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6 14:54최종 업데이트 19.12.2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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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중심 가옥이었던 한옥이나 양옥집 안방에는 어느 곳이나 비슷한 가구가 하나씩은 있었다. 처음 집을 마련할 때 장만하거나 혼수품으로 준비하던 이 가구는 '자개농' 또는 '자개장'이라 불렀다. 이 가구는 전통적인 나전칠기를 바탕으로 개량한 근대식 가구였는데, 마치 생활의 안정을 얻은 가정의 기준이라도 되듯 한국 근현대기의 안방을 지켜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 현대화된 아파트로 거주 공간이 바뀌어가자 각 집의 안방은 실용적인 서양식 가구로 바뀌었다. 이제 자개농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려지는 처지에 처하게 된다. 약 100여 년 동안 한국인의 삶을 지탱했던 아름다운 자개농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근대화의 마지막 뒷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오래 시간 한국인의 삶과 함께 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자개농은 근대기에 나전칠기 공예를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려 노력하였던 한 천재 공예가의 노력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었다. 그의 이름은 한국 '근대 나전칠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수곡(守谷) 전성규(全成圭, 1880-1940)이다.

전성규의 나전칠기 입문과 삼청동 공방

전성규의 출신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일설에 의하면 서울 출신 상궁(尙宮)의 양아들이었는데, 궁궐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 궁중 공예품을 어려서부터 가까이에서 접했다고 한다.

전성규가 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29세 때의 일이다. 그는 어느 날 '고전적 조선색(朝鮮色)'을 가진 나전칠기를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된다.

전성규는 궁중에 진상하는 나전칠기를 만들던 '삼청동 엄(嚴)씨 공방'에 들어가 배우려 하였으나 그들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공장 부근에서 노는 체 하며 눈치로 넘겨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창문을 뚫고 보며 배우는 등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렇게 한 지 1년 만에 자개 껍질을 닦고, 깎고, 오리고, 박는 법과 칠하는 법을 모조리 배웠다.

그런데 전성규에게는 다른 장인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나전칠기 제작의 바탕이 되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도안(圖案)'을 그려내는 능력이었다. 그는 도안 구성 능력에서 다른 이들과 수준이 달랐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산수문(山水紋)'이었다. 특히 금강산 풍경을 바탕으로 한 도안은 특히 뛰어났다. 그는 도안 재주를 바탕으로 다양하면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삼청동 엄씨 공방의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전성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공장을 인수한다. 그동안 자신을 멸시하던 전통 장인 6인은 이제 거꾸로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전성규는 이들을 포용하여 삼청동 작업장을 더욱 굳건한 곳으로 만든다.

특히 그는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에도 관심이 많아 전 국민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나전칠기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호화로운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나전칠기 가구의 상품화를 꾀하였다. 실용적인 가구의 대량 생산이라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화된 근대 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일본 조선나전사에서의 새로운 공부
 

전성규 ‘난초문 화대’ ⓒ 황정수

 
삼청동 작업장이 자리를 잡자 전성규는 1919년부터 김복룡(金奉龍, 1903-1994), 송주안(宋周安, 1901-1981), 심부길(沈富吉, 1906-1996) 등 재능 있는 제자들을 모아 기술을 전수시킨다. 이들을 가르치며 수공업 수준을 넘어서 나전칠기의 대량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공장 경영을 계획한다. 그래서 나전칠기의 본 고장인 통영에 대규모 공장을 설치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실패를 하고 만다.

전성규는 새로운 사업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1920년 김복룡, 송주안 등 제자들과 일본 도야마현(富山縣) 다마오카시(高岡市)에 있는 '조선나전사(朝鮮螺鈿社)'에 취업하여 새로운 기술과 사업 수완을 배운다.

당시 '조선나전사'는 한국에서 나는 청패(靑貝)를 사용하여 일본인 취향에 맞는 나전칠기 작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 나전칠기의 종주국을 자부했던 한국에서는 보지 못하던 좋은 작업 환경과 과학적 기능이 추가된 새로운 도구의 사용이었다.

특히 시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세공용 줄 톱의 발견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그동안 한국의 공방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도구는 세밀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금속 세공용 줄 톱은 전통적인 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와 아울러 나전무늬를 도안화 하는 새로운 방법의 습득도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배움이 한국 나전칠기 공예를 한층 발전시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일본에서 돌아온 전성규는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이전에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다시 한 번 각광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은 디자인이 새로웠을 뿐 만 아니라, 자개의 세공이 눈부시리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기술은 그의 창조적 상상력이 더하며 한층 빼어난 예술품을 만들어 내었다.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떨치다
 

전성규(오른쪽), 김봉룡과 박람회 수상 작품. ⓒ 동아일보

 

1924년 전성규는 겨울 느닷없는 소식에 가슴 설렌다. 이듬해인 1925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만국미술공예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새로운 기술로 압도적인 작품을 만들던 전성규에게 작품을 출품할 것을 권유한다.

