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6 19:43최종 업데이트 19.11.1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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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청사 ⓒ 김선희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나는 '임시정부' 하면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태극기 앞에서 결연하게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이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켜켜이 묻어둔 추억의 기록만은 아니다.

100여년 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개인이 걸었던 길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그렇게 임시정부에 참여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모여 '조선독립운동'의 역사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역사는 과거가 되었지만 그 역사는 현재에도 이어져 있으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갈 역사가 될 것이다.

과거 - 임시정부의 발자취 : 시간이 멈춘 '섬'

상해는 현재 인구 2천 명이 넘는 중국 제1의 도시이며, 세계 어느 대도시 못지않은 규모와 경제력을 가진 곳이다. 그렇기에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화려함과 번화함 속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년 전의 상해에 들어온 세계 열강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머릿속으로 그려야 그 때 우리 독립운동가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듬을 수 있다.


수많은 고층 빌딩이 무수히 뻗어 있는 서금이로 어딘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태어난 건물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H&M'가 들어선, 대도시 한복판의 상점 건물 자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번째 청사가 있었다.

나는 길을 걷는 수많은 중국사람들에게 치이며 임시정부청사 건물을 바라봤다. 그 순간 마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가 시간이 멈춘 채 현재 상해의 그 자리에 '섬'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해 황푸 강변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야경이 만들어지는 그 자리는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 의열단원들이 처절하게 의거를 행했던 장소다. 그렇게 상해의 현재에는 과거 우리 독립운동 역사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윤봉길 의사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영경방-김구 가족 거주지 ⓒ 김선희


지난 8월 중순 3박4일 일정으로 다녀온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임시정부 탐방'은 한 개인의 삶이 국가와 사회, 민족의 처한 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처참한 지배 아래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100여년 전의 식민지 조선인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을 되찾지 않는 이상 주어진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또한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일제식민지 조선을 살아간 윤봉길 의사도 그런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의거를 결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이나 짐작해 본다.

그 젊은 청년의 의거는 일본의 침략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던 중국인들에게 큰 경각심을 갖게 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조차 하지 못했던 거사를 조선의 한 청년이 해내면서, 임시정부의 존재는 중국인들에게 각인됐다. 이후 중국 내 임시정부의 위상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두 아들에게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아비로서 이 말을 남긴 윤봉길 의사의 심정은 지금의 나에게도 울컥하는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조국을 찾는 용사들'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 김선희


난징 교외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혼자서는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그 곳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있으나, 이정표 또한 제대로 돼 있지 않았고 군데군데 걸려 있는 여러 색깔의 리본과 아이들이 손수 만든 이정표가 '천녕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현재는 산림보호를 위해 만든 건물들이 폐허처럼 남아 있었으며,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김원봉은 그곳의 교장이었고, 박건웅, 이동화 등 의열단원은 교관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잘 아는 이육사 시인도 간부학교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조촐하게나마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인사를 올렸다. 또 다함께 1940년대 광복군의 대표적인 노래, 압록강 행진곡도 불렀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도 낭독했다. 너무 늦은 인사였을까. 그래도 이렇게라도 찾아와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는 마음들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잊지 말자 일본의 만행 - 난징대학살 기념관

1937년 12월부터 약 2달 동안 난징에서는 30만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됐다. 중국인들에게도 난징대학살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에, 남경을 찾는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곳에 꼭 들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평일임에도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기념관을 찾아 떠밀리며 돌아봐야 할 정도였다.

중일전쟁 중이었다고는 하나, 아무런 이유 없이 민간인 30만 명을 죽인 일본의 대학살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다. 난징 대학살은 전쟁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누가 더 빨리 중국인들을 죽이나 내기를 하고, 사람을 죽인 뒤 묻을 곳이 없다며 태우고, 몰살하고, 묻고... 잔인한 살인 방식이 모두 동원되었다. 1937년 난징은 처참하고 처절했다. 그러나 그 대학살에 대해 일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르지 않는 눈물 -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이제항위안소 ⓒ 김선희


북한에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는 2003년 리지샹 위안소를 찾아 자신이 19번방에서 생활했다고 직접 증언했다. 그 후 이곳에 대한 보존 결정이 내려졌고 2015년 정식으로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개관했다. 당시 난징에는 리지샹 위안소뿐 아니라 60여 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이곳은 중국을 점령한 일본 총통부 건물과 불과 200m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위안소 유적 진열관에선 난징대학교에 다니는 강하나 학생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난징대학교에 다니면서 이곳에 몇 번 와봤다. 어느 날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긴 복도에 홀로 서 있게 되었는데, 그 순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서 느꼈을 무서움, 두려운 마음들이 전해져 왔다"라고 말했다. 이후 할머니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유적진열관 자원봉사를 신청했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눈물'이라는 주제로 만들어진 리지샹 위안소의 벽에는 큰 눈물이 매달려 있다. 고통과 아픔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심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마지막 길목에선 부조로 만들어진 중국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중국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울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것을 상징하듯 할머니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흘렀고, 그 옆에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도록 손수건이 놓여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본 뒤 자유 관람 시간을 주었을 때 다시 할머니에게로 찾아 갔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드렸다. '할머니, 이제는 울지 마세요.'

현지 가이드는 난징대학살 기념관과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 등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일본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등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역사를 바로잡는 일 또한 국력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현재의 대한민국  

요즘 거리 곳곳에서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일본 불매운동을 한다.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과 전혀 다른,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설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성장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아가야 할 길은 멀다.

중국에는 이미 임시정부기념관이 있지만 한국은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임시정부 정통성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섬'처럼 느껴진 것처럼, 오늘날 한국에서도 여전히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외로운 '섬'처럼 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역사가 제대로 쓰이지 못해 여전히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하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고국을 떠돌며 제대로 된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일제식민지 역사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미래로 닿아 있는 길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청사-태극기 ⓒ 김선희

 
우리 아이들은 알까.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편안함이 누군가의 땀과 눈물, 고귀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제강점기 역사는 나와는 상관없는 그냥 책에서만 배우는 역사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김구 선생께선 대한의 자주 독립을 위해선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17년 이상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부끄럽게도 3박 4일 그 짧은 시간들 속에서 교육이 필요한 이유, 교육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더 절실히 느끼게 됐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쓰기 위해서는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과 국가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그런 우리나라를 끌어갈 수 있는 것은 1%의 소수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우리나라 국민들의 힘이 있어야 함을 다시금 느꼈다. 그렇기에 임시정부 탐방을 마치고 난 후의 이 느낌들을 교육자로서의 내 삶에 녹여 아이들에게 전해야 할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이전과 같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루하루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이전과는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키울 수 있는 '미래'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100년 전 그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 나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사로부터 현재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과거 역사의 과오를 되새기며 미래를 만들어갈 아이들과 함께 현재를 살아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로 쓰려 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익산궁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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