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1 08:30최종 업데이트 20.02.24 10:47
  • 본문듣기
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00년 사건, 그후'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6월 28일자 <문화일보>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문화일보

 
- 혹시 첫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제가 주변이 없어서 조강지처와 결혼하기 전까지 연애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훈훈한 질문과 답변이 오간 곳은 2000년 6월 26일 국회 본청 145호실. 헌정사상 첫 인사청문회가 열린 현장에 자민련 김학원 의원과 국무총리 인준안 표결을 앞둔 이한동 후보자가 마주 앉았다. 김 의원의 이날 질문들은 이 후보자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맞춰졌다. 이런 식이었다
 
- 평소에 독서량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 흔히들 친구를 본인의 거울이라고 하는 얘기를 합니다. 혹시 잊지 못할 교우관계 있으시면 하나 소개해 주시죠?
- 1997년 후보자가 장애인돕기 음반을 취입을 한 것으로 아는데,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는지?
- 검사, 판사, 변호사에 국회에서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책위의장과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하셨습니다. 이렇게 넓은 경륜이 국무총리 직무 수행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지?



어디까지가 질문이고 어디까지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물음들이 계속되며 이 후보자도 한껏 여유를 찾았다. 이틀간의 청문회가 끝난 뒤 김 의원에 대해 "상식 밖의 질문을 했다"는 비판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행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사람의 업무 능력과 자질을 입법부가 검증하자는 취지로 도입한 제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총리 임명장을 주던 대통령에게 '이젠 국회의 확인 도장을 받으라'는 것은 민주화 시대의 요구였다.

'위장전입' 논란의 시작
 

인사청문회 당시 이한동 총리서리. 그는 자신이 "고등고시를 칠 때 선택과목으로 경제학을 택해 아주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며, 경제 비전문가라는 지적을 일축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사실 이 후보자는 김 의원의 질문 시간에 잠시 숨을 돌렸을 뿐, 청문회 내내 혼이 났다. 한나라당 초선 심재철 의원(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이 이한동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부인이 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포천의 땅을 매입해놓고 주민등록을 40여 일 동안 옮겨놨다"는 심 의원의 지적에 이 후보자는 "위법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버티다가 결국 "위장전입이라고 볼 수 있겠다"고 실토했다. 위장전입은 청문회 때마다 공직후보자가 흠결이 잡히는 단골 메뉴가 됐는데, 이 후보자는 이로써 TV 카메라 앞에서 위장전입을 시인한 첫 공직자가 됐다.

같은 당 초선 이성헌 의원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 혹시 후보자께서는 고스톱 칠 줄 아십니까?
"칠 줄 알지요. 그런데 잘 칠 줄도 모르고 저는 잘 끼어주지도 않습니다."
- (종이를 펴 보이며) 1998년 4월 20일 국회의원 13명이 고스톱을 했다는 보도가 나와서 참여연대가 고발장을 냈는데, <주간조선> 3월 18일자에 후보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후보자는 "(고발장에) 적시된 일시에는 고스톱 친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지난날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가 계속 공전할 때 의원회관에서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고 장기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지난 과거를 털어놔야 했다. 같은 당 원희룡 의원으로부터는 1973년 검사 시절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하는 대학생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냐는 지적을 받아야 했다.

이한동 국무총리 인준안은 찬성 139명(반대 130명)으로 과반수(137명)를 간신히 넘겨서 통과됐다. 국회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 제1야당 한나라당(133명)과 공동여당(민주당 115명, 자민련 17명)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룬 상황에서 한나라당 출신의 보수성향 총리 카드였기에 부결을 면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총리의 무덤

그러나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국회는 말 그대로 '총리의 무덤'이 됐다. 2002년 한 해 동안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낙마하는 총리 후보자가 2명이나 나왔다.
 

2002년 7월 29일 오전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상 총리서리의 다양한 얼굴 표정. 장 총리 지명자는 국정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보인 반면, 이날 처음 제기된 아파트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서는 물을 들이키는 등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 연합뉴스

  

장상 총리서리에 대한 청문회가 열린 2002년 7월 30일 국회에서 여성계 인사들이 장 총리서리의 위장전입 의혹을 제기한 심재철 의원(왼쪽)에게 항의하자 심 의원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연합뉴스

 
2002년 7월 10일 오후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대안신당 의원)은 장상 이화여대 총장을 만나 총리를 맡아달라고 통사정했다. 그의 구상대로라면, 장 총장은 헌정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로 자리매김될 터였다.

