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3 10:30최종 업데이트 20.07.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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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장례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논란에 엉뚱하게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소환되고 있다. 발단이 된 것은 지난 11일 종합정보 사이트 <클리앙>에 올라온 댓글이다.

댓글이 실린 원래의 글은 '안철수 때문에 와이프랑 애 앞에서 펑펑 울었어요'라는 글이다. 이 글에 실린 댓글이 논란의 발단이 됐다. 버**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용자의 댓글 중 일부다.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라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 그를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가요?"
 

본문에 인용된 댓글. ⓒ 클리앙

  
이 댓글을 비판하는 댓글들이 많았다. 피해자인 서울시 공무원을 관노에 빗대는 것이냐는 댓글이 주류를 이뤘다. 강제성 유무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관노(官奴)는 남성, 관비(官婢)는 여성인데 이순신이 동성애자였다는 거냐는 댓글도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일부 언론이 익명의 댓글 하나를 여권의 대표여론인양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여권 지지층에 대한 비판 보도가 확산됐다.


일례로, 12일자 <연합뉴스> 기사 '박원순 두고 난중일기 소환... 진중권, 피해자가 관노인가'는 위의 클리앙 댓글을 소개한 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12일자 페이스북을 인용했다.

<연합뉴스>는 "피해 여성은 관노가 아니다", "친문과 그 지지자들이 국민을 바라보는 시각을 노골적일 정도로 정직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친문의 눈에는 국민이 노비로 보이는 것"이라는 문장을 인용한 뒤, "우리들도 어느새 잡놈이 됐다"며 운동권 전체를 비판하는 진중권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기사를 끝맺었다.

조선시대에도 여성 관노비와 관료의 사적 만남은 법으로 금지됐다. <경국대전>과 더불어 법률 기능을 했던 <대명률직해>는 "관리가 기생이나 악기를 다루는 여성과 혼인하여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만들면 곤장 60대에 처하고 이혼시킨다", "관리가 기생의 집이나 행실이 음란하고 방탕한 여성의 집에 묵으면 관리를 곤장 60대에 처한다" 등등의 규정을 두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생'은 관노비 중에서 관기 보직을 받은 사람이다. '기생'은 국가에 의해 공인된 예능인인 관기를 가리켰다. 조선시대 관료 상당수는 철학자들이었다. 유교 성리학자들인 이들은 도덕적 수양에도 힘써야 했기 때문에 행동거지에 특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형법적으로도 훨씬 엄격한 제약이 가해져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도 관기와 사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관기를 첩으로 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법의 영역이 아닌 사실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모험이 필요한 일이었다. 공공연히 대놓고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기장에 함부로 남길 만한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라고 해서 관료가 관기를 쉽게 사귀었으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극이나 역사 소설에 나오는 상황이 실제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관기들과의 교제를 솔직히 털어놓았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엉뚱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난중일기에서 '관노'는 이렇게 언급됐다

음력으로 정유년 4월 21일(양력 1597년 6월 5일)이었다. 이 날, 이순신은 문제의 '관노' 집에서 잠을 잤다. 그 날짜 <난중일기>의 전문은 이렇다.
 
