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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2.27 15:24 수정 2020.02.27 15:24
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년 전 사건을 지금 되돌아본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4월 14일 <오마이뉴스> 기사 ⓒ 오마이뉴스

 
3시간 전만 해도 이런 기사가 나올 줄 아무도 예상 못 하는 분위기였다. 2000년 4월 13일, 첫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날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산 북구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최용규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여의도 당사에서는 축배나 다름없는 캔맥주가 돌았다. 그러나 자정 무렵 상황이 역전됐고 이들은 결국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결국 삼수에 실패했다"라는 제목의 <오마이뉴스> 기사는 그렇게 나온 것이었다.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민주주의 정치 질서가 회복됐다. 그러나 제6공화국에서도 진보좌파가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1988년 총선부터 민중의당이 국회에 입성하려고 시도하고 다시 4년 뒤에도 민중당의 도전이 이어졌지만,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번번이 좌절됐다.

좌절의 역사는 2004년에야 마감됐다.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명의 당선자를 내며 원내정당, 그것도 제3당으로 떠올랐다. 이후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의 계보를 잇는 진보정당들이 계속 원내 교두보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번 제21대 총선에서는 진보정당운동의 오랜 염원이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부분적으로나마 도입된 선거제도 아래에서 또 한 번의 역사적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 시점에 지난 20여 동안 진보정당들이 원내에 진출하고 의석을 늘리기 위해 분투해온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특히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이 걸은 궤적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원내진출을 위한 피땀 어린 노력과 국회 입성 뒤에 노정한 뼈아픈 한계에서 2020년대 진보정당운동을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려면, 무엇보다 17대 국회 시기의 민주노동당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하다 2000년 1월 30일, 권영길 민주노동당대표(왼쪽에서 두번째) 등 지도부가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당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석 달 뒤에 실시된 제16대 총선에 후보를 냈지만, 이전 진보정당들과 마찬가지로 당선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의 분위기는 1992년 총선 패배 뒤의 민중당과는 크게 달랐다.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민중당에게는 없었던 한 가지 요소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였다.

1996, 1997년 노동법 개악 총파업을 겪고 난 뒤에 민주노총 안에서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방향에서 노사관계를 개악하자 이러한 각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과 지지를 결의했고, 민주노동당은 이 결정에 힘입어 출범한 정당이었다.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원외정당으로 머물더라도 버텨낼 힘이 생겼다.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들의 간부나 열성 조합원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노동당 당원이 됐다. 물론 민주노총 조합원 전체에 비하면 여전히 소수였지만, 일단 국고보조금 없이도 당을 유지할 만큼의 재정 기반은 마련됐다.

민주노총이 이렇게 적극 결합하자 민중운동 전반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그간 독자정당 창당에 한사코 반대했던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가들도 민주노동당에 속속 합류했다. 1980, 1990년대 민중운동을 통해 배출된 인사 가운데 '양김씨 정당'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은 모두 민주노동당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탄탄한 기반에 더해, 전에 없던 기회의 문까지 열렸다. 2001년 7월, 민주노동당 등이 기존 전국구 국회의원 선출 방식에 대해 낸 헌법소원에 위헌 판결이 났다. 이 판결에 따라 유권자는 지역구에 던지는 기존의 한 표에 더해, 비례대표 후보 명부를 제출한 각 정당에도 한 표를 행사하게 됐다.

민주노동당은 이 방식이 처음 도입된 200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선거에서 전국적으로 8.13%를 득표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새로운 제도에 따라 실시될 2년 뒤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할 가능성이 높음을 예고하는 결과였다.
 

2004년 5월 31일,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보좌진이 17대 국회 개원을 맞아 국회 본청앞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감사와 다짐'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이다. 천영세 의원단 대표가 '국민에게 드리는 감사와 다짐'을 낭독하고 있다. 앞줄에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보인다. ⓒ 이종호

 
그러나 이러한 기회 요소들만으로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거둔 극적인 성공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회 요소들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었던 커다란 위기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2004년 3월에 국회는 느닷없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명분 없는 탄핵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 시위에 나섰고, 정치 지형은 탄핵 반대와 찬성으로 양극화됐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양대 세력이 격돌하게 되면, 민주노동당 같은 소수 제3세력은 존재 자체가 무시되기 쉽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수구 세력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에도 반대했지만, 노동 문제나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노무현 정부와도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탄핵 찬반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된 시국에 과연 이러한 민주노동당만의 입장을 어떻게 대중에게 가감 없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이 어려운 과제를 '돌파'해냈다. 선거운동본부를 이끌던 노회찬 사무총장의 "판을 갈자"는 담론과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정책 구호가 이러한 돌파의 무기가 됐다. "판갈이" 담론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탄핵 정국의 혼란상이 한국 정치의 양대 독점 세력의 산물이며 따라서 이번에야말로 제3의 신진 세력을 선택해야 함을 설득할 수 있었다. 또한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를 통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는 경제적 평등의 실현이며 민주노동당이 그 대변자임을 설파할 수 있었다.

