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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5.30 11:45 수정 2020.05.30 11:46

지난 1991년 11월 5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노해씨 부인 김진주씨가 항소심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 연합뉴스

 

흐린 하늘에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김진주는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 미아리 현대백화점에 오전 10시경 도착했다. 이제 막 문을 연 매장은 공기가 차가웠다.
 
김진주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를 때 밖에서 부산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데 "올라가는 중"이란 말이 김진주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미행을 당했나? 아님 엄마가? 엄마라면 집이 도청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도 잠시, '땡' 소리와 함께 10층 문이 열렸다. 김진주가 한발을 천천히 내미는데 심장이 쿵쾅거려 발걸음이 흔들렸다. 엄마가 커피숍에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떨리는 마음을 달래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는 가는 천둥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때 "잡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세네 명이 달려들면서 김진주의 입을 틀어막고 양팔을 움켜잡았다. 김진주는 "너희 뭐야"하며 몸부림쳤다. 탁자가 '쿵' 넘어가고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엄마도 놀라 "야, 이놈들"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박노해 부인 김진주가 잡혀갑니다, 신문사에 알려주세요"하고 외쳤다. "야, 여기도 잡아가"하는 소리에 제보해 달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금방 끊기고 말았다.
 
박노해 어딨어?

김진주는 흠칫 잠에서 깼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이지만 무슨 미련이 남아선지 종종 꿈에 나타나는 1991년 2월 28일 장면이다. 창문으로는 겨우 별빛 한점만 가냘프게 들어와 베갯잇을 비췄다. 잠은 깼지만 꿈의 잔영은 또렷했다. 그날은 긴 고통의 시작이었다.
 
"박노해 어딨어?" 미아리에서 연행돼 첫 번째 받은 질문이었다. 김진주가 도착하자 남산은 들썩거렸다. 연행조에게 박수를 치고 수고했다며 서로 격려했다. 당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검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진주를 박노해와 다른 중앙위원 검거의 핵심 고리로 보았다. 

피검될 당시 김진주는 사노맹 중앙위원 직책과 지하인쇄소 책임자에서 물러나 발령대기 상태였다. 때맞춰 인쇄소도 보안상 김진주 모르게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데 "유럽풍 건물에 먹자 골목"이라는 얘기를 뜻하지 않게 들었을 뿐이다.
 
잡혀간 처음 삼일 동안, 어머니가 소리쳐 <한겨레> 신문에 보도가 된 덕이었는지 매타작이나 손찌검은 없었다. 대신 그들은 다섯 명이 한 조로 3교대를 하며 잠을 안 재웠다. 그런데 중부서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나서부터 수사 강도가 달라졌다. 잠을 못 자 몸은 천근인데 "어서 불라"며 쪼그려뛰기와 오리걸음을 시켰다. "야, 이년아 빨리 뛰어..."하며 계속 욕지기도 퍼부었다. 남으로부터 욕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김진주는 그게 주먹보다 더 아팠다.
 
견디다 못해 멱살을 잡고 대들었다. 세찬 매가 날라왔다. 김진주는 바닥에 쓰러져 "니들이 뭔데 나를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하면서 흐느꼈다. 김진주는 혀를 깨물었다. 힘을 다해 물었지만 혀는 잘려지지 않았다. 울고 있는 김진주의 귀에 "박노해 어딨어? 말해 봐 재워줄게"라는 음성이 뱀같이 파고들었다.
 
그때 김진주는 "자기 입에서 중요한 사실이 나올 수 있다"는 두려움에 중앙위원을 지키자면 다른 것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이 범벅되고 졸린 눈으로 설핏 들은 인쇄소 이사 위치를 진술했다.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웠다.
 
김진주는 꿈의 여진을 털어내느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땀도 훔쳐내고 머리도 추스렸다. 불을 켜니 3시 반, 새벽 예불 준비하기에는 일렀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도 그때의 기억은 이어졌다.
 

