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0 11:56최종 업데이트 20.08.3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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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은 2007년 문학교수 안성찬의 추천 덕에 성프란시스대학의 예술사 교수로 합류했다.

첫 수업 날, 그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을 나와 갈월동에 있는 '노숙인 다시 서기 센터(아래 다시서기 센터)' 앞에 도착했다. 대학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이곳 지하 식당 옆에 마련한 강의실이 전부인, 세상에서 가장 작은 대학이다. 계단을 내려서니 저녁 배식을 받으려는 노숙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김동훈은 발걸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독일에서 10년간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3년 돌아와 서울대 미학과에서 첫 강의를 할 때도 불안했다. 수업 시작 직전까지 강의 노트를 보고 또 봤다. 학생들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날 근심은 달랐다. 노숙인들과 함께 과연 '예술사'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성프란시스대학의 원칙인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질 수나 있을까? 살아온 무게로 치면 몇 곱이나 위인 이들 앞에서 철학을 얘기하고 예술을 말하는 게 온당키나 한 것인가? 기꺼이 교수직을 받아들였지만 막상 닥치니 머릿속도 마음도 복잡했다.
 

김동훈 교수의 모습 경희대 앞에서 텀블벅 회의를 마치고 찍었다. ⓒ 민병래

 
제 학생들은 노숙인입니다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과정 '성프란시스대학'은 2005년, 다시서기 센터장이었던 임영인 신부가 추진했다. 그가 처음 제안했을 때,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이라구요?" "대학에서도 역사학과가 사라지는 마당인데 배고픈 인문학과 가난한 노숙자, 어울리는 궁합이 되겠네요", 같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임영인 신부가 1996년 사제서품을 받고 간 첫 임지는 인천 송림 4동에 있는 '나눔의 집'이었다. 피난민 150세대가 모여살던 그 곳에서 임 신부는 "가난을 극복하자"며 자활사업을 펼쳤고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그는 2004년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의 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은 서울시가 성공회에 운영을 위탁해 노숙인 구호사업을 하는 기관이었다. 상담소는 물론 진료소와 숙소도 운영하고 하루 250명에게 식사도 제공했다. 당시 서울역 부근에는 이런 사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노숙인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다니면 하루 다섯 끼도 먹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임영인 신부는 빈민과 노숙인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늘 질문이 있었다.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면 빈민과 노숙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모두 해결될까?"
"황폐해진 마음이 회복되고 자신에 대한 존재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 끝에 그가 찾은 해답은 '자존감'과 '인문학'이었다. 이들이 자존감을 세울 때만이 술과 도박에 빠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자존감은 오직 인문학을 통해서만이 심어줄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임영인 신부는 뉴욕에서 빈민을 대상으로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가 실험한 인문학교육을 참조하며 평생 옷 한 벌과 맨발로 산 성자의 이름을 따 '성프란시스대학'이라 작명했다. 그리고 서울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홍보해 2005년 9월 21일 첫 신입생 20명을 받아 '다시서기센터'에서 입학식을 치렀다. 이날 입학식장에는 "낡은 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손에 손을 잡고 나가자"는 교가와 카메라 플래시가 어우러져 축제 마당 같았다. 그렇게 문을 연 성프란시스대학이었다.

김동훈은 첫 날 수업 시작 전에 수강생인 '거리의 선생님'들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점심은 먹었나?" "많이 먹어라" 서로 챙기는 인사가 식탁에서 오갔다. 밥 먹는 게 하늘인 이들에게 '밥 먹었냐?'는 안부 인사는 가장 살가운 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강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노숙인 선생님'들은 나름대로 옷매무새도 다듬고 머리도 단정하게 빚었다.

첫 번째 알타미라 동굴벽화 강의는 걱정과 달리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김동훈이 "구석기인들은 왜 동굴 벽화에 들소 그림을 그렸을까요?"하는 질문을 던지자 '심심풀이로' '솜씨를 자랑하려고' '많이 잡게 해달라고' '들소의 힘이 부러워서' 하는 의견이 나왔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주술이다, 종교의례다"라는 얘기는 없었다.