전성규는 제자 김봉룡과 함께 밤낮을 잊고 작업에 몰두하여, 화병 한 점과 작은 서랍 그리고 합 등 모두 세 점을 만든다. 작품의 제작이 끝나자 전성규는 이 작품들을 직접 들고, 도쿄에 있는 농상무성으로 출품을 위해 떠난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파리공예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은 김봉룡의 작품이 '은상', 전성규의 작품은 '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한국인의 공에 작품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수상하는 첫 쾌거였다.

전성규, 김복룡의 수상은 전적으로 전성규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출품을 따낸 것, 출품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 모두 오로지 전성규의 몫이었다. 돈을 마련한 것도 그요, 작품을 제작한 것도 그의 공방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작품 중 한 종류는 그의 이름으로, 한 종류는 아끼는 제자인 김봉룡의 이름으로 출품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전성규의 가슴은 열려 있었다.

작품의 세계화를 위해 제자를 양성하다

파리 만국공예미술박람회에서 수상하여 유명해진 전성규는 이후 작품 제작과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다. 1927년 장곡천동(長谷川町, 현 중구 소공동) 106번지에 4년제의 나전실업소(螺鈿實業所)라는 나전기술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이곳의 과정을 보면 나전칠기를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년여였다. 3년 정도는 해야 겨우 도안을 이해하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전실업소는 훌륭한 나전칠기 장인을 양성하고 제품 제작에 힘썼으나 쌓여가는 재정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세계에 드날렸던 전성규의 나전칠기에 대한 꿈은 이렇게 사라지는 아픔을 맞는 듯하였다. 한동안 상심하고 있던 전성규는 삼청동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1934년과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나전칠기 작품을 출품한다. 1934년에는 '나전 벼루집(螺鈿硯筥)'을 출품하였으며, 1937년에는'산수 책상(山水机)'을 출품한다. 그가 작품을 출품한 것은 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할 만한 자격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폐쇄적 운영 때문에 심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옷 칠로 유명한 평안북도 태천군에 '태천칠공예소(泰川漆工藝所)'가 설립되자 전성규는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이곳에서 나전칠기의 후진 양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창설했던 '나전실업소'의 실패를 거울삼아 훌륭한 칠공예소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후진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애쓰던 전성규는 1940년도 칠공예소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아쉽게 세상을 떠난 전성규는 고려, 조선을 거치며 전통적인 방식을 답습하던 나전칠기를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여 더 한층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시계 공장에서 사용하는 서구식 실톱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자개를 여러 장 포개어 여러 개의 동일한 무늬를 단번에 썰어 내거나, 무늬 복사용지를 사용하는 등 작업능률을 향상시킴으로써 전통기법을 개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현재 전하는 전성규의 작품에 대하여
 

전성규 ‘산수문 책상’ 1920년대 ⓒ 황정수

 
전성규는 나전칠기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제작한 최초의 근대 공예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2년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실물 작품이 없었다. 그동안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던 그의 작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하였을 당시 도록에 실었던 두 점의 작품을 확인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근래에 일부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여러 점이 발견되어 현재 세상에 알려진 것이 대여섯 점 정도가 있다. 커다란 대궐반 형태의 것이 두 개 있고, 화병을 올려놓는 화대가 두어 점 되며, 합 종류가 또 두어 점 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연구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전성규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만큼 더 많은 작품이 발굴될 가능성이 많다.

현재 전하는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수문 책상(山水机)'이다. 개인 소장의 이 작품의 상판에는 전통적인 남종화풍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전성규는 나전칠기의 문양을 연구하기 위해 수묵화를 배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입선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 작품에 사용된 그림의 솜씨는 어느 화가의 그림 못지않게 뛰어나다.

또한 2018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한제국의 미술'전에 출품된 '난초문 화대' 또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화병을 올려놓는 화대로 제작된 것인데, 상판에 김정희 등 조선의 문인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뛰어난 난초 그림이 새겨져 있다. 게다가 일본의 '조선나전사'에 있을 때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밖에 도판으로 전하는 작품들도 모두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전성규의 솜씨가 다른 이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수준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근대화시기에 답보 상태에 있던 전통 나전칠기를 새로운 기술로 더 한층 발전시킨 전성규의 작품이 더 많이 발굴되어 그의 작품 세계가 온전히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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