이진암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 풍경 옥녀봉에 자리잡은 이진암 일출은 장관이다 ⓒ 민병래

 
"아, 나 때문에 잡혔구나"

김진주는 안기부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넘어가자마자 20여 일간 단식을 했다. 물도 안 마셨다. 구치소에서는 김진주의 어머니를 특별면회 형식으로 그의 방까지 안내해 강제로 링거 주사를 맞게 했다.
 
김진주의 가슴이 무너진 것은 그가 잡힌 날로부터 열이틀 뒤인 3월 12일, 박노해가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김진주가 준 단서를 가지고 안기부는 서울 전역을 뒤졌고 기어코 가락동사거리 뒤 비밀인쇄소 위치를 파악했다. 결국 (김진주가 체포된 이후) 인쇄소 관리를 직접 맡은 박노해와 정주용·이중섭·최성철 등 실무 조직원들이 붙잡히고 말았다.
 
안기부에 있던 김진주는 잠결 복도 먼 곳에서 환청처럼 울리는 박노해의 음성을 느꼈다. 수사관들이 들락거리며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메모에서 박노해의 글씨를 발견하고 "아, 나 때문에 잡혔구나"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복도 너머 그 목소리는 자신이 잡혀왔음을 알리는 진짜 목소리였던 것이다. 함께 잡힌 인쇄소의 어린 동지들은 사노맹 선전물을 찍기 위해 철야도 자주하고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 흔한 감자탕 한번 제대로 못 사준 걸 생각하니 죽고만 싶었다.
 
김진주는 홍성교도소로 이감가서야 마음을 조금씩 추수렸다. 영등포구치소에 먼저 잡혀있던 '노동해방문학' 동지들이나 여타 보안사범들이 "국가보안법 철폐하라"고 옥중투쟁을 전개할 때도 그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단식이 강제로 중단된 이후에는 "그런다고 바뀌나?"하며 허무주의와 패배감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홍성에 가니 "언니, 탄원서 좀 써주세요?" "진주씨, 항소이유서 좀 써줄래요?" 거기 있던 열네명의 여죄수들이 김진주를 의지하며 다가왔다. 고맙다고 독방에 있는 김진주에게 삶은 계란을 주기도 하고 식당에서 김치를 훔쳐다 주기도 했다. 낮에는 "운동하세유"라며 교도관들이 사방문을 따주면 구수한 충청도 햇빛을 친구삼아 배드민턴을 쳤다. 밖에 있는 애인에게 '기다려달라'는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가졌다. 그렇게 꼬박 4년을 살고 1995년 5월1일 석방되었다.
 
김진주는 새벽 예불상을 차리고 법당에서 나왔다. 멀리 남해바다에 아침햇살이 부서졌다가 다시 모이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어둑새벽에 비꽃이 후두득 내린 탓인가. 거제 앞바다는 진청색 물감으로 분탕질한 듯 파랬다. 김진주는 바다를 바라보며 간밤의 꿈 탓인지 다시 상념에 잠겼다.

 

김진주가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 그는 무심코 바다보기를 좋아한다. ⓒ 김진주제공

 
김진주는 출소해서 박노해를 만나러 경주교도소에 갔다. 5년여 만에 보건만 시간은 불과 5분뿐. 면회소를 나서는 발걸음은 허허로웠다. 남편은 먼 산을 바라보며 "나에게 아무 기대도 말고 자기의 길을 가라"고 했다. 무기수이고 언제 나갈지 기약할 수 없는 몸이니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켰으리라. 사실 남편과는 피검 전에 보안상 이유도 있어서 별거했다. 그 탓인가, 마음도 멀어졌었는데... 서울행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 5월인데 마른 낙엽이 발에 채이고 바람은 스산했다.
 
경주에서 박노해와 첫 면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김진주는 곧바로 '박노해석방대책위' 활동을 시작했다. 존재적 결단을 이끌어 준 동지였고 새로운 글쓰기의 세계를 열어준 스승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박노해를 꺼내놓아야 김진주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게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위대한 긍정'을 만나다

이화여대 약학과 74학번이었던 김진주는 78년 명동에 있는 백병원 약국에 취직했다. 평범한 약사의 길을 흔든 사건은 77년에 있었다. "글쎄, 너희 오빠가.."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종 오빠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된 소식을 전했다.
 
