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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08 08:36 수정 2019.11.11 09:22
장암지서 앞에 선 강은모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눈을 딱 감고 지서 문을 열자 십여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는 정면을 제대로 응시도 못한 채, "북교리 사는 강은모입니다"라고 우물거렸다.

"빨갱이 새끼 이리 와."
"이제 교대하면 되겠구만."


지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킥킥 거렸다. 지서 안 유치장 입구로 걸어가던 강은모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몸으로 실신한 여성... 경찰의 만행

김준성(가명) 어머니가 옷이 홀딱 벗겨진 채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 아주머니인 그녀는 남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끌려 와 방금 매타작을 당한 모양이다. 온 몸에 구렁이가 기어 다닌 것처럼 시퍼런 매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훌쩍 거렸는데, 옷이 전부 벗겨진 채 매타작을 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몇 차례 혼절을 했던 그녀가 축 늘어졌을 때, 마침 강은모가 들어왔다. 경찰이 매타작 할 대상을 교체한 것이다. "야 이 자식아 엎드려뻗쳐." 양쪽에서 몽둥이가 날아왔다. 강은모는 악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이 새끼가 엄살은." 다시 엎드려 자세를 취하자마자 몽둥이 세례는 이어졌다. 하지만 매타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은모가 혼절을 하면서 혀가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때리는 건 더 이상 무리였다. 

강은모는 지서에서 매타작을 당한 후 지서 앞 방공호에 수용되었다. 장암지서에서는 6.25 후에 지서 정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길게 방공호를 팠다. 그곳에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부역혐의자 20여 명을 구금해 놓았다. 이들은 방공호에서 10여 일 동안 '포로 아닌 포로' 취급을 받으며 지냈다. 그런데 강은모는 인공시절 아무런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 단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매타작을 당하고 방공호에 포로처럼 갇혔다. 

경찰과 치안대의 감시 속에서 방공호에 갇힌 그에게 사달이 났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당시는 장티푸스에 걸리면 죽는 것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경찰은 병이 다른 이들에게 전염될까봐 지서 인근에 있던 강은모의 고모에게 연락했다. 고모는 등잔 밑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조카에게 다가가 몸을 흔들었다. "은모야"라고 불러도 환자는 말이 없었다. 가족들을 불러 강은모를 한의원으로 옮겼다. 환자의 상태를 살핀 의사의 말은 절망적이었다. 

"닭 울기 전에 깨어나면 살고, 깨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다행히도 강은모는 닭이 울기 전에 깨어났다. 깨어난 그에게 미음을 먹이니 몸을 추스렸다. 장티푸스에 걸려 혼절한 후 몸을 추스르고 집에 간 것은 근 한 달 만 이었다.
 
열여덟 청년은 왜 끌려갔나
 

강태구 가족사진강태구 가족사진. 제일 우측이 강태구. 가운데 아기는 후일 의용군에 끌려 간 강영모. ⓒ 박만순

 
당시 열여덟에 불과했던 청년 강은모가 지서에 불려가 매타작을 당하고,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그는 부역 행위를 하기에도 어린 나이였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도람말에 살던 아버지 강태구는 서울로 상경해 전문학교를 다닌 후 전차운전을 했다. 그러다가 고향 임천광산에서 일하면 돈 번다는 소문이 있어 낙향을 했다.

임천광산에서 금을 캐는 일을 했지만, 월급은 시원찮았다. 결국 그는 광산 일을 때려치우고 한량처럼 지냈다. 서울에서 유학했던 지식인이라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며 농촌에서 파묻혀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랬던 그라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구장(이장)도 보고, 보리수확을 할 때는 마을 사람 수십 명을 동원해 공동노동을 하기도 했다.
 

공동 보리수확장암면 월촌부락 공동 보리수확 가운데 깃발을 들고 있는 이가 강태구(당시 마을 이장) 1942년 6월 16일 ⓒ 박만순

 
해방 후에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좌익 활동에 관여했다. 부여경찰서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경찰서에 다녀 올 때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집안 살림은 해가 갈수록 기울어졌다. 결국 남로당활동을 접고, 자수해 집에서 조용히 농사일에 전념했던 그였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야심한 시각에 형사 세 명이 찾아왔다. "강태구씨 잠깐 서에 갑시다." 그렇게 연행된 강태구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그가 연행된 다음 날 그의 어머니가 옷 보퉁이를 안고 부여경찰서로 갔지만 면회는 거절되었다. 자식 소식에 애가 타던 차에 같이 끌려 간 장암면 지토리의 유인범이 소식을 전해왔다.

"태구는 대전형무소로 실려 갔어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형편'에 아들 면회를 하러 대전으로 간 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 왔다.
 
