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 07:42최종 업데이트 20.04.0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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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생 여자아이 두 명이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사서 골목길에서 나누어 마신다. 그런데 때마침 주변을 지나던 고등학교 남학생 5명이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한다. 남학생들은 며칠 뒤 "술을 마신 사실을 학교에 이야기하겠다"고 협박해 둘을 동네 뒷산으로 불러낸다. 여자아이들은 하는 수 없이 부름에 응하고, 그 자리에서 강제로 술을 마신 뒤 현장에 있던 11명 중 4명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두 명의 여자아이는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무서웠지만, 신고는 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몰래 숨어서 술이나 마시니 그런 꼴을 당하지, 어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오밤중에 누가 부른다고 쫓아나가,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너 정말 억지로 당한 거 맞아? 네가 먼저 꼬리친 거 아냐? 따위의 말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8일 뒤에 가해 남성들로부터 다시 한번 연락이 온다. 지금 당장 그때 그 장소로 오라고. 오지 않으면 학교에 다 소문내겠다고. 온 동네에 다 이야기하겠다고. 결국 같은 장소에 다시 한번 나간 여자아이들은 거기서 또다시 성폭행을 당한다. 이번에는 22명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좀 그만 쓰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2011년 9월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5년 후에야 전모가 밝혀졌으며, 검색해 보면 아직까지 기사가 남아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아주 놀랐는데, 그 까닭은 범행 자체보다 범행이 행해진 방식 때문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범죄? 성착취는 늘 있었다
 

2004년 12월 11일 저넉 7시께 네티즌 200여 명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모여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에 대한 경찰의 철저한 재수사를 촉구하는 '촛불행사'를 열었다. ⓒ 최윤석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사건은 그 방식 면에서 2004년 있었던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사회적 기준에서 '일탈'한 여자아이를 꾀어내서 강간을 한 이후, 강간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로 다시 협박하고, 그 협박을 빌미로 수십 명이 수십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성을 착취했다는 지점에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들 또한 집을 나온 여중생을 성폭행 한 뒤 성폭행 사실을 빌미로 협박하여 다시금 폭력을 가했다. 가담자는 총 44명에 이르렀다. 아마도 신고를 하지 못해 보도되지 않고 묻히는 다른 수많은 강간 사건이 비슷한 형태로 일어날 것이다.

이번에 밝혀진 n번방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엽기적이고 잔인한 범죄가 있을 수가 있냐며, 저런 악마 같은 놈들이 있냐며 경악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라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n번방은 늘 있어 왔다. 단 한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일탈'한 여성 청소년을 강간하고, 강간 사실을 빌미로 협박을 한 뒤, 성노예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성착취를 한 사건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있어 왔다. 여성 청소년에 한정된 방식이 아니라 여성이 성을 착취 당하는 방식이 늘 그래왔다.

오래전 '빨간 마후라'로 불리는 비디오가 청계천에 돌아다니던 때에도, 여성 연예인들이 연인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인터넷에 유포된 때에도,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고인의 불법촬영물이 여전히 'OO대 OO녀'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떠돌던 때에도, 역시나 지금은 고인이 된 여성 연예인이 성관계 동영상을 뿌리겠다는 옛 연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빌던 순간에도,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만 장소가 오프라인에서 끝나지 않고 온라인까지 확장되었을 뿐이다. 불법촬영물이 유포되는 인구와 범위가 점차 넓어졌을 뿐이다. 가해자들이 불법촬영물에 남기는 흔적이 피해자의 몸에 칼로 '박사'라고 새기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눈이 벌건 남자들이 영상을 구한다며 돌아다니는 곳이 청계천 뒷골목에서 텔레그램 단톡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처럼 그 본질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범행이 일어나는 방식, 성이 착취 당하는 형태, "아니, 난 또 순진한 여학생들 억지로 꿰어낸 건 줄 알았지, 자기들이 먼저 문제가 될 만한 사진을 올렸는 줄은 몰랐네, 저렇게 빌미를 주면 안 되지" 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범행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의 처지까지도.

왜 가해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는가?
 

조주빈 검찰 송치, 강력한 처벌 촉구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음란물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3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호송차에 태워져 검찰로 송치되는 가운데,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빨간 마후라 사건의 피해자는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가정에서는 쫓겨나서 성매매 여성이 되었으나, 거기에서도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밀양 사건의 피해자는 결국 학교에서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갔으나, 전학을 간 곳에서도 가해자 부모들의 합의해 달라는 위협과 협박에 시달리고 학교에 소문이 나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2011년 일어난 집단 강간 사건의 피해자들도 끝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그밖에 수많은 불법 촬영물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악몽과 트라우마에 여전히 시달린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썼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앞날이 창창하다는 이유로 선처를 받는다. 약물에 취한 여성을 강간하여 영상을 촬영한 뒤 온라인에 유포했음에도 얼굴이 나오지 않게 찍었다는 이유로 정상이 참작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그렇게 선처를 받아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한다. 그리고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아, 그 시절에는 진짜 철이 없었지 하며 웃을지도 모른다.

n번방 사건은 하루 이틀에 걸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이코패스나 악마와 같은 인물 한두 명이 엽기적인 일탈 행각으로 벌인 것이 아니다. 이제껏 수없이 일어났던 성착취 사건과 사건에 대한 안일한 대처를 비료 삼아 차곡차곡 성장해 왔다. 성폭행 사건 가해자에 대한 안일한 판결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n번방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러운 요즘, 의약품 업체인 종근당 회장의 장남은 불법으로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SNS에 올렸음에도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피해자들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았으며, 본인이 스스로 영상을 삭제했다는 점,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시 한 번 적지만, n번방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이 연결고리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제3의, 제100의 n번방이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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