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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03 08:39 수정 2020.01.03 08:39
'슈우욱, 쾅!' 연이어지는 폭격 소리는 마을 사람들을 기겁하게 했다. 대낮에 날벼락이었다. 1951년 1월 초 소백산 자락에 있는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마을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미군 비행기가 소백산 자락을 연신 비행하면서 중산간마을에 대한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해발 300에서 500미터에 위치한 어의곡리는 폭격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어의곡리 주민들은 종일 미군폭격을 피해 다니느라 파김치가 되었다. 어둠이 소백산 비로봉 자락의 어의곡리 마을을 감쌌을 때,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지만 그것이 헛된 기대로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단양군 대강면에 위치한 죽령에서 쏘아올린 포는 어의곡리 마을에 떨어졌다.

'쾅, 쾅, 쾅!' 종일 미군폭격에 시달린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 밖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인근 야산의 바위 뒤로 숨거나 자연 동굴을 찾아 몸을 숨기기 바빴다. 지난 여름 난리(6.25)는 난리도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때는 어의곡리 주민들에게 커다란 피해가 없었다. 그렇기에 전쟁이 무엇인지, 인민군이 점령한 것인지, 국군이 점령한 것인지도 모른 채 넘어갔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점화된 '겨울 난리'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이 소백산에 은거하면서, 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며칠간의 폭격으로 어의곡리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은 초토화되었다. 24가구 중 대부분 가옥이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주민들은 모두가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들은 끼니도 거른 채 부상자를 돌보거나, 마루와 방에 우두커니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마을 입구에서 '쏼라쏼라' 하는 소리가 났다. 키가 한 뼘이나 큰 미군들이 통역을 앞세우고 어의곡리 음지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집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 어떤 경고나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부엌에다 고구마 같은 것을 던졌다. '쾅' 소리가 나면서 부엌이 무너졌다. 미군이 부엌에 던진 것은 고구마가 아니라 수류탄이었다.

미군은 며칠간 이어진 폭격과 포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가옥을 일일이 다니며 수류탄을 던졌다. 소위 '확인 사살'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가옥이었을 뿐이다. 대동한 통역이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허깨비일 뿐이었다. 그렇게 대낮의 폭격과 야간의 포격, 미 지상군의 수류탄 투척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24가구 중 22가구를 파손시켰다.
 
여우들의 울음소리

'오오옹' 하는 소리가 양지마을 산구렁(산골짜기)에서 들렸다. 양지마을 주민들은 어디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감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여우들의 울음소리였기 때문이다. 여우들이 야산에 몰려다니며 그냥 우는 게 아니었다. 양지마을 산구렁에 가매장한 시신들을 뜯어 물고 다녔다. 

그런데 왜 양지마을과 그 아랫마을인 음지마을 사람들이 여우들의 표적이 된 걸까? 지난 동짓달(음력 11월) 말인 1951년 1월 초에 있었던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마을에는 장티푸스가 내돌았다. 주민 상당수가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음지마을에 살던 이성명(여)도 병에 걸려 오늘내일 했다. 미군의 폭격과 포격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남편의 등에 의지해 자연동굴로 피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과 가족들의 병간호는 특별할 게 없었다. 약은 고사하고, 때를 이을 식량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명은 고열과 두통, 복통에 시달리다가 나중에는 헛소리까지 했다. 그러던 그녀는 그해 음력 정월 18일(1951년 2월 23일) 운명을 달리 했다. 이성명이 이승의 삶을 마친 날을 앞뒤로 해, 마을 주민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다. 장티푸스의 열병이 온 마을을 감쌌다. 급기야 그해 겨울, 30명의 주민들이 세상을 달리했다. 죽은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탓일 것이다.

양지마을 일부 주민들은 시신을 정식으로 매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주민들은 대다수 시신들을 산구렁에 가매장하기 바빴다. 이렇게 가매장된 시신들을 여우들이 훼손한 것이다.
 

