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9 08:11최종 업데이트 20.02.19 11:24
  • 본문듣기
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아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격주 수요일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으로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는 한국 언론에 대한 고발이자, 몸으로 경험한 '한국 언론 50년의 역사'다. [편집자말]
반세기 전인 1970년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나는 상당히 종교적이었다. 그 당시 내 마음의 한 자락은 동아일보사에 들어가서 쓴 '입사 소감'에 담겨 있고, 나의 첫 저서 <서울-워싱턴-평양>(2002년, 절판) 서문에, 그리고 이 책을 개정·보완한 <정연주의 기록-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2011년)의 도입 부분에도 있다. 이런 내용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려 온 세상은 물에 잠기고, 짙은 암흑에 묻혔다. 40일이 지난 뒤 비가 그치자, 노아는 암흑의 세상이 끝난지를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다. 얼마 뒤 비둘기는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왔다. 노아는 이를 보고 암흑시대가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노아에게 나뭇가지를 물고 온 한 마리 비둘기는 암흑으로 뒤덮인 노아 시대에 진실과 희망을 전해준 '언론'이었다. 나는 유신독재가 선포되기 2년 전 어둠이 짙어지던 때, 아주 조그만 한 마리 비둘기가 되겠다며 기자가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언론 행위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좀 더 나은 세상,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 정의, 인권, 평등, 평화, 생명의 가치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그런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직업과 역할을 통해 사회와 역사에 기여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이 언론이라 여겼고, 거기에 종교적 의미까지 부여했다.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세 잡지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현존>, 성서학자 김재준 박사의 <제3일> ⓒ 자료사진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1970년 전후, 나는 3개의 개인잡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1970년 4월 창간),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현존>(現存. 1969년 7월 창간), 성서학자 김재준 박사의 <제3일>(1970년 9월 창간)이다. 60페이지 안팎의 월간지였다.

매달 서점에 가서 이 조그만 잡지 세 권을 사들면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씨알의 소리>를 읽으면서 박정희 권력에 맞서 싸우는 광야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안병무 박사의 <현존>을 읽으면서 그분의 삶과 생각, 신학적 견해를 접하며 늘 경이로움을 느꼈다.

관념이 아닌 땀, 구체적 사건, 현존을 강조했던 그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박정희·전두환 군부 정권에서 두 번이나 한신대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 당했다. 그가 세계 신학계에 내놓은 '민중신학'은 그의 삶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의 글과 매주 일요일의 향린교회 설교, 그의 삶을 통해 나는 성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신화와 도그마에 갇혀 있는 죽은 신앙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뵌 적은 없으나 글을 통해 알게 된 김재준 박사의 글을 읽으며 앞서가는 성서신학자의 치열한 정신세계와 헌신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김재준 박사는 보수적인 개신교 교파 예수교 장로회에서 독립하여 진보적인 기독교 장로회(기장)를 만든 분이다.

이 세 분이 나의 삶, 나의 가치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믿어온 개신교 근본주의 교리의 속박과 억압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이들이 바로 이 세 분 스승이다.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 이야기>, <해방자 예수>, 그리고 김재준 박사의 <성서해설>은 지금도 자주 찾는 '고전'이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 함석헌
 

함석헌 선생 ⓒ 함석헌기념사업회

 
박정희 정권이 '언론파동'(언론 장악을 위해 만든 언론윤리위법을 둘러싼 정부·언론 간의 싸움) 이후 한국 언론을 거의 장악하게 된 1960년대 중반 이후, 당시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잡지는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였다. <사상계>의 필진은 한국 지성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박정희 정권을 향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인물이 함석헌 선생이다.

'비폭력 저항'을 주장하였기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함석헌 선생은 글과 언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임을 노린 1967년 5월 3일의 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월호 <사상계>에 '언론 게릴라 투쟁론'을 제기했다.
 
"이번 선거가 성공하든 또는 실패하면 그럴수록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론의 게릴라전이다. 국민의 양심을 대표하는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져 있다. 계획적인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의 전쟁 시대가 지나가고 게릴라전이 승부를 결정하는 바와 같이 언론에서도 대 신문, 대 잡지가 여론을 지배하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규군이 패퇴하면 그 패전 부대를 무수한 게릴라 부대로 재편하여 큰 부대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전국 구석구석에까지 파견하여 오히려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사상전(思想戰)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 정권을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새로운 희망이 솟아 나오지 않는다."

함석헌 선생의 '언론 게릴라론'을 다시 읽어보니, 요즘 1인 미디어 시대를 비롯한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반세기 전에 내다본 것 같다. 언론이 박정희 권력에 장악되어 제구실을 못하던 때 게릴라 언론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면, 지금은 거대한 진입장벽의 보호 아래 막강한 언론권력과 기자권력을 누려온 기성언론이 디지털 혁명으로 등장한 1인 미디어, SNS 등 '게릴라 언론'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언론의 생명인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한국 언론을 조금이나마 제 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언론 안팎의 충격이 필요한 때, 함석헌 선생이 갈망했던 '게릴라 언론'이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기성 언론의 성벽을 허물고 있다. '멋진 신세계'를 여는 빛과,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는 어둠의 양면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박정희 정권의 압박에 시달리던 <사상계>는 결국 1970년 5월,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빌미가 되어 폐간되었다. 이미 <사상계>의 비극적인 종말을 내다 본 함석헌 선생은 늘 주장하던 '언론 게릴라전'의 일환으로 스스로 잡지를 만들었다. <사상계>가 폐간 조치되기 한 달 전인 1970년 4월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씨알의소리 ⓒ 씨알의소리

 
'씨알'은 원래 종자(種子)를 뜻하는데, 함석헌 선생은 민(民)을 '씨알'이라 표현했다. 단순한 '사람'(man)이 아닌,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는 존재로서 민(民, people)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창간호에서 밝혔다. 함석헌 선생은 '나는 왜 씨알의 소리를 내나'라는 제목의 창간사에서 특히 당시의 신문을 질타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 씨알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 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일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사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불매 운동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끼리 서로 씨알 속에 깊이 파고들어야만 합니다. 내가 몇 해 전에 사상의 게릴라전을 해야 된다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규군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유격대는 못 당합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서 이 글을 읽었을 때 충격은 컸다. 그리고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라는 그 구절이 내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데 종교와도 같다는 언론,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있다는 그 언론이 지금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언론의 지금 모습에 대해 현직 의사 이주혁씨는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기생충'이 누구인지 이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언론과 미디어였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살고 있는 시민들에 빌붙어 살고 있는 진짜 해충, 기생충들이었다."



정연주의 기록 -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

정연주 지음, 유리창(201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