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24 08:06최종 업데이트 19.04.24 11:05
 

재판 기다리는 박근혜-최순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지난 2017년 5월 23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국정농단 재판 시작을 기다리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미국의 유명한 정치스릴러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능가하는 역대급 정치스릴러 드라마.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대급 정치스릴러 다큐멘터리를 우리 이미 알고 있다. '드라마'는 일종의 창작물로 상상을 초월하는 픽션인데, 이 정치스릴러 다큐멘터리는 이미 허구에서나 가능할 법한 '상상'의 개념을 능가한다.

바로 박씨 대통령들과 최씨 일가의 이야기다. 단언컨대 박정희에서부터 시작해 박근혜 그리고 최태민, 최순실로 이어지는 아버지들과 딸들의 서사들만 모아도 이미 이 정치스릴러 다큐멘터리는 시즌 6을 거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왜 독일이었을까
   
주요 배경은 한국과 독일. 일단 국제적 스케일이다. 첫 시작은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가 1964년 독일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동북아시아의 분단국가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는 서유럽의 또 다른 분단국가 서독을 방문한다. 반대로 당시 동독 정부는 서독과 경쟁이라도 하듯 북한 정부와의 형제애를 돈독히 다졌다. 그때 유라시아 서쪽나라 독일과 유라시아 동쪽나라 남북한 원수들은 각각 편을 가르며 만나 냉전의 벽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박 전 대통령 부부가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로 당시 '대한뉴스' 영상을 보면 흑백화면 속에 육영수 여사만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확히 50년 후 2014년, 이번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독일을 방문한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독일 땅을 방문해 자신의 어머니·아버지의 모습을 재현하듯, 눈물을 흘리는 파독간호사를 위로했다. 이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일종의 '오마주'였다. 실제로 독일에 방문했을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행사 자리에서 자주 아버지를 언급하며 회상에 잠겼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최순실씨가 독일에서 다수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고 대통령의 연설문을 뜯어 고치며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도 독일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중에게 '최순실 집사'로 알려진 데이비드 윤(한국명 윤영식)과 최순실씨의 독일 대리인 박승관 변호사 모두 독일 교민 2세였다. 특히 데이비드 윤의 아버지는 파독 광부 출신으로 재독한인회의 20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직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야심이 왜 하필 독일을 선택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합리적 의심을 해볼 여지는 있다. 이미 더불어민주당 안민석·노웅래 의원은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공식 보고서인 '프레이저보고서'를 근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스위스에 불법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를 세탁하기 위해 최순실씨가 독일에 수백 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독일 언론이 기록한 부끄러운 역사
 

1976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내용이 무려 10장에 걸쳐 실린다.(좌측), 박근혜 탄핵에 대한 독일 공영방송 2DF의 보도(우측) ⓒ 권은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독일 방문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독일 방문 후 '통일 대박론'을 야심차게 내세웠다. 당시 일부 한국 언론들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던 50년 전과 다름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대해서도 크게 의미 부여를 했다. 아버지의 못 다 이룬 과업을 딸이 물려받는다는 식의 찬양이 주요 일간지와 방송 뉴스에 넘쳐났다. 

그러나 독일 언론의 반응은 달랐다. 이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던 해인 1964년에 독일 유력 언론 <디 짜이트>(Die Zeit)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정부의 부패와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보도한다. 그 후로 현재까지 여러 독일 언론 아카이브에서 두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 내용 대부분이 우리에게 낯뜨거울 뿐이다.
 
"한국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슈피겔 >(1976년) (사진 설명: 독재자 박정희,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증오) 
"부패 스캔들은 독재자의 딸을 끌어내렸다" 독일 공영방송 <2DF>(2018년)

독일 대표 언론 <슈피겔>의 1976년 기사와 독일 공영방송 < 2DF >의 2018년 기사를 나란히 놓고 보니 굴곡지고 역변하는 한국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대와 박근혜 정권 시대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저항한 끝에 대통령을 탄핵시켰다는 것이다.

촛불 그 이후 
 

베를린 한인회보 4월호에 실린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 연설문 전문 ⓒ 권은비

 
국정농단 당시 독일의 한적한 시골마을 슈미텐에는 온갖 언론사의 한국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 오래다.

이후 독일 교민사회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물론 교민사회는 연령에 따라, 또 직종에 따라 단체별 성격이 각각 다르다. 그렇지만 적어도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한 사안에서는 뚜렷하게 양분됐다. 

먼저 독일은 국정농단 사실이 알려진 뒤 유럽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또 세월호 참사 이후 독일 각지의 교민들은 현재까지도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독일의 비영리 공익·정치재단)'이 한국의 촛불시민들에게 인권상을 수여하자 이를 취소해 달라는 항의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매월 발간되는 베를린 한인회보 4월호 목차에는 그 어디에도 세월호를 추모하는 지면이 없다. 대신 보수 일간지 기사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전문 그대로 실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이제 2년이 지났다. 지금도 베를린의 도서관에 가면 어렵지 않게 한국의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정치드라마를 능가했던 사건의 결말을 묻는 독일 친구들도 있다. 동시에 국정농단에 대한 법적 판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유한국당이 박 전 대통령 석방 카드를 꺼냈다는 소식이 한국으로부터 들려온다. 나는 독일 친구의 질문에 아직 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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