그 일은 백병원의 약사 김진주를 경동교회로 이끌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세력은 새문안이나 향린같은 교회 울타리 내에 있었다. 조희연, 문성현, 정현경 같은 사람들이 움직이던 때였다. 경동교회에서 김진주는 '젊은 둘째'라는 청년부에서 '루카치'를 읽었다. 숙명여고에서 '데미안'을 읽으며 성장했던 김진주는 뭔가 도움되는 일을 찾고 싶었다. 애쓰는 청년부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사고 싶었다.
 
그때 청년부 회원이 군대 가면서 향린교회에 다니던 박노해를 소개시켜줬다. 둘이 사귀라는 건지 자신이 제대할 때까지 노동자 청년을 잘 관리(?)하라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첫 만남 장소 '가스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심난했다.
 
23살 김진주는 덕수궁에서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대한문 앞에서 만나 말없이 오래도록 걸었다. 연록색 은행나무 향이 두 사람을 오가며 말 좀 하라고 보챘다. 봄바람이 저녁 노을을 불러올 때쯤 김진주는 21살 박노해의 얘기에 푹 젖어들었다. 며칠 후 박노해는 김진주에게 '위대한 긍정'을 만나 기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82년 10월 13일 김진주는 집안을 설득해 박노해와 결혼했다. 신혼집은 경기도 안양의 버스 종점. 김진주는 남편의 권고를 받아들여 약사에서 구로공단의 여공이 되었다. 가죽봉제공장 '와이비리상사'에서 본드칠을 하고 망치로 두드리는 시다와 미싱사 일을 5년간 했다. 숨쉬기도 힘들고 손마디가 부르트며 쩍쩍 갈라지는 노동이었다.
 
백병원에서 약사로 일할 때는 월 30만 원을 받았다. 봉천동에서 잠시 약국을 열었을 때는 항상 손님들로 붐볐다. 구로공단에서는 하루 열두 시간 일해 겨우 6만 원을 받았다. 6년 동안 여공의 처지는 늘 똑같았다.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진주는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그때 남편은 안남운수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운전기사로 승진하기 전 짬이 있었을 때 그는 종일토록 시를 썼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라는 '노동의 새벽' 구절도 이때 쓰여졌다. 버스회사 정비일이 막차가 들어오면 시작해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났던 까닭이다. 박노해는 이런 시를 김진주에게 보여주며 평을 요청했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 숙명여고에서 문학상을 받았던 그에게 여전히 낯선 정서였다.
 
풀빛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는 수배되었다. 그런데 '노동자' 박노해는 버스회사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파업을 벌였고 수배가 되었다. 결국 이중 수배 처지가 되어 집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김진주도 공장을 나와야 했다.
 
이후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했고 김진주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박노해와 함께 혁명적 조직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 11월 사노맹 출범에 참여했고 피검되기까지 지하 인쇄소의 책임자이면서 선전업무를 맡아 '노동해방문학'에 '한승호'란 필명으로 고정기고를 했다.

나눔밥상을 차리다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있던 김진주는 새벽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제 장승포에서 지세포로 넘어가는 길, 왼쪽으로는 바다가 일렁이고 그 물결을 헤치며 부산항에서 제주도 가는 뱃길이 분주하다. 그 오른편에 바닷가 앞에서 돌연 솟구친 옥녀봉이 있고 그 중턱에 이진암이 자리하고 있다. 김진주의 고모가 창건한 작은 사찰, 김진주는 박 시인과 함께 '나눔문화운동'을 하다가 2009년 이곳으로 왔다.
 
박 시인은 경주교도소에서 1998년 석방되자 김진주에게 '나눔문화운동'을 제안했다. 생태재앙·전쟁과 기아·영혼의 상실이 '문명사적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전위운동, 계급운동에서 벗어나 문화와 시민이 중심이 되고,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시민운동, 7년 징역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며 '동지적 동행'을 요청했다.
 
