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7 11:50최종 업데이트 24.03.1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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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주의(超越主義)란 말을 들어봤는지. 19세기 미국의 사상 개혁 운동으로, 인간의 영혼이 개인을 초월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신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상이다. 초월주의자들은 사회와 단체들이 개인의 순수성을 타락시켰으므로, 사람들은 관습의 속박이나 제약에 불복종해야하며 자연 속으로 들어가 독립적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초월주의자 중에는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 브론슨 올콧은 1843년, 초월주의 신념에 따라 가족들을 이끌고 프룻랜드(Fruitlands)로 이사했다. 프룻랜드는 어떤 곳이었던가. 이 농장은 땅에서 나오는 결실에 의지해 살아가고, 어떤 동물도 잡아먹거나 농업에 이용하거나 예속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형 농장이었다.

글로 적고 보니 희망이 절로 샘솟을 '유토피아' 같다. 문제는 이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육체적으로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사일에 동물을 배제하자,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가족을 이끌고 프룻랜드에 온 당사자인 아버지 브론슨의 손에 흙이 묻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왜였을까.

브론슨은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기보단 대의를 위해, 추상적인 논의를 하는 일에 더 바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육체노동을 할 마음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일을 대신해줄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수확기가 왔을 때도 그는 부인과 딸에게 힘든 농사일을 맡겨놓은 채 '유토피아'를 맘 편히 떠나 있을 수 있었다.

이때 루이자 메이 올콧의 나이는 불과 11살. 도대체 아버지 브론슨에게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모든 생명을 존중한다'고 했건만, 그 '모든'에 자신의 아내와 딸들은 포함되지 않았던 걸까.
 
혁명사상과 회화를 연결하겠다는 '다리파'

이 일화를 접하며 느꼈던 기묘한 불편함의 정체를 나는 독일의 다리파(Die Brücke)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1906년,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주도로 다리파가 창설됐다. 다리파는 말 그대로 자신들이 혁명사상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겠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다리파가 말했던 '혁명사상'이란 무엇이었던가. 키르히너를 비롯한 다리파 멤버들은 고루한 왕정과 부르주아지의 물신주의 등 유럽 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공동 목표는 규율이 지배하는 근대 도시, 진부하고 위선적인 사회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다리파는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벗어난 혁명적인 세계를 꿈꾸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진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새로운 창조자와 관람자 세대가 도래했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부른다.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로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기득권에 대항하여 행동과 삶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창조의 충동을 왜곡하지 않고 직접 표현하는 사람은 모두 우리 편이다."
 
창립 선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다리파 화가들은 사회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살아가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원했다. 그리고 문명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 믿었다.

그랬던 그들의 눈에 당시 주류 예술이었던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아카데미 미술은 눈에 찰 리 없었다. 다리파는 이미 오래전에 시들어버린 아카데미 미술을 폐기하고, 이성이 아닌 본능, 꿈과 환상, 원시성, 광기의 세계를 탐사해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살리려 했다. 자극적인 색채와 광적인 붓 터치로 캔버스에 에너지를 채우는 '독일 표현주의 예술'의 시작이었다.
 

키르히너, <목욕하는 네 명의 사람들> 1909년경, 캔버스에 유채, 독일 폰 데어 호이트 미술관 ⓒ 키르히너

키르히너의 <목욕하는 네 명의 사람들>은 이 같은 다리파의 예술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림 속 네 명의 인물은 벌거벗은 채 독일 드레스덴 북쪽에 있는 모리츠부르크 인근의 호수에서 자유롭게 목욕 중이다.

"화가는 겉모습을 정확히 그리면 안 되며 사물의 모습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고 했던 평소 지론대로, 키르히너는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분홍빛 육체를 만들어냈다. 몸의 윤곽선은 찌그러져 있고, 원근법은 불안하며, 얼굴 표정도 알아볼 수 없다.

아카데미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림은 스케치만도 못한 거친 그림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키르히너가 의도한 바였다. 그에게는 과감하게 사용한 색채와 빠른 붓 터치에서 느껴지는 원시적인 활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혈기 왕성한 다리파 화가들이 실험했던 대상은 그림 말고도 또 있었다. 그들은 삶의 방식까지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바로 '나체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를 꿈꿨던 그들답게, 다리파는 문명의 껍데기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 자연의 품에 안기자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벌거벗는다는 것은 순수를 되찾는 일이었고,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목욕하는 네 명의 사람들>도 그렇게 탄생하게 된 그림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대낮,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야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이다.