서로 총을 겨눈 의용군


강태구가 산내에서 학살된 후 그의 남은 가족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인민군이 온 것이다. 무슨 혜택이나 식량거리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장남을 의용군으로 보내라고 통지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당시 스무살이었던 강영모는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부여중학교를 다니다 공주사범에서 몇 개월 교사교육을 받고,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 있던 남산초등학교 교사로 1년 정도 근무한 때였다. 당시 북한군은 정규군이 모자라자, 장암면에서 교사, 중학생 등 똑똑한 젊은이 약 30명을 모아 의용군으로 전선에 배치했다. 강영모가 그런 상황에서 의용군으로 갔지만, 누구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게 싫은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졸업사진남산초등학교 2회 졸업사진. 좌측에 큰 사진이 강영모. 공주에서 교사교육을 받느라 졸업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 박만순

 
북한군이 후퇴할 당시에 3.8선 못 미쳐 장암면의 세 청년은 '북이냐, 남이냐'의 기로에 섰다. 강영모가 입을 열었다. "북에 가봐야 별 볼일 없고, 남에 가 봐야 죽을 게 뻔하다. 여기서 모두 죽자"며 총을 들었다. 서로 총을 쏴 함께 죽자는 것이었다. 강은모는 아버지가 예비검속으로 학살을 당했고, 자기도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으니 남한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같이 있던 강석우(장암면 장하리)가 반기를 들었다.

"왜 자살 혀! 난 그렇게 못하겄네"라고 했다. 결국 그들은 북한으로 올라가 강은모는 평양에서 살고, 강석우는 강원도에서 지냈다. 이는 '제3차 남북이산가족찾기' 때 북에 살던 강석우가 남한의 강내구를 상봉해 전해 준 이야기다.

죽지 못해 산 삶

가장 강태구가 학살되고 장남 강영모가 의용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자, 강은모는 18세에 가장이 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본인을 포함한 7남매, 즉 아홉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집안에는 논도 밭도 없었다. 봄에는 쑥과 무궁화 이파리를 뜯어 끓여 먹었다. 겨울에는 감자가 주식이었다. 부여 금강 너머의 들에 버려진 음식쓰레기를 주워다 먹기도 했다. 걸인이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산 삶'이었다.

마을 뒷산은 민둥산이라 비만 오면 논밭이 산 흙으로 덮였다. 마을에서 가장 여유가 있던 강석기씨 논밭이 망가지면 강은모 식구들의 뱃구레가 기지개를 켠다. 그 논밭에 가서 여름 내내 흙을 져 나르는 일을 해, 하루 품삯으로 쌀 한 되박을 얻는다. 그 쌀로 며칠을 견뎌내는 것이다.

장암면의 구렁개펄에서도 식량 아닌 식량을 얻었다. 그곳에는 참외밭이 있었는데, 넝쿨 깎는 일을 해주면 하루 품삯으로 파란 참외를 준다. 파란 참외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것으로 주로 장아찌를 담아 먹는 것이다. 그런 참외를 얻어 와 아홉 식구가 허기를 달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칠남매 중 막내만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병사계에서 영장이 날라 왔다. 하지만 강은모가 군대에 가면, 남은 식구는 굶어 죽을 판이었다. 부여군 입대자들을 모아 충남 예산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이면 기차 타고 훈련소를 가야 했다.

열차에 타기 전 어느 학교에서 최종 신체검사가 실시되었다. 강은모는 꾀를 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척 하기로 했다. 군의관이 묻는 말에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원래 귀가 안 좋아, 당시 귀에서 짓물이 나왔었다. "야 임마 가." 군의관의 말에 '얼싸 좋다'며 되돌아서면 귀가 들린다는 것이 들통나고 만다. 그는 못 들은 척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군의관이 화를 내며 "야 임마. 가라고"하며 그의 등을 밀쳤다. 그제서야 강은모는 신체검사장을 나왔다. 
 
"죽기 전에 형님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오"
  

증언자 강은모 ⓒ 박만순


강은모는 일찌감치 운수 일을 하던 동생의 영향으로 대전 가서 운전을 배웠다. 당시 동생은 대전에서 택시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운전을 배운 지 한 달 만에 할머니가 세상을 하직했다. 삼년상을 못 마치고 대전으로 이사했다. 자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대전에서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택시 한 대에 강은모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다 보니 죽기 살기로 일했다. 어느 날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데 아내가 불렀다. "여보 그 차림으로 출근하세요?" 강은모가 자신을 바라보니 잠옷 차림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 74세까지 택시 일을 했다.

이제는 쉴 만한 나이인데 병마가 찾아왔다. 몇 년 전 허리수술도 하고, 지난 6월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강은모(87세.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는 "죽기 전에 형 얼굴 한번 볼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라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공동체의 파괴'라는 말은 강은모에게 딱 맞는 말이다. 아버지 강태구의 진실규명도 이루지 못한 그에겐 형님 얼굴 한 번 보는 게 더 큰 바람인 듯하다. 살아 있다면 올해 89세인 강영모는 이런 동생의 마음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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