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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7.24 19:34 수정 2019.07.24 19:34

윤봉길 의사 순국 당시 모습(매헌기념관 촬영) ⓒ 조종안

 
옛날 신문에 따르면,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루쉰공원) 폭탄 투척 현장에서 일본 군경에 제압된 윤봉길 의사는 그해 5월 25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8일 일본으로 호송된다. 우연인지, 아니면 일제의 음흉한 의도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윤 의사는 자신이 던진 폭탄에 즉사한 시라카와 사령관 유골과 한 기선(汽船)을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윤봉길. 일제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공개 처형하려 했으나 그렇게 될 경우 윤 의사가 국제적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점과 여론의 집중 화살을 맞게 될 것 등을 우려해 포기한다. 대신 일제는 그해 12월 19일 일본 육군 9사단(시라카와 사령관 출신 부대) 주둔지였던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 시신을 노다산 쓰레기하치장 부근에 암매장한다.
 
윤 의사는 일본 군경에 끌려가 순국하는 그날까지 온갖 폭행과 고문에 시달린다. 일제는 김구 선생 정보를 캐내려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윤 의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윤 의사의 함구와 '교란 진술'로 미국인 피치 목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는 피치 부부 도움으로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자싱)의 주푸청 수양아들 별채로 몸을 피신할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의 옛 피난처
 

상하이-자싱 중간에 위치한 시골풍경 ⓒ 조종안

 
지난 6월 1일~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둘째 날(2일)은 오전 8시 호텔을 출발,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루쉰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지, 매헌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다섯 분(신규식, 박은식, 안태국, 김인전, 노백린 등)이 잠들어 있던 만국공묘(송경령능원) 등을 돌아보고 김구 선생 피난처가 있는 자싱(嘉興)으로 이동했다.
 
오전 10시 15분 상하이에서 출발한 버스는 12시 5분 저장성 자싱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동안 창 밖으로 넓은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자싱은 상하이-항저우 중간에 있는 교통도시로 알려진다. 주변에 풍치가 뛰어난 호수와 운하가 많아 '물의 도시'란 애칭을 얻었다. 특히 남호(南湖)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 피난처였던 자싱시 매만가를 감싸고 있다.
 

김구 선생 피신처가 있는 매만가 모습 ⓒ 조종안

  
탐방단은 공용주차장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매만가 76호로 방향을 잡았다. 위엄이 느껴지는 옛 건물들이 무척 이채롭다. 사극 드라마 세트장 같은 호젓한 골목길을 5분쯤 걸었을까.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가 적힌 한글 현판이 보인다. 김구 선생이 '장진구', '장진'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머물렀다는 그 별채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도와준 중국인들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매만가는 거리 자체가 굉장히 귀한 장소죠. 1층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별채는 주푸청 선생 수양아들(진동생), 저쪽 임정요인 거주지였던 일휘교 17호는 친아들(저봉장), 조금 이따 우리가 갈 재청별장은 며느리(주가예) 친정 소유 건물입니다. 이렇게 주푸청 선생 흔적들이 김구 선생과 연계돼서 남아 있는 겁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죠.
 
주푸청 선생이 대단하다고 자꾸 말하는 것은 그분과 김구 선생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는 겁니다. 있다면 오직 일제에 맞서 싸우겠다는 항일의식... 그런데도 국민당과 연결된 박찬익이 찾아와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어렵게 됐다며 도와달라고 하니까 한마디로 '오케이'하면서 일괄지원, 즉 온 가족이 나서서 도왔던 것이죠. 60만 원(현 가치로 200억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선생을..."
 

김종훈 기자 설명대로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수백 명의 밀정을 심어놓는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를 떠나야 했고, 중경(충칭)에 정착하는 1940년까지 여러 도시를 전전하는 고난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가흥, 해염, 항주, 남경 등에서의 3년여. 그때 위험을 감수하며 도왔던 인물이 주푸청(저보성)이다.
 
