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6
원고료로 응원하기
본문듣기 등록 2020.02.21 08:12 수정 2020.02.21 08:24
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00년 사건, 그후'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8월 1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 ⓒ 중앙일보

 
배우 홍석천이 동성을 사랑한다고 밝히기 약 한 달 전, 서울에서 놀랄만한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그 현장을 다룬 주요 언론은 없었다. 위 기사처럼 <중앙일보>와 <오마이뉴스>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예고기사를 낸 게 전부였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가. 2020년의 시선으로 보면 대한민국 커밍아웃 1호 연예인의 등장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없는 거리에는 무대가 설치된 1.5톤 트럭 한 대와 여섯 색깔의 무지개 깃발을 들고 걷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LGBT라고 소개했다. 여성 동성애자(Lesbian), 남성 동성애자(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사회의 성적 소수자로 숨죽여오다가 이날 하루 거리로 뛰어나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2000년 8월 26일 오후 4시 40분, 한국의 첫 퀴어문화축제(아래 퀴어축제)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잡지 '버디'에 실린 1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사진(당시 '버디' 편집장이었던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이 촬영). ⓒ 한채윤

  
공식 일정은 9월이었지만 작은 해프닝 끝에 퍼레이드를 먼저 진행하게 됐다. 한적한 대학로를 따라 걸어가던 그들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70명에 불과했던 행진이 20년 후 15만 명 규모의 거대한 퀴어 퍼레이드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은 한국 퀴어축제의 20년사를 두 눈으로 지켜봐온 인물이다. 1회 때는 잡지 기자로, 2회부터 지금까지는 축제의 핵심 스태프로 참여해왔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대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페미니즘 베스트셀러 작가 등 그를 둘러싼 수식어는 많지만 '퀴퍼(퀴어 퍼레이드) 산증인'만큼 한채윤이란 사람의 서사를 관통하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한채윤 단장을 만나 '한국 퀴어축제의 변화와 과제'를 주제로 인터뷰했다. 질문과 답변이 쉬지 않고 오가는 2시간 동안 그는 막힘이 없었다. 혐오와 배제, 지지와 연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와 이루고 싶은 꿈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일문일답 전문] "호주 퀴어 퍼레이드에는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건..." (http://omn.kr/1mhb4)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 ⓒ 권우성

 
[시작] "이렇게 된 이상 너희끼리라도 해라"... 뜻밖의 기회

첫 퀴어축제는 서울국제퀴어영화제 속 작은 행사로 시작했다. 2000년 9월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에 축하공연과 토론회,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퍼레이드는 애초 계획에 없었다. "다들 하고는 싶어 했지만" 아직 역량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꿈만 꾸던 그들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그해 8월 말 퍼레이드를 준비 중이던 독립예술제 쪽에서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 것. 조직위는 공식 축제 전에 한번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참가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독립예술제 퍼레이드 당일, 비가 내리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퀴어축제 팀만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최 측은 '이렇게 된 이상 너희끼리라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국의 첫 퀴어 퍼레이드가 단독으로 열렸다. 이들은 대학로 대로를 두 바퀴 도는 공식 행진이 끝난 뒤에도 "너무 신이 나서" 한 바퀴 더 돌았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어. 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그 시선을 견디고 있어.' 이런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그런 불안을 견디고 나온 게 자랑스럽기도 해요. 또 다들 별 신경 안 쓰고 함께 걷는 것 같거든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을 거야.' 복잡한 감정들이 점점 가슴 벅참으로 바뀌죠. 한번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의 차이는 엄청 커요."
 

잡지 '버디'에 실린 1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사진(당시 '버디' 편집장이었던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이 촬영). ⓒ 한채윤

 
첫 퀴어축제 당시 <버디>(성소수자들을 위한 잡지) 편집장으로서 취재기를 썼던 그는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위에 참여해 축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1회 때 자금을 지원해준 서울퀴어영화제도 수천만 원 적자를 안고 해산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축제를 열고 싶었기에 발품을 팔았다. 게이 바나 레즈비언 바에 찾아가 후원금을 받고 영화진흥위원회 등에 기금을 신청했다. 그렇게 모은 2회 예산은 600만 원. 넉넉하지 않은 자금으로 퍼레이드와 영화 상영회를 열고 파티와 전시회, 토론회도 개최하며 종합 문화축제다운 행사를 꾸렸다.
 
[전개] 안전과 홍보 사이에서
 
축제에 사람이 얼마나 모이는지도 관건이었다.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보고 부스 행사에 와서 굿즈(기획 상품)를 사는 참가자가 얼마나 되냐에 따라 수익이 결정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가자 규모를 인위적으로 늘리려고" 하진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참가자들은 자기가 노출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들이 있는 상태예요. 1000명, 2000명, 이런 식으로 목표를 세워서 한다?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참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인원을 늘릴까를 생각할 순 없는 거예요."

참가자 안전 우선의 원칙을 세우자 언론 취재에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 영상에 얼굴이 공개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언론사들이 취재하기 힘들다며 찾아오지 않기 시작했다. 축제가 6, 7회로 나아갈 무렵의 딜레마였다.
 

2005년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성적소수자들과 지지자들이 종묘공원에서 종각 시티은행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 오마이뉴스

  
조직위는 안전과 홍보의 사이에서 답을 찾아나갔다. 얼굴 공개를 원치 않는 참가자들에게 빨간 띠를 두르게도 해보고, 볼에 스티커를 붙이게도 해봤다. 전부 다 식별에 별 도움이 안 돼 지금은 기자들에게 프레스 카드를 발급하며 안내한다. '참가자의 얼굴을 내보낼 때는 기자가 직접 본인에게 확인할 것.'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이 두려운 참가자들은 알아서 자기 방식대로 얼굴을 가리고 온다.

