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8 09:41최종 업데이트 24.03.28 09:41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어느새 발밑이 푸르다 싶은데 냉이꽃이 피어 있다. 냉이는 꽃대가 올라오면 질겨서 꽃 피기 전에 캐 먹는다. 봄이 오기도 전에 피어난 하얀 꽃을 보며, 그 작은 크기만큼의 봄을 느낀다. 그리고 철을 앞선 꽃대보다 질긴 이들을 떠올린다.

14년째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이들, 풍산마이크로텍의 해고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부산 서면로터리에서 선전전을 한다. 풍산마이크로텍은 2010년 회사 지분을 매각하고 2011년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2015년 대법원으로부터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으나 2016년까지 다섯 차례의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을 정리해고했다.

해고노동자·공익활동가 건강돌봄 지원이 절실했던 이유?
 

풍산마이크로텍 해고노동자가 지난 3월 5일 아침 8시경 부산시 부전동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삶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하다 해고된 노동자들,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에서 기록하고 행동하는 공익활동가들, 한국 사회의 인권은 이들 덕에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건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은 과연 건강한가?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2023 부산지역 해고노동자 및 공익활동가 건강돌봄 지원사업'은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했다. 해고노동자의 무너진 일상을 버티게 하고 공익활동가의 반복되는 소진을 막아줄 '건강돌봄'이 절실함에도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자원과 지원체계는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그마저도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지역의 활동가 94명에게 몸 검진, 마음 검진, 치과 진료를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그 과정을 소개하며 사업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한 이후 해고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를 참혹하게 경험했다. 2013년 4월 부산에서 해고노동자들이 더는 죽지 않고 살아서 싸울 수 있는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뜻이 모여 '부산 지역사회 연대기금 만원의 연대(만원의 연대)'가 발족했다. 만원의 연대는 월 1만 원씩 내는 후원인들의 후원금으로 2013년 5월부터 지금까지 4개 사업장 해고노동자들에게 월 100만 원의 생계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활비에 미치지 못하는 그 100만 원조차 같이 해고된 여럿이 나눠 쓰는 처지이다 보니 해고노동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엄두를 낼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실상을 잘 알고 있는 만원의 연대가 '건강돌봄 지원사업'의 대상자인 부산의 해고노동자들을 추천하고 모집했다.

사회적 약자와 긴밀하게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는 공익활동가들의 현실 또한 녹록지 않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취약한 재정 기반으로 인해 활동가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활동비와 휴식 없는 삶, 불투명한 미래'라는 악조건 속에서 열정과 헌신을 요구받고 있다. 아울러 폭력피해·인권침해 당사자들의 고통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당사자의 안위를 우선하게 되는 현실 때문에 고립과 소진을 경험하고 있다.

2022년 2월 부산에서는 단체와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중간지원조직인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이 창립됐다. 그해 진행한 '2022 부산지역 인권단체 및 인권활동가 현황조사'에서 62개 단체가 '심리적·신체적 건강 지원'과 '의료비 지원'을 파랑에 바란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부산에 활동가의 건강돌봄 지원체계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파랑은 건강돌봄 지원사업의 또 다른 대상자인 공익활동가들을 모집하고 이 사업의 실무를 맡았다.

2014년부터 운영된 한국여성재단의 '여성활동가 대상 치과진료'에서 부산지역 활동가가 지원받은 것은 2022년 1건이 최초 사례였다. 건강돌봄 지원사업을 계획할 때 치과 진료는 가장 필요한 항목으로 파악됐지만 경제적 이유로 포기하게 되는 1순위 항목이기도 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부산경남지부'는 투쟁사업장으로 '찾아가는 구강검진'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해고노동자들을 발굴하고, 총 40명의 대상자를 부산양산지역 치과 19곳에 배정하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연계했다.

만원의 연대, 파랑, 그리고 건치가 함께 건강돌봄 지원사업단을 구성했고, 몸 검진과 마음 검진을 맡아줄 기관을 찾았다. 그리하여 한국건강관리협회 부산광역시 서부지부가 1인당 100만 원 상당의 건강검진을 지원하고, 마주심리상담소가 마음검진에 이어 추가 심리상담을 지원하며 협력 기관으로 참여했다.

진단받고도 비용 부담으로 치료 포기 적잖아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 공동대표가 2023년 5월 26일 자일대우버스 공장을 방문하여 찾아가는 치과 검진을 하고 있다.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대상자를 모집하며 신청서를 받는 과정에서부터 해고노동자와 공익활동가의 현실이 드러났다. 해고노동자는 물론 공익활동가 또한 비용 부담으로 인해 건강 돌봄을 미루어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2023년 4월부터 12월까지 총 160명(지원항목별 누적인원)의 해고노동자와 공익활동가가 참여한 치과 진료, 몸 검진, 마음 검진의 결과는 염려했던 바와 다르지 않았고 예상보다 심각한 경우도 있었다.

