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3 09:40최종 업데이트 20.02.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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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 종로 계동 초입에 있었던 휘문고등보통학교(아래 휘문고보)는 유난히 뛰어난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학교이다. 문학가로서는 소설가 박종화, 이태준, 김유정, 이무영 등이 나왔고, 시인으로서는 정지용, 김영랑, 오장환 등 근대기를 수놓은 뛰어난 시인들을 배출하였다.

미술계에도 여럿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여 경성제2고보와 함께 근대 미술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제2고보에는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와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라는 뛰어난 일본인 선생들이 있어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면, 휘문고보에는 유학에서 돌아온 고희동(高羲東)과 장발(張勃)이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양화가로는 서동진, 안석영, 이쾌대, 오지호, 이마동 등이 있었고, 조각가 김종영도 장발의 권유로 조각을 전공하게 되었다. 또한 뛰어난 공예가 임숙재도 이곳 출신이었다.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윤희순, 고서화 수장가로 유명한 전형필도 모두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고희동을 만나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오지호
 

오지호와 그의 부인 지양진 ⓒ 문선호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전남 화순 동복면에서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오지호'라는 이름은 훗날 30대부터 사용한 필명이고, 본명은 '오점수(吳占壽)'이다. 형제들이 일찍 죽자 요절을 걱정한 부친이 항렬자를 포기하고 지은 이름이라 한다. 부친 오재영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각자로 후에 보성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지호는 어려서부터 독선생을 두고 공부하며 자존심 강한 아이로 자랐다. 동복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빼어난 미술 실력을 보여 칭찬을 듣는다. 졸업 후 한동안 부친 곁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 공부를 한다. 1919년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이 고종의 죽음과 삼일운동을 겪으며 절망 끝에 자결하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오지호는 새로운 세계로 탈출할 것을 꿈꾼다. 때마침 전 해에 신설된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혼자된 어머니 가까이 있느라 서울 대신 전주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주고보에서의 생활은 처음엔 활발하였으나 점차 시들해졌다. 그는 일 년 반 만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1921년 서울에 있는 휘문고보에 편입시험을 거쳐 들어간다.

오지호는 휘문고보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며 활기찬 학창 시절을 보낸다. 특히 같은 반의 이무영, 선배 정지용, 후배 이태준, 이마동 등과 어울리며 원대한 미래를 꿈꾼다. 당시 오지호는 휘문고보 근처 계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자주 몰려와 놀기도 하고 토론을 하는 등 교분을 쌓았다.

오지호는 휘문고보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하는 계기가 생긴다. 한국 최초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로 유학을 다녀온 고희동을 만난 것이다. 그는 고희동에게 인정을 받으며 많은 영향을 받지만, 한편으론 계속 서양화 작업을 하지 못한 스승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오히려 3학년 때 처음 접한 한국인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활동에 큰 감명을 받는다.

1922년 18세에 부모님의 주선으로 광주 부호의 딸인 지양진(池良珍)과 결혼을 한다.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 4학년 때 나혜석, 이종우, 백남순, 이제창 등이 중심이었던 '고려미술원'에서 미술 공부를 한다. 그는 가까이 지내던 경성제일고보의 김주경, 중앙고보의 김용준 등과 함께 그림 수업을 받는다. 그는 특히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이제창의 지도를 자주 받았다.

1924년 마지막 학년인 5학년 때는 김주경, 김용준 등과 함께 도쿄미술학교를 목표로 중앙고보에 있던 이종우 화실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때 이종우는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 미술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 아틀리에는 실기실로는 환경이 좋아 여러 화가와 학생들이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주로 목탄으로 석고 데생을 하며 두 달간 열심히 공부하였다.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다
 

오지호 ‘임금원’ 1937 ‘오지호 작품집’(전남매일신문사, 1978) 재촬영 ⓒ 황정수

 
1925년 3월 드디어 세 사람은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한해협을 건넌다. 그러나 도쿄미술학교 입시는 생각과 달리 그리 녹녹치 않았다. 사범과를 지망한 김주경은 합격했으나, 오지호와 김용준은 서양화과에 낙방하고 만다. 한국에서 연마한 자신들의 실력이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쓴 약 같은 좋은 경험이었다.