김진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나눔문화에서 기획위원을 맡았다. 사단법인 설립작업을 하고 회원모집 사업과 포럼 기획을 했다. 처음에는 5~6명이 시작했지만 2008년에 이르러 연구원은 30여 명이 되었고 후원회원도 2000명을 넘어섰다. 김진주가 여기서 특히 노력했던 일은 나눔밥상이었다. 
 

나눔 문화는 월례포럼이 끝나면 밥상나눔을 했다. 김진주는 이 밥상을 담당했다. ⓒ 김진주제공

 
월례 포럼이 끝나면 나눔문화회원들은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김진주는 목판 쟁반에 나무그릇을 올리고 김치와 나물, 고기반찬, 계절반찬으로 밥상을 꾸몄다. 또 단풍잎을 씻어 그 위에 두부김치전을 올리고 홍합국물을 곁들여 막걸리 안주를 내놓기도 했다. 김진주는 "소박하고 깊은 맛을 추구하는 밥상, 꿈과 생명의 밥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향기롭게 익어가겠지요"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았다. 포럼 사나흘 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알맞게 익은 김치'를 상에 내려고 '살벌'하게 일했다.
 
그렇게 8년, 나눔문화의 리더십은 박 시인이었다. 젊은 연구원들도 많이 성장했고 밥상도 궤도에 올랐을 때 김진주는 '동지적 동행'을 마치고 '자신의 자리'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가방 하나를 꾸려 이진암으로 왔다.
 
새벽 한기에 몸을 움츠렸던 김진주는 머릿결을 다듬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수행차 몇몇 보살이 이진암에 온다. 한 끼 밥상을 정성스레 준비해야 한다.

구로공단에서 6년 동안 미싱공을 하면서 늘 배고팠다. 징역 생활 5년 그저 목숨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정성이 없는 교도소 밥에 진저리를 쳤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면서 정겹고 따뜻한 밥상을 꿈꿨다. 이를 나눔문화에서 '밥상나눔'으로 작게나마 실천했다. 이진암에서 와서 "정성스레 밥을 짓는 일은 사랑의 실천이고 공평하게 밥을 나누는 일은 정의의 실천"이라는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

김진주는 오늘 청국장을 대접할 생각이다. 청국장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맛은 깊고 조미료 없이도 오묘한 맛을 내는 음식이다. 황교익은 "청국장을 끓일 때 과한 양념은 외려 맛을 죽인다"고 했다. 김진주도 공감한다. 김치, 파, 두부만 있어도 충분하다. 도마에 올려 두부를 자르니 물컹 미끄러져 들어간다. 주방으로 들어온 오월 햇빛이 칼등으로 살포시 내려온다. 배추김치는 얄팍 썰고 파는 비스듬히 어슷 썰어 뚝배기에 담았다. 도마에서 '통통'하며 울려오는 리듬이 사랑스럽다. 이제 보글보글 냄새를 피어올리면 된다.
 
작년 겨울에 담근 배추김치는 묵은지가 되었다. 부엌동자 아니랄까봐 김진주는 이진암에서 일년 내내 김치를 한다. 김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을에는 지레김치를, 이른 봄이면 푸성귀로 얼갈이 김치를 만든다. 5월에는 열무를 다듬어 절이김치를 담갔다. 올해는 둥둥이김치도 좀 하고 배추나 무를 널찍하게 썰어 섞박지도 할 요량이다. 거제 앞바다의 짠 바람이 한 점 들어가면 맛은 더할 나위 없으리라.
 

이진암에서 장독을 돌보는 김진주 김치와 청국장을 좋아하는 김진주는 장을 소중히 여긴다. ⓒ 김진주제공

   
김진주는 말 중의 말이 시(詩)라면 맛 중의 맛은 김치라 생각한다. 김치 앞에서 겸손하고 김치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 김치를 버무리는 그의 손길은 합장기도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김진주가 준비하는 밥상은 이런 김치 한 보시가 곁들여질 때만이 완성된다. 어느 결에 청국장이 보글보글 끓는다. 이제 점심 나절 도착할 도반들과 음식과 웃음을 나눌 생각을 하니 절로 기쁘다.