축제의 틀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2007년부터는 장소를 청계천으로 옮겨 새롭고 다양한 행사들을 시도했다. 성소수자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공개적으로 터져나왔다. 당시 정부가 입법을 추진 중이던 차별금지법 제정안의 영향이 컸다.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당연히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법적·제도적 변화가 이어져 왔으므로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위기]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생각했건만... 가로막힌 흐름

진보의 흐름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제동이 걸렸다.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죄악인 동성애를 조장하지 말라'며 차별금지 대상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반동성애 세력의 거센 반발에 가로막힌 차별금지법은 아직까지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안 만들어질 수 있지? 인권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도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그 뒤로 13년째 법이 안 만들어질 줄이야. 2008년 이명박 정부, 2013년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흐름이 완전히 끊긴 상태예요. 노무현 정부 때 차별금지법이 제정 안 된 건 그래서 지금도 참 아쉬워요. 오히려 점점 강력해지는 성소수자 혐오를 보면 안타깝죠."

보수 기독교 안에서 이른바 '혐오 세력'이 집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011년 서울학생인권조례 등 성소수자 현안에 반대해오던 이들은 2014년 퀴어축제를 정조준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퍼레이드 행진을 막으려 하거나, 야외에서 노숙을 하며 집회신고를 저지하려 했다.

[절정] 고난이 만들어낸 르네상스

보수 기독교 단체의 끈질긴 방해 공작에 침착하게 대응해오던 퀴어축제는 2015년 또 한 번의 기회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집회의 상징적 장소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4회 행사를 열게 된 것이다.

넓고 탁 트인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 축제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퍼레이드 행진 인원만 해도 2015년 3만 명, 2016년 5만 명, 2017년 8만 명, 2018년 12만 명으로 늘었다. 20회를 맞이한 지난해에는 약 15만 명이 모였다. 내부에서는 "그분들이 키워주신 축제"라는 '웃픈' 말도 오간다고.
  
1회와 20회를 비교했을 때 축제 규모나 참가 인원을 제외하고 가장 크게 변화한 건 무엇일까.

"글쎄요... 경찰의 협조(웃음)? 2007년부터 6년간 청계천에서 행진하는 동안에는 경찰이 집회신고를 아예 안 받아줬어요. 토요일마다 청계천이 차없는 거리니까 그냥 거기서 하라고 했죠. 퍼레이드를 하면 정보과 형사가 그냥 한번 와서 둘러보는 정도였어요. 참가자들 안전은 저희가 지켜야 했어요.

2013년 홍대로 가면서부터 집회신고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 경험한 게 경찰이 저희를 보호하러 나왔다는 사실이었어요. 지금은 경찰이 '서로 잘 협조해서 이 행사를 안전하게 끝내는 게 모두에게 좋다'며 협상을 해요. 저희가 '오후 4시 반에 퍼레이드가 출발해야 한다' 요구하면 경찰은 '5시가 더 안전한데'라는 식으로. 경찰도 여러 번 하니까 익숙해졌는지 2019년 퍼레이드는 혐오 세력 차단이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어요(웃음)."


[결말] 시민의 환대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된 2019년 6월 1일 오후 주요 행사가 열린 서울광장을 출발해 광화문광장을 돌아오는 구간에서 대규모 서울퀴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 권우성

 
올해에도 21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축제를 방해하려는 일부 보수 기독교 세력이 안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는 이들을 견제하려면 근본적으로 여론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특히 퀴어축제와 반대세력의 '충돌' 또는 '갈등'으로만 다루는 언론의 보도 태도가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갈등이 아니고 저희가 괴롭힘당하는 중이에요. '지금 종교가 성소수자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가'라는 시선으로 언론들이 현장을 다뤄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는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광장에 성소수자 몇만 명이 모이는 건 옛날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반박했다. 축제가 성장한 만큼 사회가 안 따라왔고, 안 따라오는 게 문제라고. 사회를 바꾸는 권력과 권한을 가진 정치가 그만큼 안 따라오고 있다고.

"한국 사회가 변해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에요.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힘이 모이고 있다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모인 힘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정치권이 직시하고 인정했으면 해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 ⓒ 권우성

 
인터뷰를 하는 한 단장의 눈이 가장 반짝인 순간은 2001년 호주에서 본 것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는 첫 퀴어축제가 끝난 뒤에 취재차 시드니 마디그라 퍼레이드(Sydney Gay and Lesbian Mardi Gras)에 참가했다. '동성애 OUT'을 외치며 신의 심판을 경고하는 기도회 같은 건 없었다. 그 도시의 성소수자들은 그저 엄청난 환호와 환대에 둘러싸인 채로 행진하며 축제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귀국 후 그가 여태껏 축제 기획에 참여해온 이유다. 한국의 LGBT들도 그런 자긍심과 환대를 느끼길 원했다. 앞으로 퀴어축제를 이어가는 동안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 퍼레이드도 규모는 굉장히 늘어났죠. 거리에 선 시민들의 반응도 나쁘진 않아요. '와, 그래도 돌을 던지진 않아' 정도? 그렇지만 제가 호주에서 봤던 환대를 아직 한국에서는 못 느껴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퀴어축제가 더 변화하고 성장할, 새로운 퀴어 퍼레이드 문화를 만들어낼 여지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에요."
 

ⓒ 이은영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