오지호는 재수를 위해 입시 준비를 전문적으로 하는 가와바타미술학교에 들어가 일년간 열심히 입시 준비를 한다. 다행히 이듬 해 1926년 입시에서 김용준과 함께 도쿄미술학교 입시에 성공한다. 이곳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공부하던 중 평양 출신 한국인 선배 화가인 김관호의 작품 '해질녘'을 보고 감동하여 그와 같은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1928년 3학년이 되자 오지호는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로 유명한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교실로 들어간다. 그는 평소 후지시마 다케지의 작업과 인격에 감화를 받았다. 특히 그의 과묵한 성격과 인상파에 충실한 뛰어난 작품 역량에 매료됐다. 후지시마 다케지 또한 오지호의 능력을 인정하여 눈에 두고 있었다.

1929년경에는 마침 영친왕이 일본에 와 있을 때였다. 영친왕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후지시마 다케지에게 배우고 있었다. 한번은 영친왕이 도쿄미술학교를 방문하였는데, 후지시마 다케지는 그에게 오지호의 그림을 사도록 권유하였다. 그림 값을 생각보다 많이 주어 한동안 물감 걱정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 해에 도쿄미술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주경이 장석표 등과 함께 '녹향회(綠鄕會)'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단체는 민족미술 수립을 위해 노력한 민족적 색채가 강한 모임이었다. 오지호는 첫 창설 때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이듬해부터 참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녹향회도 1932년 제2회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해방 후 귀국 이후의 활동
 

오지호 ‘처의 상’ 1936 ‘오지호 작품집’(전남매일신문사, 1978) 재촬영 ⓒ 오지호

 
193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오지호는 한동안 고향 동복에 머물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그는 종로에 새로 생긴 동화백화점 광고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가족을 서울로 불러들이며 열심히 했으나 상업적 행위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인지 1년여 만에 그만둔다.

그때 마침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김주경의 연락으로 개성으로 가게 된다. 경성제일고보 출신인 김주경이 모교로 가며 뒷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그는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이곳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개성으로 오자마자 '오점수(吳占壽)'라 쓰던 이름을 '오지호(吳之湖)'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본명이 화가로서 좋아 보이지 않아 스스로 호를 지어 이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오지호는 개성에서 마음껏 자연의 풍광을 화폭에 담는다. 그 스스로도 훗날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라 말하곤 하였다.

송도고보 교사 시절 그는 김주경과 함께 방학이 시작되자 만주로 사생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2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이 여행은 그에게 생각을 넓혀주는 뜻 깊은 여행이었고, 이때 본 것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오지호는 이 시기에 위궤양으로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단식과 강한 의지로 극복하고 특유의 회화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1938년 친구 김주경과 공동으로 한국최초의 원색화집을 내는 대단한 성과를 이룬다. 이때부터 그는 '순수회화론'이란 미술론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미술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지호의 활동은 1940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전조가 시작되며 끝이 난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창씨 개명'을 요구하였다. 송도고보의 대부분의 교사들이 개명을 하였으나 오지호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오점수'란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 일로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찍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오지호의 활동도 어렵게 된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낸 후 1945년 결국 일본은 패망하고 한국은 광복의 환희를 맞는다.

광복 후 오지호는 김주경 등과 함께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는 등 해방기 화단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이념 대립이 이루어지며 화단의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화단의 분열에 회의를 느낀 오지호는 1948년 광주로 낙향한다.

그러던 중 마침 1948년 광주 조선대학에 당시 지방대학으로선 드물게 미술과가 설치된다. 당시 설립자가 오지호를 찾아와 교수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제자를 키울 욕심에 수락한다. 그는 순전히 예술가적 정열만으로 교수 역할을 하며 58년 그만둘 때까지 10년 동안 호남 예술을 이끌며 숱한 인재를 길러낸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 화집 '오지호ㆍ김주경 화집' 발간
 

'오지호ㆍ김주경 화집'의 표지와 속표지 (한성도서주식회사, 1938) ⓒ 황정수

 
오지호가 1938년 도쿄미술학교 동문인 김주경과 함께 화집을 발간한 것은 한국 미술사에 영원히 기록될 특별한 사건이었다.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이라 이름 지은 이 화집은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화집은 매우 호화로운 장정을 한 고급 화집이었다. 이 화집은 자비로 발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원색 화집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화집을 엮은 것은 오랫동안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함께 미술 공부를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 유학하여서도 모두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하여서도 차례로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미술교사를 역임하였다. 

