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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3.27 13:49 수정 2020.03.27 14:57

프레스크섬 주립공권 ⓒ 강인규

 
저는 공원 호숫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이기에, 평상시라면 카페 탁자 위에 컴퓨터와 찻잔을 놓고 앉아 있었을 테지요. 지난 주까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즐겨 찾던 찻집은 좌석을 모두 없앤 뒤 포장용 주문만 받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정부가 내린 행정명령 때문입니다.

현재 도시의 모든 극장이 문을 닫았고, 오케스트라 등 공연단체는 올해의 일정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슈퍼마켓과 식료품점도 영업시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카페에 갔던 날, 근처의 슈퍼마켓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과 마주쳤습니다. 육류와 냉동식품 진열대가 텅 비어 있던 것입니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이틀 뒤, 슈퍼마켓 육류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 ⓒ 강인규


어느 나라에서 왔든, 미국 슈퍼마켓에 처음 간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무지막지한 물건들을 누가 다 사?" 게다가 미국 상점은 재고관리 하나는 철저해서, 선반에서 물건이 빠져나가면 어느새 귀신같이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국 슈퍼도 공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휴지와 키친타월 선반 위에도 선택받지 못한 물건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앞에는 '고객당 3묶음씩만 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이후 숫자 '3'은 곧 '1'로 바뀌었습니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나이 지긋한 직원에게 "과거에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백발이 고운 그 분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60년대 이래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분은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들키고 말았네"하고 웃으며 영수증을 건넸습니다.

주지사는 지난 주말에 '생존에 필요한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문을 닫을 것'을 지시하는 강화된 조처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 주립대학도 폐쇄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학생들은 한주 전부터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교수와 직원들은 계속 출근했습니다. 저도 이제 집에서 수업을 해야 합니다.
 

평상시 선반 위에 가득 놓여있던 빵이 비상사태 이후 한꺼번에 팔려나갔다. ⓒ 강인규


미국, '느긋함'에서 '허둥대기'로

금요일 저녁, 연구실에서 노트북과 출석부를 가져오기 위해 학교로 갔습니다. 기척이 사라진 교정이 좀비 영화 <28일 후>의 시가지를 방불케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심지의 밤은 유독 컴컴했습니다. 상점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도로의 차도 확연히 줄어 있었습니다.

반가운 장면이라곤, 주유소 앞에 내걸린 휘발유 값뿐이었습니다. 사업장들이 시간을 단축하거나 중단한 데다가, 이동 자제, 금지, 국경 폐쇄 등으로 여행이 끊긴 탓에 유류소비가 대폭 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되레 생산을 늘리는 상황까지 발생했지요.

하지만 행동 반경이 줄어든 만큼, 차에 기름을 채울 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의 상황은 보름도 안 돼 극에서 극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사력을 다해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던 2월 말, 트럼프 대통령은 안일하다 못해 천진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사라질 거예요.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질 거라니까요."

2월 27일, 트럼프가 "상황이 완벽히 통제되고 있다"면서 "별 걱정 안 한다"며 한 말입니다. 미국에 코로나바이러스가 다른 나라보다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정확히 한국과 같은 날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이 이 상황을 심각히 받아들인 반면, 미국 정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지요.
 

'코로나19' 관련 기자 질문 받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2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AP


이러던 백악관이 정확히 보름 뒤인 3월 13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다수의 병원에는 진단키트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대통령은 비상사태 선포 일주일 전부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사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사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연락을 취한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3월 말인 현재까지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나타나도 승인을 받은 환자에 한해 선별적 검사가 이뤄지고 있고, 무엇보다 의료진은 병상 수와 진료용 마스크, 장갑, 산소마스크 등의 의료장비 부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 새 확진자와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비상사태 선포 당일까지도 미국의 확진자는 (한국의 4분의 1도 안 되는) 17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열흘 뒤인 23일에는 4만3천 명을 넘었고, 사망자도 550명 이상으로 증가해, 한국의 4배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인 26일 현재(미국 시간), 확진자는 한국의 10배 가까운 8만 5500여명으로, 그리고 사망자는 1300명으로 늘었습니다. 사망자는 아직 중국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확진자 수에서는 이미 중국을 넘어섰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휴교, 행사 취소, 공공시설과 영업장의 제한과 폐쇄 등의 적극적 조치를 취한 것을 볼 때, 환자의 가파른 증가세는 검사 확대가 가장 큰 원인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소극적 대처 당시 감염된 환자들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공원의 모든 시설이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문. ⓒ 강인규