치과 진료의 신청 사유는 모두 치료비용 부담이었다. 오랫동안 치과에 가지 않은 불안함에 비례한 예상 비용 때문에 미리 포기하거나, 진단을 받고 나서도 비용 부담으로 포기한 것이다. 본인의 염려와 달리 치아 상태가 괜찮은 경우는 다행이었지만, 대상자 40명 중 31명이 100만 원 이상의 치료비가 필요했다. 100만~300만 원(최대 지원금)이 28명(75%), 300만 원 이상이 9명(25%)이었고, 그중에서 일상적인 식생활이 힘들 만큼 치아 상태가 무너져 1천만 원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몸 검진은 예방을 최우선 목표로 했지만 검진 결과 중증 질환이 발견되면 대처 방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다행히 당장 치료받아야 하는 위급한 중증 질환자는 없었으나, 암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은 만성염을 발견하여 수술받은 경우, 녹내장 의심 소견을 듣고 일찍 치료를 시작한 경우, 추가 검진을 통해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건강돌봄 지원사업 참여자 현황(인적사항별)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건강돌봄 지원사업 참여자 현황(지원항목별, 단위: 명)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이들의 치료비는 모두 개인이 부담했다. 검진 이후의 치료비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일일이 결과를 확인하기가 무색해 알음알음 들어서 알 수 있었다. 이 사업이 검진을 통한 예방이라는 목표에는 충실했지만, 여전히 중증 질환자가 발생할 때 추가 지원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는 앞으로 보완해야 할 지점이다.

가장 공들여 준비한 항목은 마음 검진이었다. 해고노동자와 공익활동가의 현실을 볼 때 몸 건강뿐 아니라 마음 건강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사업계획 단계부터 몸과 마음을 묶어 '건강검진'으로 기획했다. 몸 검진을 신청한 사람은 마음 검진도 함께 받아야 하는 터라 조금의 강제성이 있었던 셈이다. 해고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문항이 적은 PAI(성격평가 질문) 검사를, 공익활동가들은 MMPI-2(다면적 인성검사)를 받았다.
 

마음 검진 결과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강제성을 감수하면서 얻은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즉각적인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해고노동자 16명 중 스트레스 대처(신체적 호소, 알코올 등) 위험군이 50%(8명), 내재화 문제(우울)와 대인관계(가족 내 갈등 등)에 각각 31.2%(5명), 외현화 문제(반사회적 행동 가능성 등)와 사고문제(피해의식 등)에 각각 25%(4명)가 해당했으며, 자살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다는 자살사고가 12.5%(2명)로 나타났다.

공익활동가 40명 중에는 스트레스 대처 30%(12명), 사고문제와 대인관계에서 각각 27.5%(11명), 내재화 문제와 외현화 문제에서 각각 17.5%(7명)로 나타났다. 검진 이후, 해고노동자 일부에게 전화상담을 바로 진행했고, 공익활동가 5명에게 총 22회 추가 심리상담을 진행했다.

지역 차원의 지속적 지원 위한 재원 절실
 

해고노동자들이 2023년 5월 15일 집단 심리검사를 받기 위해 마주심리상담소 대표의 안내를 듣고 있다. ⓒ 건강돌봄 지원사업단

 
"해고되고 나서 사회에서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건강을 돌봐준다는 게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순히 건강검진과 치과진료 비용만 지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건강돌봄 지원사업에 참여한 한 해고노동자)

참여자들은 검진과 진료를 마치고 사업 평가를 하면서 하나같이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투쟁의 승리로 보답하겠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다짐까지 붙였다. 경제적·심리적 부담으로 미뤄 온 나의 건강을 누군가 돌본다는 것 자체가 큰 응원이라 했다. 이 사업은 그들의 투쟁과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지지를 의미했다.

이런 보람과 더불어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안타까움도 한구석에 자리했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누구보다 앞서 나서지만, 자신을 돌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 망설이는 이들을 지원하도록 하기까지 남모를 애를 먹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 더 어려운 분들이 받아야지요", "투쟁 일정을 소화하기도 벅차요", "정말 내가 아프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버틸 자신이 없을 것 같다"는 고백 같은 말과 함께 정중한 거절을 들은 뒤에는 가슴만 서늘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올해도 연속사업 지원에 선정되어 같은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안타까움으로 남은 이들을 다시 찾아갈 수 있겠다. 올해는 지역을 부산에서 경남으로 넓혀 대상자를 모집 중이고, 작년의 '건강돌봄 지원사업단'과 협력 기관들이 그대로 참여한다. 이 네트워크를 토대로 부산지역의 공익적 건강안전망이 더욱 넓고 단단하게 다져지길 기대한다. 한편, 하나의 사업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지원체계를 갖추기까지는 여러 해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역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이것이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당신이 건강해야 노동운동, 인권운동이 건강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사람이 남지 않는 운동에는 미래가 없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나를 돌보겠다는 참여자들의 용기와 구체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지역사회의 의지가 모여 가능한 사업이었다. 더는 누군가의 건강에 빚진 세상이 아니면 좋겠다. 내일 있을 비 소식에 비옷을 챙기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철모르고 길 위에 선 사람들이 부디 건강하길 소망한다. 앞서 피어난 냉이꽃에 이어 꽃 무리가 번질 것이다. 철모르는 이들이 앞당긴, 무리 지어 함께 맞이할 봄을 기다린다.
 

재인 /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운영팀장 ⓒ 재인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재인은 지역 인권운동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를 꿈꾸는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해군기지 반대 싸움이 벌어졌던 제주 강정마을에서 7년을 보냈고, 곳곳에서 싸움을 거쳐 간 사람들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