화집 속에는 오지호와 김주경 두 사람의 작품 각 10점이 실려 있고, 오지호의 글 '순수회화론'과 김주경의 글 '미와 예술'이 실려 있다. 이 화집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 실린 작품이 현재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김주경 작품은 한 점도 전하지 않으며, 오지호의 그림은 '시골소녀', '임금원(林檎園)', '처(妻)의 상(像)' 등 세 점만이 전한다. 다행히 도판들이 모두 원색이라 원본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 미술 자료로 쓸 수 있어 더욱 중요하다.

화집 속 김주경의 초기 작품 경향은 서정적 사실주의에 가깝다. 인상파 경향의 화법이나 매우 밝은 색감을 주로 사용하고 있어, 그의 감정적 성향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1935년경부터 프랑스 인상주의 화법의 본질에 입각한 신선하고 밝은 색채와 빛의 미학에 따른 화면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오지호의 작업은 김주경에 비해 더욱 인상파 화법에 가까이 들어간 모습을 보인다. 한국 특유의 맑은 공기와 청아한 자연미를 명랑하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하였다.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 속에 들어 있는 오지호와 김주경 두 사람의 작업 모습은 1930년대 유럽의 인상파 화법이 일본을 통해 어떻게 유입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오지호의 후기 작품 경향
 

오지호 ‘내장산 설경’ 1975 ‘오지호 작품집’(전남매일신문사, 1978) 재촬영 ⓒ 오지호

 
오지호는 도쿄미술대학에서 공부하였지만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그의 스승 후지시마 다케지의 일본화 된 인상파 화법의 냄새보다는 오히려 조선후기 전라도에서 일어난 남종화 경향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은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후 낙향하여 새로운 그림 세계를 보인다. 그동안 그려왔던 원나라 화풍의 중국식 남종화를 버리고 조선적인 남종화를 그리려 애쓴 것이다.

산세나 물길을 그려도 소박한 조선적 풍경이 느껴지는 화면을 구성하였으며, 필치도 세련된 선의 구사보다는 투박하면서도 거친 느낌의 화면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후대 전라도 지역의 동양화풍의 중심을 이룬다. 이런 경향은 허련의 아들 허형에서 그 아들 허건에 이어지고, 방계 후손인 허백련의 그림에까지 이어진다.

이 중에서 특히 허백련의 화법은 오지호와 비교할 때,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차이는 있지만 추구하는 미술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허백련은 허형에게서 그림을 배우다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의 신남화(新南畵)를 배운다. 그러나 신남화를 배우는 것이 한국 정체성을 잃는다는 민족적 자각에 따라 귀국하여 다시 한국적 그림을 그리려 애쓴다. 결국 오랜 노력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만들어낸다.

오지호 또한 허백련과 마찬가지로 가장 한국적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위해 부단히 애쓴다. 특히 후기에 이르면 특별히 뛰어난 명승보다는 한국 어디에서나 늘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주변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을 그린다. 이런 평범한 소재를 그리면서도 다른 이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별격과 격조를 보여준다. 오지호의 붓 끝에는 별스럽지 않은 소재조차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오지호의 생애에서 1974년에 있었던 부인과의 유럽 여행은 그의 회화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그는 유럽을 다니며 본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는 이때 제작된 작품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 그의 회화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특히 독일 함부르크에서 본 항구의 풍경이나 프랑스 파리의 거리 풍경을 그린 작품들은 구성이나 색감 면에서 오지호 특유의 인상파 화법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보면, 오지호는 한 평생 그림에 빠져 그림을 위해 산 천생 화가다. 그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근대 화가들이 일본에서 인상파 화법을 단순히 수입하는 데 바빴으나, 그는 자신만의 변별적인 화풍을 만들어 내려는 데 애썼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에는 다른 작가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자연스러움이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런 자연스러움이 '한국적인 풍경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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