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6 12:23최종 업데이트 20.06.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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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검색창에 '혁명'이라고 써 봤다. 혁명은 무엇인가. 혁명에 대한 짧은 사전적 설명 아래로, 줄줄이 '4차 산업혁명'을 설명한 내용들이 보인다.

혁명. 누구나 이 단어를 처음 입으로 소리 내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그 무겁고 형이상학적 단어를 입으로 오물거리며 나는 혼자 저기 머나먼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닌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인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4.19, 그 한가운데 놓인 화신상
 

4.19 전망대에서 바라본 4.19 추모공원 전경 ⓒ 권은비

 
북한산 순례길에는 삼다(三多)가 있다. 나무, 풀, 그리고 무덤이다. '개발제한'이라고 쓰여진 오래된 시멘트 말뚝을 지나 순례길에 오르면 10분 이내에 4.19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다. 전망대에 오르는 순간 무수한 무덤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에는 '4월 학생 혁명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자그마치 높이 21m의 화강석으로 만든 탑이다. 참배하는 위치에서 정면을 보면 탑의 안쪽에 '화신상'이 보인다. 6명의 무리가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서 있는 형상이다. 조형물 앞에는 4월학생혁명기념탑 비문이 새겨져 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6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이 비장한 문장들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화신상은 자연스럽게 4.19 혁명 중 숨을 거둔 젊은 혼들, 즉 수호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이 동상은 한국 전형적인 동상의 계보와는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현대 조각의 다양한 표현방법과 해석방식과는 달리, 한국의 동상들은 인물을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형상화해 제작된 것들이 대다수다. 한국 동상의 표현방식은 매우 일관되게 사실주의적으로 편향돼 있다. 더불어 그러한 동상들 중, 많은 작품은 서구의 아카데미 조각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서양적 인체 조각비율에, 동양인 얼굴을 어색하게 조합한 기형적 형태로 존재한다.

고백하건대, 과거 무지했던 나는 수유동 국립 4.19 민주묘지의 화신상을 한국에 존재하는 공공미술 작품 중 수작으로 손꼽았었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작가 김경승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예술작품의 배신
     
김경승(1910~2001)의 작품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앞서 언급한 4.19 민주묘지의 화신상뿐만 아니라, 인천의 맥아더 동상, 경남 거제의 옥포대승첩기념탑, 부산과 통영에 있는 이순신 동상, 과거 덕수궁에 있다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된 세종대왕 동상, 전북 정읍의 전봉준 동상,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이 김경승의 작품이다. 이 외에도 그가 만든 동상은 한국 곳곳에 서 있다.

김경승은 분명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였다. 1930년대 말까지 일본 유학을 하고 각종 상을 휩쓸었던 각광받는 예술가였다. 4.19 민주묘지의 상징조형물 공모에서도 수많은 경쟁 예술가를 물리치고 김경승의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 당시 김경승의 성취를 보며 젊은 조각가 차근호(1925~1960)는 낙담해 스스로 생을 끊어버렸다.


분단, 전쟁, 광복, 4.19 혁명 등 굴곡진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그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예술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미술계에서 김경승은 큰 거물이자 권력이 됐다. 이후 김경승은 친형이자 화가인 김인승과 나란히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김경승이라는 이름은 유명한 사전에도 선명하게 기재돼 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오랜 회원이었다. 1942년, 그는 조선미술박람회에서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총독상을 수상했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노력하겠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4.19 민주묘지의 대표적 참배 위치에 친일행적 예술가의 작품이 놓여 있는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땅 위에 축조돼 왔는지를 보여준다. 나의 머릿속은 혁명과 추모, 친일 예술가와 예술작품 사이에서 혼란스러운데, 북한산 순례길의 4.19 전망대에서 바라본 4.19 민주묘지는 속절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곧이어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을 외쳤던 이시영 선생의 묘소와 17위의 광복군 합동 묘소,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 열사의 묘역이 나왔다. 해방과 혁명을 외치던 사람들은 이 땅에 묻혀 말이 없는데, 김경승의 화신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허겁지겁 걸으며 큰 길가로 나오니 근현대사 기념관 앞에 애국열사의 매끈한 흉상들이 나란히 서 있다. 순례길 초입부에 들어서며 내 입으로 중얼거린 '혁명'은 온데간데없고, 어지러운 동상의 형상만 머릿속에 남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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