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은 지뢰밭... 똥차가 여자를 죽일 수 있다"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열두 번째 기사다. - 편집자 주


"모처럼 짧은 치마 입었는데
잔소리만 해서 미안하다
근데 어쩌냐
남자들이 다리 보는 게 싫은데"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만든 데이트폭력 체크리스트 중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게 한다'와 유사하다. 한국여성의전화는 "데이트 상대가 이와 같은 행동 중 하나라도 한다면, 위험신호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잔소리하는 남자친구, 이 역시 위험신호일까?
데이트 스트레스
일러스트 - 이강훈
지난 8월 28일 만난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정책팀장은 "중요한 건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느냐 여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맞춰가야 한다면, 데이트폭력으로 의심해볼 만하다"라고 짚었다. 최 팀장은 "저런 류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다면, 그 스트레스는 내가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불평등'의 문제다.
"연인간의 관계가 평등하다면 '이런 스타일이 좋아'라는 말에도 '응~ 너의 취향이 그렇구나'라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만일 상대가 좋아하는 대로 맞춰가야 한다면 평등한 관계는 아닌 거죠. 옷차림 등을 단속하는 것도 그 일환일 수 있습니다."
다만, 최 팀장은 "데이트폭력은 '친밀한 관계'라는 맥락과 상황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체크리스트'는 행위 그 자체만 떼어놓고 보는 거라 리스트를 만들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부연했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러한 성별 권력 관계가 삭제된 채로 보여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경찰청 분석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발생한 데이트폭력 피해자 4만4064명 가운데 여성은 71.8%, 남성은 9.3%, 쌍방은 18.9%로 조사됐다.
다음은 한국여성의전화가 만든 '데이트폭력 체크리스트'다.
□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 하루 종일 많은 양의 전화와 문자를 한다.
□ 통화내역이나 문자 등 휴대전화를 체크한다.
□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게 한다.
□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 날마다 만나자고 하거나 기다리지 말라는 데도 기다린다.
□ 만날 때마다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요구한다.
□ 내 과거를 끈질기게 캐묻는다.
□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 둘이 있을 때는 폭력적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태도가 달라진다.
□ 싸우다가 외진 길에 나를 버려두고 간 적이 있다.
□ 문을 발로 차거나 물건을 던진다.
"신고하라, 기록을 남겨야 한다"
최 팀장은 한국여성의전화가 매해 진행하는 '분노의 게이지-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의 2019년 판을 담당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의 숫자는 88명에 달한다.
최 팀장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데이트폭력과 그렇지 않은 데이트폭력의 전조는 같다"고 말한다. "본질은 '통제'"라고 했다.
그는 "피해자가 전화 상담으로 '이런 것도 폭력이냐' 묻곤 하는데, 폭력에는 경중이 없다"라며 "가해자가 피해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 여기서 비롯된 통제가 바로 폭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최 팀장은 "지뢰밭 같은 거다, 흔히 말하는 똥차가 여성을 죽일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아 더러운 만남이었다' 이러면서 지나갈 수도 있는 거"라며 "상대가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폭력에는 경중이 없다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전조를 느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최 팀장은 답하기 조심스럽다고 했다. "자칫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는 식으로 피해자 책임론이 될 수 있어 그렇다"면서도 최 팀장이 여러 차례 강조한 말은 "그냥 지나치지 말아달라, 폭력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면, 주변에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함께 대처해나갈 수 있어요.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해요. 만일, 심각한 상황이고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면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희 쪽으로 전화(02-3156-5400) 주셔도 되고요, 1366(여성긴급전화)으로 전화 하셔도 되고요. 폭력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통제는 '해버릇 하니까' 더 심해질 수밖에 없어요. 통제의 범위가 넓어지면 피해자는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데이트폭력 관계에 놓여있다면 본인이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라며 "싸울 때마다 쌍욕을 한다? 맞은 게 아니더라도 폭력이다, 벗어나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최 팀장은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한다.
최 팀장은 "신고 기록이 남기 때문에, 추후에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증거로 남을 수 있다"라며 "신고 행위 자체에 대해 가해자들이 겁을 먹고 데이트폭력 행위를 중단할 수 있다, 피해자가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신고를 권한다"라고 말했다.
"여성 통제... 사회적으로 용인하면 종국엔 여성 때리거나 죽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제공하는 웹툰의 일부
그러나 실제 신고율은 낮은 편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6년 108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데이트폭력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응답자(627명) 가운데 95.2%(597명)는 신고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중복 체크)에 대해서는 '신고나 고소를 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가 75.8%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38.1%)', '신고를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21.9%)' 등의 답변이 있었다.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제도가 부족한 현실을 대변하는 답변들이다. 최 팀장은 "피해자가 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가고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야 겨우 벗어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계속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2009년부터 10년 째 '여성 살해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그 10년 동안 "살해당하는 여성의 숫자나 죽음의 사회적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최 팀장의 말이다.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처벌 안 한 채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결국, 국가가 여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는 거죠."
현재, 데이트폭력 관련법조차 없는 상황이다.
최 팀장은 "가정폭력처벌법에 '데이트 관계'도 적용 되도록 법 개정이 이뤄지고, 그에 맞게 피해자들이 지원받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받도록 개선돼야 한다"라며 "여성에 관한 폭력을 법이 포괄해 국가가 제 역할을 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으려면 이 사건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냐가 중요하다"라며 "데이트폭력은 '사회적 범죄'임을 수사단계에서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초동 대응해야 하며, 이 같은 기조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적용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최 팀장은 강조해서 말했다.
"가해자들이 '여성을 통제하고, 욕하고, 협박하는 일'을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면, 가해자들은 더 이상 피해자를 때리거나 종국엔 죽이는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
발행일시 : 2020.11.24 07:05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마이뉴스
취재 이주연, 이정환
조사 이지혜, 박지선, 한지연
개발 이기종 / 디비서비스 디자인 이은영 / 웹기획 공명식 / 총괄 이종호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Designed and built by Studio Velcro
판결문 108건을 분석했다
[형량 분석] 죽도록 때렸지만... 살인 고의 없으면 5.4년
[인터뷰] 여성들이 느끼는 정의와 불의
[직무유기] 112 신고 후 48시간 안에 숨진 여성들
[살인의 전조] 19명은 살 수 있었다
[처벌불원] 그렇게 6명이 죽었다
[신고를 안하다] 그녀는 608호에 갇혀 있었다
[국가의 의무] 그를 풀어줘선 안 됐다
[합의금] 형량 23년 줄이는데 얼마 들었을까
[인터뷰] "일단 맞아야, 경찰은 여자를 지킬 수 있다"
이아리 작가가 건네고 싶었던 메세지는 결국 하나
10년 동안의 '여성 살해 보고서'
상해치사 8년, 살인 8년은 같은 숫자가 아니다
에필로그 : 피해자 달력
댓글19
댓글19
원고료로 응원하기
본문듣기 등록 2020.11.24 07:05 수정 2020.11.24 07:0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