장티푸스로 죽은 30명이 매장된 장소 ⓒ 박만순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1리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에 불벼락이 내릴 때, 어의곡2리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어의곡2리 한드미마을 주민들은 한드미동굴로 피신했다. 5억년의 신비를 간직한 석회석동굴이었다. 한드미동굴은 깊지는 않았지만 굴 입구가 매우 넓어 마을주민들이 모두 피신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약 200명의 마을 주민들이 굴 안에 가득했다. 미군비행기는 마을뿐만 아니라 굴 주변을 비행하면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심지어 석유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투하하기까지 했다. 1951년 1월 20일,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에서 있었던 곡계굴사건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이날 굴에 있었던 가곡면 여의곡리 양지마을 주민 조성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여기 있다가는 모두 죽을 겁니다. 백기를 만들어 나가요." 어차피 굴속에 있다가는 전부 통닭구이가 될 판이라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이들은 흰 속옷을 벗어 나무에 매달아 흔들며 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이 백기 일행을 인식하기 전에 기총소사를 해, 여성 두 명이 쓰러졌다. 이에 안용희의 어머니가 창자를 쏟아내며 즉사했다.(김순환, 78세.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있었다. 권영창 어머니의 창자가 터진 것이다. 놀란 것은 옆에 있던 그녀 남편이었다. "아이고 내 마누라 죽네." 하지만 마냥 곡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편은 쏟아진 창자를 주워 아내의 복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옷으로 복부를 감쌌다. 지게에 아내를 실은 남편은 울음 반 콧물 반을 하며 집으로 갔다. 하지만 남편의 애끓는 마음과는 달리 아내는 다음날 차디찬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여기가 내가 죽을 뻔 했던 곳이에요"
 

이재천 가족이 폭격당한 단양군 가곡면 여의곡리 양지마을 ⓒ 박만순

 
"여가 그 자리입니다." 해발 500미터에 위치한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양지말 개울가에 멈춰 선 조윤야(82,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는 68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여기가 이재천씨 가족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한 곳이에요."

6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산촌지역의 길은 확장됐고 냇가에 있던 바위가 잘려나갔다. 양지마을 이재천 일가가 미군의 폭격을 피해 바위 밑에 숨었다가, 물을 먹으러 나온 사이에 기총소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재천의 아내, 아들, 딸이 즉사하고, 딸 둘은 각각 엉덩이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재천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1951년 2월 장티푸스로 인해 죽은 30명이 매장된 곳을 안내하기 위해 걷던 조윤야는 기자에게 또 한 곳의 위치를 손짓했다. "여기가 오빠와 내가 미군에게 죽을 뻔했던 곳이에요" 한드미동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성래가 연일 계속되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여동생과 방공호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 조명석은 장티푸스에 걸린 아내 이성명을 지게에 지고 아랫마을로 내려간 상태였다.

조윤야(당시 14세)는 좁쌀을 머리에 이고, 오빠 조성래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군에 조성래 남매는 얼어붙었다. 잔뜩 긴장한 오빠가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여동생 조윤야는 순간 "오빠 손들엇"하며 외쳤다. 웬지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성래는 이불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조성래 남매 일행을 본 미군은 통역을 통해 "아래 마을로 내려 가"라고 했다. 우물쭈물했다가는 미군의 총질에 저 세상으로 갔을 뻔한 상황이었다. 

1951년 1월 초 미군에 의해 충북 단양군 가곡면 여의곡리에 가해진 초토화 작전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폭격과 포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5명에 그쳤지만, 대부분 가옥이 불에 타고 전염병으로 약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윤야는 말한다. "당시 어머니 있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폭격 후에 사람들은 살 곳이 없어 솔가지를 잘라다가 임시 집을 만들어 살았어요." 움막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곳에서 한겨울을 보낸 것이다.
 
동굴만이 진실을 안다
 

여의곡리 주민들이 피신해 있던 한드미동굴 ⓒ 박만순

 
1951년 1월 단양군 일대에 가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마치 2년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중산간마을에 대한 방화·학살과 유사하다. 물론 단양군의 피해는 제주 중산간마을의 피해 규모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군이 빨갱이들의 저항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중산간마을에 가한 초토화 작전이라는 성격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소개령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하고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또 가옥에 대한 폭격과 방화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다.

특히 충북 단양군은 석회암지대로 자연동굴이 지역 곳곳에 위치해 있다. 1951년 겨울 난리 때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동굴로 피신했다. 미군은 네이팜탄 투하와 기총소사로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했다. 단양군 영춘면의 곡계굴 사건이 그렇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또한 미지상군이 마을에 진주하면서 소개령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하고 만삭의 임산부를 성폭행한 곳도 있었다. 단양읍 노동리·마조리 사건이 그렇다. 1951년 1월 10~11일 미군의 폭격과 미지상군의 사격으로 마을 주민 200명이 죽고, 가옥 210호가 파손되었다. (관련기사: 죽은 소 버리기 아까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충북 단양군의 미군피해 사실을 조사한 것은 곡계굴과 노동리·마조리 사건에만 국한되었다. 피해자의 신청이 2개 사건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자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단양군에 대한 마을 전수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 말과 1951년 초 미군에 의해 이루어진 전쟁범죄는 수많은 민간인의 살상을 초래했다. 동굴에 은신한 주민들의 피해 역시 컸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면,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사법이 하루속히 국회에서 개정되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야 한다. 단양군 역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기 전이라도 마을 전수조사를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 동굴만이 알고 있을 진실, 그 기억의 책임을 언제까지 동굴에게 미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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