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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6.26 11:10 수정 2020.06.26 15:57
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대면 경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이 판단은 옳을까? 30만 년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전염병과의 싸움이었으며, 유럽 인구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 14세기 흑사병 이래, 홍역, 콜레라, 소아마비, 말라리아, 폐렴, 천연두, 에이즈 등을 겪으면서도 접촉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접촉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통을 연구하는 커뮤니케이션학자로서, 우리가 코로나 사태에서 놓치고 있을지 모를 몇 가지를 살피고자 한다.[기자말]
 

코로나 사태로 인해 ‘비대면 기술’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원격수업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비대면 교육이 위기상황에서 임시대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다른 나라보다 앞서 ‘육성’하고 ‘선점’해야 할 경제논리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대면 교육이 가져올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을 고민할 때가 왔다. 비대면 연결의 피상적 관계가 젊은 사람들의 공감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 공개자료

 
성착취물이 사회문제로 부상하기 몇 년 전, 인터넷 게시판에서 충격적인 영상을 보았다. 교통사고 장면을 ('움짤'이라 부르는) 지아이에프(GIF)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올린 게시물이었다. 영상 속에서는 도로를 건너던 여성이 자동차에 치이는 순간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도로를 질주하던 차가 어린 몸을 무자비하게 덮친 뒤 피해자가 땅에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이었다.

피해자는 10~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사망하지 않았더라도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였다. 이 끔찍한 영상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줄줄이 달려있는 댓글들이었다. 낄낄거리고 키득대며 피해자를 조롱하고 있었다. 심지어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글까지 올라와 있었다.

나는 사이트 이름을 살펴봤다. 주소창이나 배너에서 '일베' 따위의 이름을 보았다면 덜 놀랐을까? 하지만 아니었다. 젊은 남성들이 즐겨 찾는 이 게시판에는 '멀쩡한' 글도 상당수 올라와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할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나는 한동안 혼란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변태'니, '싸이코'니 하는 말을 자주 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힐난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정상'인 자신을 '비정상'인 그와 구분지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애초에 '우리'와 다른 존재들이니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까닭이다.

내가 사이트 이름을 확인하고 싶었던 데에는 이런 심리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이런 구역질나는 짓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잔인한 게시물과 섞여 있는 다른 글에서 내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성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을 나와 구분되는 '비정상'의 영역으로 간단히 몰아넣기는 어려웠다.

그날 이후, 사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게시물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치적 지향성과 상관없이, 특히 젊은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보라니'라고 불렀는데, 여성 성기의 앞자에 '고라니'를 더해서 만든 말이다.

충격적인 영상, 줄줄이 달리는 댓글
 

온라인은 공감이 작동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심리적 거리감과 소통의 장애로 인해 인터넷은 교감을 어렵게 만든다. ⓒ 공개자료

 
나는 이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서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이 말이 꼭 여성을 지칭한다기보다 '보행자' 전체를 아우른다는 점을 애써 설득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여성들 사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피해자들도 가끔 등장한다는 항변을 곁들였다.

두 번째는 게시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피해자들을 두고 '조롱받을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나무위키>의 해당항목은 이 용어에 여성혐오가 담겨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무단횡단하는 주제에 정작 봐야 할 곳은 안 보고 앞이나 반대편 차로, 심지어는 스마트폰만 보면서 직진하는 보행자를 짐승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어다."

원래 혐오에는 늘 '이유'가 따라붙는다.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인데, 이는 역으로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만큼 근거가 희박함을 말해준다. 설사 여성만이 아닌 '보행자 일반'이 터무니없는 실수로 사고를 당한다고 해도, 다치거나 죽는 사람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들은 부주의하게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짐승'에 빗대어 놀리지만, 사실은 짐승이 차에 치어 죽는 장면도 눈뜨고 보기 어려운 게 사람이다. 사슴, 개, 고양이가 자동차 바퀴에 깔리는 것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공감능력을 타고 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아니다. 원숭이나 침팬지 역시 다친 동료의 상처를 핥아주고 환자의 보폭에 맞춰 행진 속도를 줄이며, 심지어 실험실의 쥐조차 다른 개체가 주사바늘이나 칼에 찔려 아파하면 덩달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공감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는 능력이다. 남의 손가락이 문 사이에 끼는 것을 볼 때 내 표정이 일그러지고, 주사바늘이 남의 피부를 찌르는 것을 보기 고통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감능력은 같은 종 사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지만, 나와 완전히 다른 종에게도 널리 작동한다. 고통 당하는 동물을 보기 안쓰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내 안의 유인원>에서 새를 돌보던 침팬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물 유리창에 충돌해 떨어진 새를 발견한 침팬지는 새가 건강을 회복해 날아갈 수 있을 때까지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주었다.