주푸청은 절강성 가흥(현 저장성 자싱)이 고향으로 장제스(蔣介石)의 막료이자 지역에서 명망 높은 유지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과 며느리, 양아들까지 동원해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호했다.
 
새로운 임시정부 체제 구축
 

김구 선생이 타고 다녔던 조각배(재현) ⓒ 조종안

   

이웃 건물에서 바라본 김구 선생 피난처 ⓒ 조종안

 
주푸청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김구 은신처'를 알리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호수와 맞닿은 별채 뒤에 조각배를 24시간 대기 시켜 놓았다. 그리고는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부부로 위장, 위기 때마다 배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백범일지>에 나오듯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자는 선상생활이 지속됐다.
 
가흥으로 피신은 생사를 건 도피 생활의 연속이었다. 일경의 감시와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중국인으로 행세했다. 낮에는 주로 주애보와 함께 조각배에서 지냈다.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2층 침실의 비상탈출구를 통해 호수로 피신했다가 어둑해지면 빨랫줄에 걸린 빨래 색깔을 보고 안전을 확인한 뒤 귀가했다. 붉은 고추는 안전, 검은 적삼은 위험표시였던 것.
 
김구 선생은 피신생활 속에서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독립군 양성을 위해 힘을 쏟는다. 독립운동 세력 통합 과정에서 항주 임시정부가 이합집산으로 존폐위기에 몰리자 1935년 10월 이동녕, 엄항섭 등과 남호의 놀잇배 선상에서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국무위원을 선출, 김구 중심의 새로운 임시정부 체제를 구축한다.
 

복원해놓은 김구 선생 침실 ⓒ 조종안

 
일행은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부엌, 목욕탕, 옛 가구 등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이다. 전시실 우측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김구 선생이 생활했던 공간이다. 선생이 사용하던 옛 가구 형태의 침대와 옷장이 전시돼 있다. 바닥 한쪽 널빤지로 된 비상탈출구를 보는 순간, 하루도 마음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선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김구 선생이 타고 다녔던 조각배도 재현해 놓았다. 탐방단은 옆 건물로 이동, 조각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휘교(日暉橋) 17호를 돌아봤다. 이곳은 항주 임시정부 시절 주요 인사들과 그 가족이 피난 생활을 했던 공간이다. 건물 1층은 전시실, 2층은 임정 요인들이 사용했던 침구와 생활공간을 복원해 놓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거주했던 일휘교 17호 ⓒ 조종안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지근에 살면서도 상대방 안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고 좁혀 오는 일제의 포위망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김구 선생은 피신처를 재청별장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 아래는 김종훈 기자의 부연 설명.
   
"여기 일휘교 17호는 임시정부 요인들 피신처였습니다. 임정 요인들은 일휘교에서 지내고, 김구 선생은 매만가 76호에 거주하면서 수개월 동안 서로 존재조차 모르고 지낸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고 거리에 밀정들이 쫙 깔린 걸 알게 됩니다. 결국 김구 선생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재청별장으로 피신하게 되죠."
 

주푸청(왼쪽)과 주가예(오른쪽) ⓒ 조종안

 
일제 밀정들의 탐문이 가흥에까지 미치자, 주푸청은 김구의 안전을 위해 피신처를 해염(하이엔)의 재청별서(재청별장)로 옮기게 한다. 재청별서는 남북호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피서지로 주푸청 큰며느리(주가예) 친정 소유 별장이었다. 시아버지 연락을 받은 주가예(주자루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을 재청별장까지 안내한다.
 
"저씨 부인(주가예)은 굽 높은 신발을 신고 7, 8월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씨 부인의 친정 여자 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하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남긴 글의 한 대목이다. 절실했던 김구 선생 심정이 헤아려진다. 선생은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 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라고 덧붙인다.
 
주가예는 재청별장에 도착해서 그곳 고용인에게 김구 선생의 식성과 여타 모시는 방법 등을 지시한 뒤 본가로 돌아간다. 당시 주가예는 자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주풍장(저봉장)과 혼인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신혼 주부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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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