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5 16:51최종 업데이트 19.07.15 16:51
임시정부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면, 윤봉길 의사가 임시정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 독립운동사 전체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자연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세 때, 근처 공동묘지에서 한 청년을 보게 된다. 그 청년은 글을 몰라서 무덤 앞 묘지의 묘표를 보고도 아버지 무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생각한 방법은 주변의 묘표를 무작위로 뽑아 들고, 윤봉길 의사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달라고 청한 것이다. 청년의 이 같은 행동으로 묘표를 잃어버린 무덤들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연분묘가 되고 말았다. 그 청년의 아버지 무덤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본래 묘표에 맞는 무덤의 위치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든 것이다.

이 일로 윤봉길 의사는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한다. 이 노력의 과정에서 점점 분명해지는 게 있었다. 그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난다. 그의 나이 23세때 일이다.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윤봉길 의사는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마저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그 돈을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 간 일을 했다.

1931년, 비로소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가 24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만나기까지, 그렇게 큰 뜻을 품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던 상하이. 그곳에 내가 지금 서 있다.

상하이에서 찾은 생애사적전시관

이른 아침 윤봉길 의사의 의거지인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으로 향했다. 전날 정신 없이 상하이에 도착하여 도심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반대로 공원은 한적할 줄 알았지만, 역시 중국은 이른 아침 공원에도 사람이 많았다.

나이가 지극하신 분들로 가득했다. 공원은 한낮처럼 활기 찼다. 홍커우 공원의 루쉰 동상을 지나 계속 들어가다보니 비석 하나가 보였다. 좀처럼 외국어를 볼 수가 없는 중국에서 반가운 한글이 당당히 적혀 있는 비석이었다.

이 비석의 자리는 원래는 일본 비석이 있던 자리에 그 비석을 대신에 윤봉길 비석을 세운 것으로 실제 의거지와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홍커우공원(루쉰공원)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 비석 ⓒ 이근주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
윤봉길(호: 매헌 梅軒)의사는 한국인으로서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항일구국 투쟁에 투신하여 1930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침략군이 이곳에서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을 거행할 때 하객으로 가장하고 행사장에 들어와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 주둔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시키고 여러명의 일본 주요관원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네자와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다."
 
비석을 지나 걸어 들어가니 또 하나의 입구가 보였다. '윤봉길의사 생애사적전시관'이 있었다. 이렇게 별도로 갖춰져 있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이제서야 알게 된 나 자신에 민망함이 밀려왔다. 다른 나라에서 조차 이렇게 전시관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 국민들은 상하이에 와서 이곳을 얼마나 찾고 있을까? 나만 몰랐던 일인가? 감사하면서 민망했다.

전시관에서 영상으로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애니메이션으로 소개하고, 의거 당시 실제 영상자료와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그의 뜻이, 그의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일이 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의 순국 당시 실제 사진도 나와 있었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중국이라는 이국 땅, 의거지 현장에서 보는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다시금 가슴 속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까? 의거 당시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 안내 책자 - 배우 송혜교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의 후원으로 제작 되었다. ⓒ 이근주


많은 매체에도 나왔지만 홍커우 공원에는 공원 바닥에 붓으로 물을 묻혀 한글로 한자 한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분도 계셨다. 그분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루에 몇번의 글을 쓰시는 것일까? 이곳 사람들은 한국인 영웅으로서 윤봉길을 기억해 주고 있구나. 신기하고 고마웠다.
 

송경령능원의 외국인 묘지 입구, 뒷쪽으로 외국인묘비들이 들어서 있다. ⓒ 이근주

 
공원에서 느낀 만감의 여운을 안은 채로 '송경령능원(만국공묘)'로 향하였다. 송경령능원은 쑨원(순문)의 부인 쑹칭링(송경령)이 유언으로 사후에 상해에 있는 외국인묘지에 묻어 달라는 뜻에 따라, 이곳에 묻힌 후, 송경령능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묘가 10여구 이상이라고 한다.

이 중에 확인된 5기는 다행스럽게도 93년 8월 5일 한국 현충원으로 봉환되었다(신규식, 김인전, 노백린, 박은식, 안태국 등 독립운동가). 이장된 후에도 가묘가 남아있어 묘비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에 아직 남아 있는 다른 한국 분들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찾고 정리해야 할 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여운을 안긴 상하이를 뒤로하고 다음 장소인 자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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