그런데도 우리 중 일부는 같은 사람의 몸이 부서지고 피를 쏟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공감능력이 반 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공감은 감소, 자기애-조급-폭력성은 증가
 

미시간의 연구는 한 세대 사이에 공감능력이 반토막이 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Konrath

 
미시간 대학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조사를 해 오고 있다. 해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청년들의 공감능력을 측정하면서 변화 추이를 살피는 것이다. 설문지에는 15개의 주요문항이 담겨 있는데,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부당하게 이용당하는 사람을 보면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끔 친구를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어떤 것이 옳다고 확신하면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질문을 보면, 공감능력이 단지 '관대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넘어, 공동체의 존속과 민주주의 기본원리까지 포함돼 있다. 공감능력이 사람뿐 아니라, 군집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나'의 무리는 서로를 파괴하며 소멸해갈 수밖에 없다.
 

미시간 대학의 연구는 18세에서 25세의 사람들에게서 공감능력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Konrath

 
안타깝게도 1979년부터 2009년의 30년 사이에 청년들의 공감능력은 48%나 감소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미시간 대학의 연구는 이 기간에 자기애(나르시시즘), 인내 부족, 타인에 대한 적대행위와 폭력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한국사회가 목격하고 있는 피해자 조롱,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과 살해, 인터넷 성 착취 역시 이러한 공감상실의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빨리 공감능력을 잃어버렸을까? 그래프에서 보듯, 공감능력은 서서히 줄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까지 70-80년대 수준을 유지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추락했다. 다시 말해, 공감 상실은 2000년대 중반 이래 발생한 최근 현상이다.

새라 콘래드 교수는 여러 연구를 종합해서 이 시기에 발생한 변화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① 사람들이 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됐고 ② 혼자 있을 때면 고독감이나 소외감을 강하게 느끼며 ③ 타인 없이 견디지 못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언어와 신체적 학대, 집착, 통제, 허위, 기만행위는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비대면 연결과 공감의 상실

2000년대 이후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사회현상은 단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다수의 학자들이 핵심적 변화요인으로 지적하는 게 있다. 바로 '비대면 연결'의 증가다. 2004년에 페이스북이 나왔고, 2005년에 유튜브가 선보였으며, 2006년에는 트위터가 등장했다.

콘래드 교수는 2012년에 새 논문 '공감의 역설: 연결 증가 시기의 단절 증가'를 발표했다. 이제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뿐 아니라 먼 나라의 낯선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대표적 학자는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셰리 터클 석좌교수다. 그는 <홀로 함께 있기 Alone Together>와 <대화의 회복 Reclaiming Conversation>에서 "'연결'을 '대화'로 착각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인터넷과 인공지능 시대의 공감상실을 다룬 셰리 터클의 책들. 그는 피상적 연결이 현실의 대화와 교류를 대신할 수 없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 Turkle

 
인터넷을 통한 피상적 연결에서 타인은 공감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목하고, 동의하고, 칭찬함으로써 자기애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그런 내 의지에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상대에게는 손쉬운 '강퇴', '삭제', '끊기', '차단'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비대면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이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성급하고 폭력적인 통제력을 발휘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이 문제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공감'이 '자기애'와 역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서 '자기애'는 단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과다한 존경 요구, 상대의 감정 무시나 무감, 자신과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는 등의 인격 장애의 한 형태다. 소셜미디어가 '자기애'의 공간이라는 점은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겠지만, 줌 등의 화상교육이나 회의에서도 유사한 면이 발견된다. 예컨대 화상대화에서 사람들은 남들보다 자신의 얼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원격수업의 문제를 다루면서, 화상을 통한 원격대화가 어떻게 공감을 차단함으로써 소통을 방해하는지 분석했다. 대화하는 두 사람은 상대방의 빠르고 미묘한 표정, 몸짓, 음성이 변화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감지하면서 의사교환을 한다. 하지만 '촬영-압축-전송-수신-압축해제-재생'의 매개과정을 거쳐야 하는 비대면 통신에서는 비언어소통이 지연되거나 왜곡되며, 그로 인해 심각한 피로, 오해, 소외, 우울감을 낳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대면 소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피상적 유대'가 공감능력을 파괴하는 지경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충분한 대면소통을 해온 가족들이나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런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공감부재는 단지 소통만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행복과 공동체를 위협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장소에 있지만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 ⓒ GH Cassel

 
미디어학자 마샬 매클루언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말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달하는 내용의 의미와 효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그는 '원자폭탄에 쓰인 글씨'를 비유로 드는데,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적어 날려 보낸다 해도, 폭탄이라는 매체의 효과가 상쇄되지는 않는다.

나는 비대면 교육을 '폭탄'이라고까지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것이 가져올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효과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비대면 연결'이 공감 상실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현실에서, 단지 '혁신'이나 '기술 선점'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비대면 교육 확대'를 강행해서는 안된다.

태블릿 교재나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를 교육에 적용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에서 '인건비 절감'을 새 시스템 도입의 동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하지만, 불행히 한국은 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기간제 교사를 늘려온 것도 모자라, 초중고 담임의 절반 이상을 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교육이란 더불어 사는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공감능력 개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반공감 매체'를 통한 '공감 교육'은 가능할까?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공감능력을 사회 속에서 잃게 될까?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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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