두 시간은 짧았다. 어떤 대학 강의실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열기와 진지함에 시간이 부족했다. 수업을 마친 김동훈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그가 꿈꾸던 "철학과 빈민운동을 결합하고 싶다"는 바람이 비로소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다시서기 센터 강의실에서 김동훈 그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예술사 강의를 맡고 있다. ⓒ 민병래

   
이땅에 깃들어 사는 것의 의미

김동훈은 어린 시절 서울 정릉천 변에 한 줄로 서 있는 판잣집에서 컸다. 단칸방인 그 집에서 칠 남매와 할머니, 삼촌까지 열한 명이 살았다. 충남도의원을 했던 부친은 5.16 쿠테타로 정치 규제에 묶인 몸이었다. 그래서 사업으로 기반을 잡고 정치를 재개하겠다며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벌이는 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하루 종일 봉투 접기나 십자수를 놓으며 생활비를 벌었다. 나중에는 밀가루 반죽을 빚어 핫도그 장사도 했다.

어느 때부턴가 동네가 재개발된다며 세단차가 드나들고 복덕방 현수막이 나부꼈다. 잠자리에 누우면 부모님이 "딱지를 팔아야 한다"고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 소리가 들렸다.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해 교과서만 공부하니 담임선생님은 '수학의 정석'과 '성문핵심영어'는 꼭 봐야 한다며 채근했다. 처음으로 참고서 값을 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대답하셨던 아버지는 근 한 달 만에야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돈을 건넸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지쳤던 김동훈은 "이 땅에 깃들어 산다"는 것과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을 품었다. 또 어렴풋하게나마 평생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81학번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대학 시절 언젠가, 역촌동에 있는 베데스다 교회에 성가 봉사를 갔다. 미리 도착해 연습을 하고 있는데 예배시간이 되자 본당 안으로 환자들이 천천히 들어왔다. 환자복을 입은 그들은 푸대 자루를 걸친 모양새였다. 몸에는 살점이 거의 없이 뼈마디뿐이었고 발을 질질 끌며 들어왔다. 벌어진 단추 사이로 드러난 몸에는 수술 자국인 듯 칼로 베인 자리가 보였다.

그들은 서부시립병원의 폐결핵 환자들이었다. 의료보험도 없고 의료비도 낼 수 없는 중증 결핵 환자들이 그곳에서 무상치료를 받았는데, 이들은 병원 근처에 움막을 짓고 환자촌을 만들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갔다.

청년 김동훈에게 이 장면은 깊이 아로새겨졌다. 이 후 그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일에 매달렸다. 참길회란 단체에 들어가 보육원과 폐결핵 환자 마을을 위해 자원활동가를 모아 무료진료활동을 펼쳤다. 봉천동 달동네에서는 탁아방 지원팀도 만들었다. 그리고 50여 개 단체가 모인 전국자원활동단체협의회 창립을 돕고 의장까지 역임했다. 번역으로 돈을 벌어 집안 생계까지 책임지며 한 일들이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이 되자 그는 "빈민사목을 할 것인가 사회복지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학문의 길을 걸을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법고시는 아예 낄 자리가 없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독일 유학!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사안수까지 받으며 종교적 구원을 모색했다. 그는 이후 서울대 미학과에 편입해서 철학적 해답도 추구했다. 하지만 '이 땅에 깃들어 사는 것'의 의미를 끝까지 탐구하고 싶어 그는 독일 브레멘 대학으로 향했다. 그리고 '존재'를 탐구하며 10여 년간 행복하게 공부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식 사진 사진 가운데가 김동훈의 부친이다. ⓒ 민병래

 
고흐의 그림을 안고 숨진 사내

2003년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서울대 미학과를 시작으로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강의한 모든 대학에서 인기강좌 교수였고 평점도 높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가슴에 품었던 "빈민운동과 철학을 결합하겠다"는 생각이 맴맴 돌았다.

