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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8.12 11:36 수정 2020.08.12 11:36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이후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외교전략 논쟁이 치열했던 때가 많다. 고구려 때인 612년 살수대첩 직후에도 그랬다. 국운을 건 이 논쟁에 고구려인들은 명운을 걸었고, 논쟁의 격화 속에 라이벌 대결의 양상이 나타났다. 살수대첩의 주역인 을지문덕과 훗날의 영류태왕(태왕이 정식 칭호)인 왕제(王弟) 고건무가 그 중심에 섰다.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612년 제1차 고구려-수나라 전쟁 때, 을지문덕은 육상 전투를 지휘하고 고건무는 해상 전투를 지휘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만일 전공의 등급을 매긴다면, 왕제 고건무가 을지문덕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건무가 이끄는 수군이 당나라의 양곡 수송선을 침몰시킨 것이 전세가 고구려에 기우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그 근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을지문덕을 수훈갑으로 기억한다. '살수대첩'의 한 방이 그처럼 강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있다. 613년 제2차 전쟁에 이은 614년 제3차 전쟁 때부터 이들이 반대편으로 갈라져 대논쟁을 벌였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말한다.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의 행방
 

살수대첩 상상화.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3세기에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하기 전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유라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은 오리엔트(북아프리카+중동+남동유럽)였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문명권은 오리엔트에 다음가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동아시아에서 수나라가 최강대국의 지위를 점했다. 후한(부활한 한나라)이 멸망한 서기 220년 이후 분열과 혼란에 빠졌던 중국을 589년에 통일한 국가가 수나라다. 그래서 612년 살수대첩 직전의 수나라는 220년 이후의 동아시아에서 보기 힘든 역대급 최강국이었다.
 
그런 수나라 군대를 대파한 수훈갑으로 알려진 을지문덕이다. 그냥 대파한 정도가 아니라 수나라를 휘청거리게 했다. 고건무가 받아야 할 찬사까지 덤으로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30만 수나라 별동대 중에서 2700명만 살아 돌아가도록 했으니 살수대첩 하나만으로도 을지문덕은 기념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에 관한 역사 기록이 이상하리만치 적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도 김유신 열전 다음에 을지문덕 열전이 배치돼 있고 을지문덕 열전의 내용이 적지 않은데도, 그가 살수대첩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을지문덕 열전은 "을지문덕은 그 계보가 상세하지 않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 뒤 곧바로 612년 전쟁을 상세히 서술한 뒤 그냥 끝나버린다. 수나라 별동대 중에 2700명만 생존했다는 이야기를 한 다음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고 격찬한 뒤 끝맺는다. 수나라를 휘청거리게 하고 중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명장이 그 뒤 어떻게 됐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동사강목>과 <조선상고사>에 들어 있다. 안정복과 신채호의 설명을 들어보면, 살수대첩 2년 뒤인 614년에 을지문덕과 고건무의 라이벌 대결이 있었고, 이때 벌어진 대논쟁의 결과로 을지문덕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을지문덕.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제1차 전쟁에서 결정적 참패를 당해놓고도 수나라는 613년에 이어 614년에도 전쟁을 도발했다. 제3차 때인 614년 수나라 군대는 침공을 감행해놓고도 섣불리 진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 협상 문제가 급부상했다. 바로 이때 을지문덕과 고건무의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해상잡록>이라는 역사서를 근거로 두 사람의 논쟁을 갑파 대 을파의 구도로 설명한다.
 
신채호가 을파로 부른 을지문덕파는 차제에 국가 전략을 수정할 것을 제의했다. 427년에 장수태왕이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래, 고구려는 중국과 대결하기보다는 백제·신라와의 경쟁에 치중했다. 서쪽 중국에 대해서는 수비에 치중하고 남쪽 백제·신라를 공략하는 서수남진(西守南進) 전략을 지향한 것이다.
 
을지문덕파는 수나라를 물리친 여세를 몰아 서수남진 전략을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창검을 신라·백제에서 중국으로 돌리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이렇게 말한다.
 