한 달만에 위기는 예기치 않은 대승으로 반전됐다. 4월 총선의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은 13.1%라는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며 제6공화국에서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이 됐다. 노회찬이 남긴 공개 일기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는 당시의 급박한 정황과 대응 양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2007년, 역사의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린 정당이 받은 심판 
  

2005년 5월 17일 민주노동당이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출범식을 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의제는 이후 민주당 등 다른 정당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 권박효원

 
민주노동당이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지향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에 진출했다면, 민주노동당의 활동은 마땅히 이 구호의 실현에 집중돼야 했다. 진보정당의 이상이나 본분을 따지기 전에 이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선거는 유권자로부터 어떤 위임을 받을지 확인하는 과정이고, 피선출자는 대의기구에서 무엇보다 이 위임을 첫째 기준으로 삼아 행동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는 많았다. 노력도 없지 않았다. "빈곤과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당의 모든 활동을 빈부격차 해소에 집중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이른바 4대 개혁(국가보안법 개폐 등)을 놓고 여당 열린우리당과 협력하는 데 치중하던 당내 주류에 맞서, 당시에 막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던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정부·여당에 대해 대결의 자세를 취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당력을 총선 때 약속한 바의 실현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러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고 대중에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4대 개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열린우리당 2중대가 돼도 좋다"는 말이 당 안에서 나왔고, 점차 당 밖의 많은 이들 역시 민주노동당을 이 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정의당이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리버럴정당 2중대' 프레임이 이미 이때 구축된 것이다.

"서민"의 자리에서 "부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민주노동당의 다른 얼굴들 역시 소중한 자산에서 무거운 짐으로 돌변했다. 창당의 버팀목이었던 민주노총의 지지가 그러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자 대기업-정규직이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주노총이 극우 언론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덩달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에 바탕을 둔 민주노동당 역시 "먹고살만한" 노동자들만 대변하는 정당이라 비난받기 시작했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 이후에도 2004년 총선에서 내걸었던 구호에 충실한 정치를 펼쳤다면, 이런 공세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07년 12월 18일, 대선을 하루앞두고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펼쳐진 명동 입구에서 한 지지자가 손가락으로 기호 3번을 나타내며 흥겁게 율동을 펼쳐보이고 있는 모습. ⓒ 최윤석

 
그러나 민주노동당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당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절체절명의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2007년 대선이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정부·여당은 잇단 개혁 실패 때문에 지지 기반이 급속히 와해됐다. 양대 정당 카르텔 정치에서 한 축을 맡아온 리버럴정당의 구심력이 전에 없이 약화된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승리가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진보정당은 바로 이런 순간에 대안으로 부상하려고 만든 정당이고, 원내진출 역시 그런 대안으로 떠오르기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려는 노력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에게는 이런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2004년 총선에서 배출한 10명의 국회의원들 중에는 리버럴정당과 대등하게 경쟁하면서 극우 보수정부의 등장에 맞서는 지도자 역할을 할 만한 새로운 인물들이 있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비전도 준비되고 있었다. 노회찬 의원은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제6공화국 경제사회체제를 넘어서자는 비전을 '제7공화국' 건설 운동으로 압축해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다. 정치 지형이 요동치던 그 순간에 대중의 열망을 새롭게 자극하고 결집하는 정치 행위를 감행하지 못했다. 기회는 무산돼 버렸다. 단순히 기회를 놓친 것만이 아니었다. 기회는 위기로 반전됐다.

2007년 대선에서 참담한 성적을 기록한 민주노동당은 곧바로 분당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이후 한국 사회 전체가 '잃어버린 9년'을 경과하는 동안 진보정당 역시 분당과 통합을 거듭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혼란, 분열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논평과 연구가 있다. 정파 문제에 대한 지적도 많았고, 당 구조나 제도도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기이자 요인은 역시 대중정치에서 보인 커다란 실패였다. 아무리 당 내 문제가 심각해도 대중정치의 시험들을 통과하면, 정당은 사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정치에서 실패하면, 그 실패를 극복할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면, 사망은 필연이다. 민주노동당은 첫 번째 원내 진출의 성과와 한계가 집약됐던 2007년 대선 대응에 실패했기에 결국 실패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첫 번째 원내진출의 한계와 실패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2020년 1월 20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국회에서 신년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남소연

 
아직 20여 년밖에 안 되는 민주노동당 이후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를 엄정하게 평가하기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필자처럼 이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이가 평가를 자임하고 나서서는 안 된다. 이는 철저히 후세대의 몫이다.

그럼에도 위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은 어쩌면 지금이 한국 진보정당운동에게 또 다른 '2004년 모멘트'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항쟁 이후의 정치 지형과 새 선거제도에 힘입어 정의당이 원내교섭단체 수준의 의석을 확보할 수도 있고, 원외에 머물던 녹색당 등이 새롭게 원내에 진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이 경험한 성공과 한계, 그리고 아쉬운 실패에서 교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이번의 진출 역시 똑같은 한계와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여의도 정치 문법의 포로가 되지 않고 선거 중에 내건 핵심 공약의 실현에 골몰하는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리버럴정당 2중대' 프레임에서 벗어나 양대 정당 카르텔 정치의 파괴자로 나서는 것, 제한된 지지 기반을 넘어 진보정치 지지연합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 이 모두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민주노동당이 답하지 못한 이런 물음들에 2020년대의 진보정치 주역들이 답해야 한다. 적어도, 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운명은, 반복될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장석준씨는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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