 
미국, 제2의 이탈리아가 될까, 한국이 될까

미국의 보건 전문가들은 두 가지 가능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최상의 시나리오'로, 한국, 싱가포르, 대만 등의 사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가장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나 대만은 한국에 비해 인구도 적고, 최근 들어 2차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2차 확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요.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국보다 많은 사망자를 낸, 이탈리아의 안타까운 사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3월 26일 현재(현지시간), 이탈리아의 확진자는 8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8200명을 넘어섰습니다. 확진자 수는 중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했고, 사망자는 무려 두 배 반이나 됩니다.

당연히 미국은 한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만찮은 장애물과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이탈리아를 바짝 뒤쫓는 미국이 한국 쪽으로 방향을 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과 '이탈리아'의 어느 뒤를 따를지를 분석한 <뉴욕타임스>의 기사 ⓒ 뉴욕타임스

 
우선 널리 알려진 미국의 민영화된 의료체계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무료로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긴 했습니다만, 의사와 병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막대한 치료 비용은 둘째치더라도, 그에 앞서 치열한 '입원경쟁'부터 뚫어야 합니다. 현재 뉴욕 주에서 코로나 환자 8명 가운데 1명만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상황을 말해 줍니다.

미국인 한 명당 의사와 병상 수는 이탈리아보다도 적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입니다만, 기대수명은 78.6세로(2017년 기준), 한국이나 이탈리아보다 4년 이상 낮습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을 '사회주의 의료시스템'이라며 불온시해 온 것이 첫 번째 원인입니다.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국 중 28위에 머물지만, 놀랍게도 미 정부의 보건지출은 압도적인 1위입니다. 시민들의 세금이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대형병원, 의료업체, 제약회사, 보험사 등 영리기업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며 의료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듯 (한국의 전체 병상 수에서 공공병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보다 낮습니다), 미국에서도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마스크, 방호복, 장갑 등의 의료용품과 의료장비의 생산을 국유화할 것을 연방정부에 요청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트럼프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앞으로 펼쳐질 상황은 미국 의료제도의 치부를 드러낼 것이고, 이는 의료제도 개혁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장을 보던 한 남성이 빈 선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강인규

 
공원에서 퇴근하며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갑니다. 이제 컴퓨터를 접어야겠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제게도 소중한 깨달음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삶의 구석구석이 타인과 연결된 이 세상에서,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나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동안 제게 찻집, 식당, 마트 등에서 일상적으로 도움을 베푼 직원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이었는지 마음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손길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고, 경제도 활발히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온라인 경제'니, '디지털 세상'이니 하며 침을 튀겨도, 사람의 손과 발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 곁에 편지 한 장도 도착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물리적 관계 속에서 느끼는 충만함을 인터넷은 흉내조차 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제가 온라인으로 강의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점입니다. 이처럼 그동안 당연시해 온 일상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한국 시민들이 촛불 이후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저력입니다. 국경 차단이나 지역 봉쇄 등의 조치는 말할 것도 없고, 극장, 공연장, 식당 등의 강제 폐쇄도 없이 사태를 진정시켜 온 한국의 모습은 국제사회에 큰 교훈과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대처방안을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대응하면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낼 수 있다'는 희망까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랜 싸움으로 지쳐갈지는 모르나, 앞으로도 잘 싸워 가시리라 믿습니다. 한국인이 희망을 잃는다면, 그 어느 나라도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도 공원으로 출퇴근하면서 응원하겠습니다.

멀리서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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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