그러나 임명되자마자 아들의 미국 국적, 학력 허위기재 논란, 아파트 불법 증축과 부동산 투기 의혹 등등 각종 도덕성 시비가 일기 시작하며 청문회는 전쟁터가 됐다. 국회 인준안 투표 결과는 찬성 100표, 반대 142표, 기권 1표, 무효 1표. 민주당 115표도 다 모으지 못한 여당의 참패였다.

'여성 총리' 카드가 실패하자 이번엔 매일경제신문 사장 장대환이라는 50세의 언론인 카드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장 후보자 또한 10여 건의 부동산 투기와 자녀의 위장전입, 부인의 임대소득 탈루 등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의혹 백화점'이라는 뭇매를 맞았다. 인준안 표결 결과는 찬성 112표, 반대 151표, 기권 3표로 여전히 국회의 문턱을 넘기에는 부족했다.

총리를 정하지 못하고 청문회 정국이 석 달가량 이어지면서 여당은 "야당의 일당 독재가 국정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야당은 "비리 공직자를 두고 보란 말이냐"고 맞삿대질하는 '익숙한 풍경'이 이 무렵 생겼다.

최종 낙점자는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낸 김석수씨. 청문회에서 삼성전자 사외이사 재직 시의 특혜분양과 부당이득, 잦은 해외여행 등이 입길에 올랐지만,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둔 국회의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압도적인 찬성표(210명)를 받아 총리 공관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인사청문 대상 확대... 육탄 저지부터 자진 사퇴까지
 

취임 13일만에 사의를 표명한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2006년 8월 2일 낮 점심식사를 위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집무실을 나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밝은 표정으로 답변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장관들까지 인사청문 대상이 확대되면서 정치권의 대치 전선은 깊고 넓어졌다. 2005년 들어서 이기준 교육부총리와 이헌재 경제부총리,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이 연달아 가족 문제와 비리 의혹으로 중도 사퇴하면서 '인사청문회 확대' 여론이 힘을 얻은 결과였다.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경우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장을 받은 뒤에 불거진 '논문 표절' 논란으로 국회 교육위에 출석해 '2차 청문회'를 감수해야 했다. 김 부총리는 국회에 나와 자기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뒤 다음날 사직서를 던졌다.

재밌는 점은 10년 뒤 김 부총리가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되자 이번에는 민주당이 "탄핵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오기와 독선의 인사"라며 인사청문회 개최를 거부했다. 그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 서지 못했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틀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2006년 11월 15일 오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탐색전을 하기 위해 본회의장에 잠시 들어와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6년 8월 12일 헌법재판소장에 내정된 전효숙 재판관은 청문회를 거친 후에도 한나라당의 육탄 저지로 인준안 표결 자체를 못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그의 지명을 철회했다.

뒤바뀐 공수

2007년 대선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공수의 칼날도 뒤바뀌었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으로 부름을 받은 남주홍(통일장관), 이춘호(여성장관), 박은경(환경장관)씨는 청문회에 서지도 못하고 낙마했다.

'법질서의 수호자' 검찰총장이 청문회 위증으로 사상 처음으로 낙마한 것도 이명박 정부에게 아픈 상처다. 2009년 7월 13일 인사청문회에서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는 '스폰서' 논란에 대해 "문제의 인물과 해외여행을 같이 간 적이 없다,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탔는지는 모르겠다"고 거짓말했다. 다음날 이명박 대통령은 그의 사표를 두말없이 수리했다.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2010년 8월 29일 오전 '총리 후보 사퇴'를 발표하기 위해 그동안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던 서울 광화문 한 오피스텔 현관에 도착한 뒤 대기중인 취재진앞에서 90도로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그러나 이듬해에도 '인사 참사'는 계속됐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참패의 충격을 딛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이 대통령은 40대의 김태호를 국무총리로 내세운 개각을 단행했다.

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의 관계를 부인하다가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오자 사퇴했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와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도 부동산 투기 등의 도덕성 논란을 버티지 못하고 동반 사퇴했다.
 

2013년 3월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뒤로 국방위 회의실에 내걸린 '선진강군 국민과 함께' 문구가 보인다. ⓒ 남소연



박근혜 정부(2013년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 2014년 김명수 교육부총리 후보자와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문재인 정부(2017년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2019년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서도 청문회에서 불거진 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퇴한 공직자들이 연달아 나왔다.

공직자 낙마 사태가 되풀이될 때마다 여당에서는 "후보자 신상 문제는 비공개로, 정책은 공개 청문회로 분리개최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여당이 야당으로 처지가 바뀌면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간다. 권력을 빼앗긴 입장에서 권력을 겨누는 '예리한 칼'을 스스로 버리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공직후보자의 첫사랑 얘기나 미담 사례를 묻는 '훈훈한 청문회'는 당분간 2000년의 추억으로 묻어두어야 할 듯싶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