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2 18:59최종 업데이트 20.06.2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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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준공식 참석한 아베 총리 ⓒ 연합뉴스/EPA


현재 한일관계는 외형상 일본 쪽으로 기울어 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나오자, 일본 정부는 경제보복 카드로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성착취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일본은 모르쇠 같은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은 일본의 의도대로 작동되고 있다.
 
자위대가 점점 자위'군'으로 변하고 군사대국화가 노골적으로 진행되며 미일의 동맹이 긴밀해지는 가운데, 이처럼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안하무인 격이 되고 있다. 한일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1965년 체제' 속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1945년 일제 패망으로 한일관계는 중단됐다. 무역은 4년 뒤 재개됐지만, 양국 정치관계는 1965년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뒤에야 가능해졌다. 그 이후로 두 나라 관계는 한일기본조약을 축으로 굴러가고 있다. '1965년 체제'가 55년간이나 한일관계를 지탱해왔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조약을 거부했다. 그에 대항하는 저항 투쟁도 매우 극렬했다. 그것은 조약이 한국에 불리할 뿐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마저 건드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지배 사실을 사과·배상하기는커녕 도리어 '한국이 이익을 봤다'고까지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 조약이 강행되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얼버무린 국가간 조약
 

1965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 ⓒ 동아일보

 
유쾌하지 못한 느낌은 이 조약이 체결된 장소에서도 풍겨났다. 1965년 6월 22일 조인식이 열린 곳은 일본 국회의사당 맞은 편의 수상 관저였다. 당시 일본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는 이 관저를 좋아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음습한 느낌을 내뿜는 공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부터 1965년까지의 일본 총리 10명 중에서 이 집에 제대로 거주한 사람은 사토 한 사람뿐이었다. 총리들이 관저를 기피한 것은 이곳이 '도깨비집'이나 '유령의 집'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 때인 1929년 세워진 이 관저가 그런 별명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해 1977년 5월 21일 치 <경향신문> 기사 "일(日) 수상관저 텅빈 도깨비집"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수상관저는 역사상 두 번에 걸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하나는 1932년 5월 15일 젊은 해군 장교들이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기 위해 반기를 들고 나섰을 때이다. 당시 이누까이 쓰요시 수상관저에 침입한 해군 장교들에게 '서로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나 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장교들은 '얘기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대로 수상을 사살한 일이었다.
 
그 후 1936년 2월 26일 젊은 황군 장교를 비롯, 1천 4백 명의 무장군인이 정부의 대폭 개편을 촉구하기 위해 반기를 들고 나서 수상관저와 국회의사당을 며칠간 점령하고 재무장관을 비롯한 몇 사람의 요인을 살해한 일이 일어났다. 그후부터 수상관저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시작했다."
 
'도깨비집'에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은, 한국인들한테는 그 내용마저 우울했다. 전체 조문이 7개밖에 안 되는 이 조약은 35년간의 식민지배 문제를 모호한 방식으로 비켜갔다. 두 민족 간의 최대 현안인 식민지배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겠다, 저렇게 정리하겠다 하는 규정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문제의 제2조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한일기본조약 조문 중에서 과거사에 관한 규정은 이것뿐이다. '식민지배가 불법이다' '식민지배를 사과한다' '피해를 배상하겠다'가 아니라 '1910년 8월 22일까지의 조약이 이미 무효'라는 내용만 규정한 것이다. 1910년 8월 22일의 한일병합조약 등이 무효임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던 것이다. 1965년 당시의 일본이 한국 지배권을 더는 갖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를 봉합했던 것이다.
 
35년간의 식민지배를 명확히 해결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그 뒤 양국에서는 제2조의 해석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해당 조약들이 1910년 8월 22일부터 무효'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1910~1945년의 일본 지배는 불법이 되고 한국이 사과·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반면, 일본에서는 '해당 조약들이 1945년 해방 이후로 무효'라는 해석이 나왔다. 1910~1945년의 일본 지배를 합법화하는 해석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이 사과하고 배상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해석이 이렇게 갈리게 된 것은 처음부터 애매하게 규정해놨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과 사토 정권이 머리를 맞대고 그런 식으로 조약 문구를 짜냈던 것이다.
 
2016년에 <일본연구논총> 제43호에 실린 김웅희 인하대 교수의 논문 '한일기본조약의 의의와 한계: 한일관계 50년의 성찰'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구 조약의 무효확인 문제는 합방 이후 무효라는 한국 주장과 해방 이후 무효라는 일본 주장이 각각 다른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놓은 셈"이라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조문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은 '한국인들은 다 끝난 문제를 툭하면 들고 나온다'며 불만을 표시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조의 모호함에서 증명되듯 양국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애매하게 규정해놨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태도가 아니라 기본조약의 모호함이 한일관계를 저해하고 양국관계를 갈등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그 같은 한일기본조약을 무기로 내세우며 '식민지배 문제는 다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의 갈등과 대립을 끝내려면 기본조약을 개정하거나 재(再)제정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기본조약이 그만큼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극단적인 대립 양상의 주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흐름
 
하지만 다행스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흐름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나오는 공식 성명들의 궤적을 추적해 보면, 일본 정부가 제2조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흐름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제2조가 공정하게 해석되거나 아니면 기본조약 개정의 필요성이 부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 흐름에 대해 낙관적 기대를 가질 수 있다.
 
1990년대 이래로 일본 정부는 일련의 담화를 통해 식민지배의 문제점을 점차적으로 인정해왔다. 1993년 고노 담화는 위안부 강제동원이 피해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군의 직간접적 간여로 이뤄졌으며 피해자들을 참혹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잘못된 국가의 정책으로 인해 전쟁으로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트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한국을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1998년 '21세기 한일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 제2조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아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고 선언했다.
 
한국 강점 100주년에 즈음해 죄스러운 마음을 표시한 2010년 '간 나오토 담화'는 3.1운동의 의의까지 평가하면서 식민지배를 또다시 사과했다. 민주당 정권의 간 나오토 총리가 발표한 이 담화의 서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올해는 한일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

위와 같은 일련의 담화가 식민지배 자체의 불법성을 시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10~1945년에 일본이 잘못한 일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했다. 그래서 이런 담화들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교묘히 피해간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에 영향을 줄 만했다. 이런 담화들의 기조가 계속 이어지다 보면 '해당 조약들이 1945년 해방 이후로 무효'라는 식의 해석이 발붙일 곳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아베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베 신조는 그런 담화들을 부정하려 애쓰고 있다. 그는 특히 고노담화를 부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면서도, 그 담화들을 전면적으로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련의 담화들이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에 점차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들을 그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신조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파국을 우려하는 미국의 입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폭주를 저지하는 근본 원인은 1990년대 이후의 시대적 대세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핵심 동맹국인 미국이 1990년대 이후 점차 약해지는 한편, 한국인들의 정치적 역량과 한국의 경제·군사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미일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일련의 담화들을 유도하는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당장은 한일관계가 암울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낙관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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