그 무렵 다가온 성프란시스대학의 예술사 교수 제안, 그에겐 단비였다. 그래서 그는 처음 성프란시스대학 창립자 임영인 신부와 교수진, 노숙인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매 수업마다 '거리의 선생님'들에게 외려 배우고 자신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른 후 그린 자화상을 보고 어떤 노숙인은 "우울증을 앓았구나" 하고 말했다. 뭉크 작품 '절규'를 감상할 때는 "배 고파서 혹은 얼어서 죽을 뻔한" 체험을 한 탓인가, 공포에 대한 깊은 공감들이 느껴졌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삶을 바탕으로 예술을 감상했고 향유(?)했다.
 

성프란시스 대학 15기 졸업식 사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인문학과정 성프란시스 대학의 졸업식 사진. 맨 뒷줄 왼쪽이 김동훈 교수. ⓒ 민병래

 
이태가 지났을 무렵인가? 김동훈에게 갑자기 무력감이 찾아왔다. 예술사 강의를 마치고 나올 때면 "그저 말 재주로 이들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몇몇 노숙인들에게 인문학 과정을 펼친다고 1만7천명이나 된다는 노숙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들을 거리에 남겨두고 나는 포근한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나? 회의감에 학교 입구에서 그냥 돌아갈까 망설인 적도 많았다.

그 무렵, 4기 졸업생인 유창만 선생이 동부시립병원에서 간암으로 숨졌다. 장례는 성프란시스대학장으로 치러졌다. 유창만의 동기생 권일혁 선생이 장례식장에서 전한 임종 이야기는 김동훈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창만이가 배에 복수가 차서 숨쉬기도 힘들어 하더라구요, 지켜보는 나도 괴로워 손에 쥐고 있던 우리 예술사 교재를 보여줬지요, 힘들게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고흐의 자화상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더라구요. 그리곤 그 그림을 품에 안고서 눈을 감았어요. 그래서 내가 혼자 중얼거렸죠, 우리 같은 거리 인생에게 고흐 같은 화가가 길동무해줬구나 하고..." 

2009년 3월, 5기 입학식에서 4기 졸업생이 한 격려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대학에 들어온 사람치고 자살 한두 번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 있냐? 죽음 문턱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 있냐? 우리 동문 중에는 스물두 끼나 굶어본 사람도 있다. 이런 고난을 겪은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우리 대학이다."

이 말은 입학식장을 흔들어놓았다. 절절한 얘기였다. 김동훈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노숙인 선생님'들의 이런 변화를 보면서 김동훈은 '거리 선생님'들은 인생길에서 어떤 특별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고 우리는 그 길에서 함께 하는 '길벗 도반'이라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전념했다. 성프란시스대학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업이라 여겼다.
 

성프란시스 대학 9기 졸업여행 사진 가운데 목도리를 한 사람이 김동훈 교수다 ⓒ 민병래

   
그 길은 외롭지 않다 

"보건복지부 간부도 실은 올해 초에 2021년부터는 지원을 끊겠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다시서기센터장 허용구 신부의 얘기에 어디선가 '끙'하는 신음소리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개교할 때부터 꾸준히 연간 6천~7천만 원 정도를 지원했던 대기업의 후원이 2020년 2월 부로 끊겼다. 이런 상황에서 보건복지부마저 내년부터는 예산을 없애겠다고 하니... 15년을 꿋꿋이 버텨오면서 248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배출했건만...

2학기를 준비하는 회의에서 허용구 신부의 말이 끝나자 김동훈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오히려 좋은 기횝니다. 이번을 계기로 성프란시스대학을 시민운동 차원으로 새롭게 탄생시켜보지요." 모두들 귀를 기울였지만 분위기는 무거웠고 침묵은 가시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는 먹장구름이 어깨를 벌리고 매달려 있었다. 김동훈은 다시 "안 가본 길을 한번 가 보지요"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사실, 김동훈은 진작부터 시민의 힘으로 성프란시스대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부 선교 단체에서 배식을 하면서 기자들을 동원하는 모습이나 겨울 방한복을 나눠주면서 교회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새겨 넣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서울시에서도 끊임없이 성공 사례, 재활 사례를 수치로 요구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또한 시혜의 대상이고 홍보의 재료로 여겨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벼랑 끝에 섰으니 답은 시민운동밖에 없었다.