"21일 신사일. 아침 일찍 출발해 은원(恩院, 은진현 내)에 도착하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 거래 일로 사진포(思津浦 혹은 恩津浦, 은진현 포구)에 왔다고 한다. 그 모습이 극히 기만적이었다. 저녁에는 여산(礪山, 전북 익산시 여산면) 관노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슬픔과 설움을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일기에 따르면, 관노비 집에서 자긴 했지만 관비가 아닌 관노의 집이었다. 남자 노비 집에서 잤던 것이다. 그리고 "한밤중에 홀로 앉으니"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동 중에 관노비 집의 방 하나를 빌려서 숙박을 해결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여성 관노비들과의 관계를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관계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난중일기> 한자 원문이 아닌 한글 번역본을 봤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갖게 됐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순신이 음력으로 병신년 9월 12일(양력 1596년 11월 1일)에 여진(女眞)이라는 여성과 "잤다"거나 3일 뒤 여진과 "두 번 관계했다"고 적어놓은 번역서가 있다. 하지만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여진이란 글자가 원본에 정말 있는 건지, 있다면 그것이 사람을 가리키는 글자인지, 사람을 가리키는 글자라면 그 사람이 여성인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전혀 없다. 일부 번역자들이 이를 여성 이름으로 단정하고 그렇게 번역해놓았을 뿐이다. 2015년에 <해양담론> 제2호에 실린 김주식 국립해양박물관 부관장의 논문 '이순신의 여인들과 관련된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여진의 실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진'과 관련된 문구가 <난중일기> 초고본에 기록되어 있는 형태와 '여진' 이후의 글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여진'이 사람을 지칭하는지조차 불분명하며, 사람을 지칭한다고 하더라도 계집종이나 관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번역본은 '여진이란 여성 관노비의 이름이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한다'는 점을 근거로 <난중일기>의 여진도 여성 관노비일 거라는 추정을 제시했다.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이란 종족이 각종 문헌에 훨씬 더 많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진과 두 번 관계했다'는 번역도 문제점이 많다. '여진' 뒤의 글자를 함께 공(共)으로 보는 이도 있고, 스물 입(卄)으로 보는 이도 있고 서른 삽(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난중일기> 원문. 별표는 '여진'으로 번역된 부분들이다. 이 원문 이미지는 김주식 부관장의 논문에서 캡처했다. ⓒ 김주식, 문현

  
'공'으로 보는 이는 '여진과 함께 잤다'로 번역한다. '함께했다'로 번역해야 하는데도 '잤다'를 추가해서 '야릇하게' 번역해 놓은 것이다. 한편, '입'이나 '삽'으로 보는 이는 '여진과 몇 회 관계했다'로 번역한다. 스무 번과 서른 번으로 번역할 수 없으니, 두 번과 세 번으로 번역해놓은 것이다. 자의적인 번역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여진 다음의 글자가 '공'이 아닌 '입'과 '삽'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해석에도 재고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이 문구는 비밀스런 사항이나 중요한 특이 사항을 자신만 알 수 있도록 기록해놓은 문구인 것으로 생각된다."

글자 자체가 불명확하므로, 현재로서는 어떤 학설이 맞는지 확단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순신이 부인이나 첩 이외의 여성과 잠자리를 함께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내용이 <난중일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설상의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또 1596년에 최철견의 딸인 최귀지(당시 14세)가 이순신의 근무처에 와서 숙박을 했다는 <난중일기> 기록에 대해서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번역서들도 있다. 최철견은 당시 광주목사였으며, 최철견의 막내딸일 가능성이 큰 최귀지는 훗날 인조 임금의 장모가 됐다. 효종 사후에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까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의 그 대비가 바로 최철견의 외손녀인 장렬왕후 조씨(자의대비)다.

현역 장군이 광주목사의 미혼 딸과 관계를 갖는 것은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인조 임금의 장모가 소녀 시절에 이순신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면, <난중일기>는 진작 불태워져 없어졌을 것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최귀지가 이순신 근무처에 온 그날 최철견이 관직에서 파면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최귀지의 행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개(介)라는 글자가 이순신과 사귄 여성일 거라는 전제 하에 번역된 책도 있다. 이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물론 이순신이 부인이나 첩 이외의 여성들과 사귀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이다. 입증할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 해도 이순신이 그것을 일기에 적어뒀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명률직해> 위반행위의 증거를 스스로 남길 정도로 이순신이 순진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데릴사위 생활을 오래 했던 사람이다. 처가가 이순신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처가를 항상 의식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외도 사실을 일기에 잔뜩 적어놓았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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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프리미엄 김종성의 '히, 스토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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