을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천이 험해서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힘들며 인민들도 강고해서 좀처럼 굴복하지 않지만, 중국 대륙은 이와 달리 평원과 평야가 많아 군대를 움직이기 좋고 인민들도 전쟁을 무서워해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동요한다'면서 '장수태왕의 서수남진 정책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라·백제에 대한 공략을 거두고 대(對)중국 압박에 주력하자는 주장은 고조선의 후예들과 힘을 합쳐 수나라의 패권 정책에 맞서자는 말이었다. 수나라의 국력 약화가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을지문덕파는 동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쪽을 지향했던 것이다.
 
애초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는 수직적인 사대 관계였다. 수나라의 통일 이전에도 고구려는 북중국의 강대국을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국력을 인정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수나라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취했다. 이런 상태에서 수나라가 노골적인 팽창정책을 시도하자 그에 맞서 고구려가 군비 강화를 추진한 것이 양국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사대관계에 익숙한 고구려 보수세력은 수나라를 대파해놓고도 수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은 을지문덕파의 전략 수정 제안을 반대했다. 수나라보다 백제·신라를 더 압박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갑파는 '남방의 신라·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중국에 대해 겸손한 언사와 공손한 예법으로 화친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이제까지 중국에 대해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수년간의 전쟁을 초래했으니, 앞으로라도 정책을 바꾸어 수나라와 화친을 하자'고 주장했다.
 
보수파는 수나라의 팽창 정책이 전쟁을 부른 게 아니라 그에 대한 고구려의 강경 대응이 전쟁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이 수나라의 팽창정책에 있다는 점에 눈을 감은 것이다.
 
고구려가 태도를 바꿔 수나라와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었다. 이전의 북중국 강대국들과 달리 수나라는 이웃나라들을 자국의 일부처럼 다루려 했다. 수나라와 화친하려면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보수파는 무책임한 화친 주장을 내놓았다.

안정복의 탄식
 
을지문덕 파와 고건무 파 중에서 어느 쪽이 정세를 더 정확히 파악했는가는 얼마 뒤 드러났다. 수나라는 614년 제3차 침공으로부터 불과 4년 뒤에 멸망했다. 수나라가 더 이상 힘이 없다고 본 을지문덕의 분석이 정확했던 것이다.
 
논쟁 당시 영양태왕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영양태왕은 고건무 파의 주장을 무시하지 못했다. 고건무가 자기 동생이라서가 아니었다. 수나라를 두려워하는 귀족 세력이 고건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양태왕은 고건무의 손을 들어줬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렇게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때 수나라 군주의 악정이 극심하고 천하가 어지러웠으니 만약 고구려 영양왕 원(元)이 난리를 평정할 재기를 간직하여 국세가 쇠잔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안으로는 을지문덕 등 여러 신하를 등용하고 밖으로는 신라·백제와 연합하고 말갈의 무리와 합세하여 수나라의 뒤를 쫓아가 죄악을 드러내 토벌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웅거하여 천하에 격서를 보내서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으련만, 고구려의 원(元) 같은 용렬한 인물이야 그저 죽음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보전할 꾀도 짜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어떻게 이 일을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애석할 뿐이다.
 
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의무려산을 장악하고 반(反)수나라 국제동맹을 추진했다면 수나라의 전쟁 도발을 응징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안정복은 아쉬워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때는 명장이었지만 이 논쟁에서는 패자가 됐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역사 기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채호가 쓴 <을지문덕전>은 "이때 을지문덕이 파직을 당하였는지, 아니면 참소를 만났는지, 늙어서 죽었는지 도무지 상고할 길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614년에 벌어진 외교전략 논쟁은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고건무의 승리로 끝나고, 이는 살수대첩의 명장인 을지문덕이 소리·소문도 없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는 원인이 됐다. '원 같은 용렬한 인물'이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보수파의 손을 들어준 결과였다. 또 이 사건은 고구려가 427년 이후의 낡은 국제전략을 계속해서 고수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4년 뒤 수나라가 망하고 고구려가 승자가 되는 듯했지만, 승리의 관은 고구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계승자인 당나라에 또다시 압박을 받는 처지가 됐다. 낡은 외교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을지문덕파를 실각시킨 보수파의 경직된 사고가 고구려를 낙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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