김동훈은 교수진과 운영진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15년간 쌓인 졸업생들의 글을 '빗물 그 바아압'으로 발간하자는 것이었다. 2020년 8월 19일 5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고맙게도 불과 일주일도 안 된 8월 24일 목표를 달성했다. 또 하나는 후원회원 사업. 소식을 정기적으로 알리면 많은 이들이 동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 위한 수단, 웹진을 만들어 7월에 창간호를 냈다. 이제 2호, 3호를 준비 중이다.

어려운 시기에 고맙게도 올해 학장으로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취임했다. 그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인문학 과정이 노숙인 재활의 핵심 사업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더 큰 목표를 제시했다.

김동훈도 꿈꾸고 있다. 예술사 강의를 계속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숙문제 연구소'(가칭)를 세워볼 생각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 노숙인 문제를 다룬 논문이 800여 개나 나왔다. 나름대로 좋은 문제의식과 대안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연구결과들을 담아내되 철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노숙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책대안을 제시할 작정이다.

성프란시스 대학에서 "쫓아내기 전에는 안 나가겠다"는 그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거리의 철학자로 살아가는 게 꿈인 그다
그 길은 외롭지 않다. 많은 길벗 도반들이 함께 할 테니까.
 
<못다 한 이야기>
① 텀블벅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간하는 『빗물 그 바아압』은 4기 졸업생 권일혁 선생이 쓴 시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빗물 그 바아압
권일혁
 
장대비 속에 긴 배식줄
빗물바아압 빗물구우욱 비이무울 기이임치이
물에 빠진 생쥐새끼라 했던가
물에 빠져도 먹어야 산다
이 순간만큼은 왜 사는지도 호강이다 왜 먹는지도 사치다
인간도 네 발 짐승도 없다 생쥐도 없다
오직 생명뿐이다
그의 지시대로 행위할 뿐
사느냐 죽느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빗물 반 음식 반 그냥 부어 넣는 것.

 
②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작업은 목표액을 채웠지만 2020년 10월 19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도 동참이 가능하다. https://tumblbug.com/stfrancishumanities?ref=discover
 
③ 성프란시스 대학의 홈페이지주소는 https://stfrancishumanities.tistory.com/이다. 더 많은 얘기는 이 곳에서.
 
④ 김동훈 교수는 2019년 독일철학자 고틀리프 바움가르텐(1714~1762) 이 라틴어로 쓴 『미학』을 번역했다. 또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데이비드 흄의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비극에 대하여』도 함께 번역해 '미학원전시리즈'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⑤ 클레멘트 코스는 미국의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는 1995년 빈곤문제와 관련해 글을 쓰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중인 여죄수를 만나 인상적인 문답을 나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가난한 건 정신적인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삶이란 무엇을 말하지요?"
"저기 저 곳에 있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이 대화로 얼 쇼리스는 가난으로 몸이 망가지고 정신도 황폐해진 이들에게 인문학교육이 필요하다는 영감을 얻었다. 그는 곧바로 윤리철학, 예술, 역사, 논리학 등을 강의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열었다. 뉴욕 인근에 사는 마약중독자, 노숙자, 매춘부, 실업자, 전과자들 31명이 첫 수강생이었다. 모두 얼 쇼리스의 교육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31명 중 17명이 1년 후 수료증을 받았고, 수료생 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공부를 계속해 치과의사가 됐고, 전과자였던 여성은 약물 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되었다. 이를 본받아 클레멘트 코스는 4대륙 (미국,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확산되어 현재 53개 코스가 운영 중이다.

⑥ 초대학장 임영인 신부가 노력한 덕분에 삼성코닝(2015년에 미국계 회사와의 합작사에서 미국계 기업인 코닝정밀소재로 바뀐다)은 해마다 지원을 해왔다. 그런데 코닝이 아산시로 이사를 하고 지역사회 봉사를 기본으로 미국 본사 방침에 따라 서울에 소재를 둔 성프란시스대학에 대한 지원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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