피부가 녹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에서 이들이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다리파 화가들은 호수와 작업실을 야만적인 서구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온 '순수와 야성'이 회복되는 성전(聖殿)으로 삼았고, 그림과 실제 삶을 통해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이 '순수와 야성의 성전' 속 주인공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목욕하는 네 명의 사람들>에 등장한다. 그림의 맨 왼쪽, 머리를 풀고 다리를 꼰 채 우리를 쳐다보는 여린 몸의 여자. 한눈에 봐도 어린 소녀 같은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

작업실에 들이닥친 경찰

그녀의 이름은 리나 프란치스카 레어만(Lina Franziska Fehrmann, 1900~1950). 보통 프랜지(Fränzi)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소녀였다. 다리파 화가들과 처음 만났을 때 프랜지의 나이는 고작 8살. 이후 프랜지는 약 3년간 다리파 화가들의 누드 모델이 되어주었다.

다리파는 사회의 고리타분한 편견에 도전하는 것을 근대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도 깨뜨려야 하는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키르히너가 그림에서 묘사한 프랜지의 모습은 그 나이대 소녀의 일상과는 많이 다르다.
 

키르히너, <소파에 앉아있는 에리히 헤켈과 프랜지> 1909~10년, 종이에 목탄, 미국 코넬대학교 허버트 F. 존슨 미술관 ⓒ 키르히너

 
<소파에 앉아있는 에리히 헤켈과 프랜지>를 보자. 머리에 리본을 꽂은 프랜지는 벌거벗은 채, 다리파의 멤버였던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1883~1970)의 무릎 위에 앉아있다. 헤켈 역시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이다.

<에리히 헤켈과 대화하며 누워있는 프랜지>에서도 헤켈은 나체상태로 누워있는 프랜지를 향해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이다. 물론 이 그림들만으로 다리파 화가들이 아동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했다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당시에도 아이들이 알몸 상태로 성인 남성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논란이 되었다.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과 대화하며 누워있는 프랜지>, 1910년, 종이에 목탄, 스위스 키르히너 미술관 ⓒ 키르히너


결국 경찰이 작업실에 들이닥쳤다. 다리파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 전시됐을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소녀들이 유인되어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작업실엔 프랜지를 비롯한 소녀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화가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이들을 폭행하거나 강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녀들의 반응도 의외였다.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서의 생활을 더 원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의 원가정은 그리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떨어진 채 작업실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말이다.

프랜지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안의 열두 아이 중 막내딸이었던 프랜지는 가정에서 방임됐을 확률이 높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프랜지는 어머니의 생업이었던 모자 만드는 가게에서 '도도'라는 키르히너의 애인이자 모델을 우연히 만났고, 도도의 이끌림에 따라 다리파의 작업실로 흘러오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아마도 키르히너는 프랜지가 기댈 곳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만약 프랜지가 중산층의 딸이었다면, 과연 키르히너는 '탈문명과 해방'이라는 대의를 자신 있게 내걸며 아이의 옷을 당당하게 벗길 수 있었을까?

다리파는 반 부르주아를 예술의 비전으로 삼고 있었지만, 정작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은 부르주아 남성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그것도 부르주아 사회 속 대표적 피해자였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소녀에게 말이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은 논문 <20세기 초 전위회화에 나타난 남성다움과 지배>에서 키르히너 등 다리파의 급진적인 주장은 모순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의 그림에 의하면 미술가의 해방이란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유는 타인의 비자유를 요구한다.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항하기는커녕, 이 그림들이 내포하는 남녀관계는 여성을 특정한 남성의 흥밋거리로 철저하게 격하시키며, 성차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계급 관계로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던컨에 따르면 키르히너는 자신의 '해방'을 위해, 결과적으로 프랜지의 나이, 가난,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점을 이용한 셈이다.

너와 나의 해방은 연결돼 있다
 
미국의 작가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 중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서로 협력하고 있는데, 이를 보지 않고 한 가지 억압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없는 환경운동은 임시 처방이 되어버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없이 동성결혼을 통해 주류에 편입되는 것을 퀴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심지어 키르히너가 그랬듯, 다른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프랜지는 자신의 성이 '해방의 예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어린 시절이 뼈아프게 다가왔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아버지 브론슨 올콧은 초월주의자로서는 훌륭했다. 그는 다른 이에게 관습의 속박이나 제약에 불복종해야 한다고 치열하게 설득하던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의 대의를 위해 가족을 수족처럼 부렸던 영락 없는 가부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여성들을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가부장제를 재생산한 장본인이 되었다. 브론슨은 알아야 했다. 자신이 그토록 깨부수고 싶어하는 체제의 일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너와 나의 해방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 체제의 부역자가 된다는 그 쓰디쓴 진실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American Girl", Leah Price 지음, The New York Times, 2010년 12월 10일자
<아트인문학>, 김태진 지음, 카시오페아, 2021
<그리다, 너를>, 이주헌 지음, 아트북스, 2015
<창조적 시선>, 김정운 지음, 아르테, 2023
<권력의 미학>, 캐롤 던컨 지음, 이혜원, 황귀영 옮김, 경당, 2020
<불편한 시선>, 이윤희 지음, 아날로그, 2022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 제이 옮김, 현실문화,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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