代)를 이은 기억투쟁
 

이현만(오른쪽)-문인숙 부부 ⓒ 박만순

 
제주도에 돌아온 문인숙은 농사 일에 매달렸다. 고구마, 보리, 조 농사를 해야 했고, 때가 되면 소여물을 뜯기러 가야 했다. 그러다가 선을 봐 남편 이현만과 결혼하게 되었다.

문인숙이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땅 때문에, 그들 부부는 그럭저럭 생활을 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불청객이 찾아왔다. 서귀포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다. 문인숙이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형사가 궤를 보여 달라고 했다. "싫다"고 하자, 옆에서 계속 종용했다. 일본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편지나, 사진 같은 것이 왔는지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보과 형사의 시달림에 결국 문인숙이 궤 안의 물건을 모두 꺼내 보여주자 형사는 뒷머리를 긁으며 돌아갔다. 아버지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문덕수는 총련 소속이라 2000년도에나 제주도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문인숙은 1989년도에 일본에 처음 간 이후 수시로 일본에 가 남매들을 만나 외로움을 달랜다.

4.3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크다. 제주도 사람이라면 한 집 걸러 한 집 피해자가 없는 집이 없다. 이현만·문인숙 부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남편 이현만은 아버지 4형제가 학살당했고, 문인숙은 어릴 때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런 그들과 가족들이 대(代)를 이어 기억투쟁을 전개했다.

이현만은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의 죽음을 진실규명 요청했고, 2010년에 국가에 의해 진실규명이 결정되었다. 나머지 아버지 형제들도 '제주4.3특별법'에 의해 명예회복 되었다.

문인숙은 2016년 양정환이 만든 <오사카에서 온 편지>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이현만·문인숙의 아들 이경준은 오멸 감독의 <지슬>에 출연해, 4.3의 아픔을 전국화 하는 데 일조했다.

제주도 출신의 이도영 박사는 미국립문서보관청에서 4.3과 관련한 중요기록을 발굴해, 4.3을 전국민적 관심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제주 탐라대 교수였는데, '백조일손지묘'의 유족이기도 하다. 이박사는 1999년도에 미국립문서보관청에서 대전산내학살 기록과 사진을 최초로 발굴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도영 박사는 이현만의 7촌 조카다.

즉, 이현만·문인숙 가족은 대를 이어 '4.3의 기억화'를 위해 애를 썼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도영 박사도 그렇지만 젊은 이경준도 '4.3의 기억화'를 위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꿈 꿀 수 있다'는 경구가 생각나게 하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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