점심 준비를 마치고 김진주는 다시 법당으로 올라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태, 아버지는 벌써 15년이다. 요즘 부쩍 두 분 생각이 나 치성드리는 느낌으로 백팔배를 하고 있다.
 
나눔문화 일이 한참 바빴던 2003년, 김진주의 아버지 김해수는 병마에 시달렸다. 김진주는 마지막으로 해드릴 효도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아빠 인생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엔지니어로서 국산라디오 1호 '금성A-501'를 설계했다. 이 라디오는 지금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그 덕에 박정희로부터 '대통령산업포장'이란 훈장까지 받았다.
 

김진주와 부친 아버지는 펄 벅의 이름을 따 진주, 김진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김진주제공

 
아빠는 당신이 좋아하던 작가 펄 벅의 이름을 빌려 '진주', 김진주라는 이름을 외동딸에게 지어주었다. 덕분인가 부산의 파도소리 남포동 시장의 활기를 원고지에 담아 문학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딸과 약국을 운영하는 게 꿈인 아빠의 뜻에 따라 국문과 대신 약대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라듸오

그런 아빠와 많이 다퉜고 미워했다. 약사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는 딸을 아빠는 이해 못했다. 밤새워 두드려 맞기도 했다. 당신이 갔던 길만 옳은 양 늘 타박했다. 그러나 아빠는 '노동자 사위'를 받아들였다. 김진주가 구속되었을 때 당신이 운영하던 신기상역으로 국세청 관리 30명이 들이닥쳤고, 부당한 세무조사로 1억8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아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런 아빠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아빠의 일대기, 엔지니어의 현대사였다. 글을 시작할 때는 세상에 널리 알리기보다 대화를 한다는 마음이었다. 아빠가 꼭지별로 초고를 써서 보내주면 김진주는 수정할 부분을 표시했다. 아빠는 수정한 원고에 '고맙다, 수고시켜서 미안하다.'는 메모를 곁들여 다시 글을 보냈다. 매주 한 번씩 만났고 이야기는 넘쳐났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1년여에 걸쳐 육필원고를 남기고 두 눈을 감으셨다.
 
김진주는 이를 다듬어 3년 상을 맞는 2007년에 아빠에게 헌정하는 '아버지의 라듸오' 초판을, 2016년에는 개정판을 냈다.
 
 

김진주가 머무는 이진암 법당 모습. ⓒ 민병래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백팔배를 드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김진주는 절을 드리며 앞으로를 구상한다. 고모가 2012년에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김진주는 뜻하지 않게 이진암의 대표가 되었다. 김진주는 이제 이진암을 수행문화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쉬고 싶을 때 와서 쉬고, 어떤 프로그램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명상하고 싶으면 명상하는 그런 장소였으면 한다.
 
물론 따뜻한 밥 한끼, 소박한 밥 한끼를 빼놓을 수 없다. '이진암 밥상'만 잘 차려내도 지친 영혼에게 이 곳은 소중한 공간이리라. 그래서 김진주는 스스로를 이진암의 법적 대표라기보다는 절집에서 밥을 하는 공양주 보살, 부엌동자라 자처한다.
 
김진주는 언제가 박 시인 어머니의 삶을 '어머니의 꽃밭'으로, 친정어머니의 삶을 '어머니의 덧버선'으로 써서 두 분에게 글로 지은 밥상을 올리려 한다. 김진주에게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은 아마도 전생의 업보였나보다.
 
백팔배를 마치고 법당문을 나서니 절집 마당에 파도소리, 웃음소리가 드높다. 손님들이 벌써 온 모양이다. 김진주는 부엌으로 가서 청국장에 불부터 지폈다. 
 
<김진주가 걸어 온 시간들> 
 

나눔문화 시절 김진주 한참 밥상나눔 일에 빠져있을 때다. ⓒ 김진주제공

   

2006년 경주에서 박 시인을 면회했던 경주를 2006년 다시 찾았다. ⓒ 김진주 제공

   

2007년 제주에서 제주바닷가와 오름은 그녀가 자주 찾는 곳이다. ⓒ 김진주제공

 
 

2016년 아버지의 라듸오를 재발간했다. ⓒ 김진주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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