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5 13:48최종 업데이트 20.0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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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은 어디까지 남아있을까? 헝가리 부다페스트 스프링 페스티벌을 함께했던 문화원장을 3년 만에 만나기로 했다. 임기가 끝나고 한국에 들어오면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하지만 기억의 또렷함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3일 전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3년 전 일을 조금 전 일처럼 기억하기도 한다. 나는 문화원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내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3년 전 일을 되돌아보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해마다 4월이면 봄 축제가 열린다. 2017년 봄에는 '한국의 날 행사'가 따로 열려 한국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한글과 K-POP을 배운 헝가리 사람들도 참여하는데, 그 속에 막걸리 빚기와 한국 대표 술 20여 종의 시음 행사도 잡혀 있었다.


한국의 날 행사는 창밖으로 도나우강이 내려다보이는 컨벤션센터 발라(Balna) 행사장에서 3일 동안 진행됐다. 한국술을 맛보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섰던 헝가리 사람들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을 한국 술에 왜 호기심을 갖는 걸까? 외려 술을 따르는 내가 더 궁금했다. 바로 옆 행사장에서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연을 만들고, 탁본을 하고, 바둑을 두고, 한국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K-Pop 음악에 맞춰 여럿이 함께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그 열정과 기쁨을 보면서, 한국 술도 한번 맛보고 싶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은 도나우강의 야경이었다. 하루 행사가 끝나면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에 어린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느리게 걸어 숙소로 향했다. 강 건너 겔레르트 언덕 정상에는 종려나무 잎을 든 소녀상이 흰 조명 속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수도사 겔레르트는 1045년에 이교도들에 의해 못이 박힌 와인통에 갇혀 도나우강으로 굴러떨어져 순교했다고 전한다.

행사가 끝나고 헝가리 한국 대사의 초대를 받아 대사관저에서 만찬을 했다. 헝가리 대사는 프랑스에서 서기관과 참사관을 지내기도 해서 와인에 해박했다. 공직자로서는 내가 만난 최고의 술 전문가였다.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 술이라는 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나는 감홍로로, 대사는 토카이 와인으로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헝가리에서는 해외 공관에 근무하는 자국 외교관들에게 공식 행사에서 의무적으로 헝가리 와인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대사는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아직 그런 훈령이 없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에서 열린 와인 축제
 

포도밭과 마을을 배경으로 와인 시음을 하다. ⓒ 막걸리학교

 
우리를 정식으로 초대했던 문화원장도 우리에게 선물을 줬다. 수고했다며, 우리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부다페스트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으니, 가까운 양조장이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문화원장은 7살 딸을 데리고 흔쾌히 운전대를 잡았다.

헝가리는 22개 권역으로 와인 산지가 구분돼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것은 토카이(Tokaj) 와인이다. 토카이 와인은 11월 중순쯤에 포도를 수확한다. 이때쯤이면 포도가 수분기도 줄어들고 껍질에 곰팡이가 피는데, 이 포도로 술을 빚으면 꿀물이 연상될 정도로 달콤한 맛이 돈다.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의 쏘떼른, 독일의 아이스바인과 함께 세계 3대 스위트와인으로 꼽힐 만큼 국제적인 명성도 얻고 있다. 토카이 산지는 부다페스트에서 동북쪽으로 230㎞가 떨어져 있으니 당일로 그곳까지는 갈 수 없어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와인마을 에텍(Etyek)을 찾아갔다.

에텍은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30㎞가 떨어져 있다. 마침 주말을 포함한 3일 동안 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느지막이 출발해 오후 다섯 시쯤에 에텍 마을에 도착했는데, 가설 무대도 없고, 화려한 천막도 없는 소박한 마을 축제였다. 마을 입구의 천막에서 와인 잔 하나씩을 사서 마을 길로 들어섰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입구 풀밭 공원에 설치된 아이들을 위한 간이 놀이 시설이었다. 나무판자로 만든 물고기를 잡는 놀이기구가 있고, 퍼즐 맞추기와 시소도 있고, 조랑말을 타는 체험도 있었다. 그들은 와인 맛보기만으로는 와인 축제가 되기 어려운 줄을 알고 있었다. 봄날 가족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배려기도 했다.
 

에텍 마을 입구 ⓒ 막걸리학교


마을 길은 완만하게 구릉진 언덕 중간쯤에 곧게 뻗어있었다. 마을 길은 비가 올 때 배수가 잘되도록 자갈이 깔려 있지만 군데군데 흙이 드러난 비포장길이었다. 길을 따라 양옆으로 듬성듬성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있는데 와인 저장고나 작업 창고들로 여겨졌다.

건물 위와 아래로 언덕을 따라 포도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포도나무에는 아직 싹이 나지 않아서, 시멘트 지주 기둥만이 앙상한 뼈대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건물 앞에 나와 탁자를 내놓고 와인의 시음을 권하고, 와인과 와인 기념품을 팔았다.

울타리도 없는 와인 창고 주변으로 듬성듬성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 와인 창고 외벽에는 굽은 포도나무 줄기가 걸려 있는데, 내가 본 가장 화려한 이 마을의 장식이었다. 축제 준비는 봄날이 찾아와 거들고 있는데, 포도밭 주변에 핀 봄꽃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보통 와인 축제라면 포도가 영그는 수확기에 하는데, 술빚기에 바쁜 가을보다는 와인을 맛보기에는 좋은 봄날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마을은 가을에도 와인 축제를 연다.

지나치게 농밀하지 않은, 맑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

마을 안쪽에는 야외 테이블이 놓인 식당이 있었다. 사람들은 공원 벤치처럼 자연스럽게 앉아 와인이나 음식을 주문했다. 쫓기지 않고, 갇히지 않고, 봄바람처럼 사람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동네였다. 두어 시간 와인 마을을 돌아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박한 마을 공연이었다. 헝가리 전통 복장을 한 젊은 남녀들이 꽃그늘 아래서 짝을 지어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꽃그늘 아래서, 팔을 벌리고 손을 잡고 발을 구르고 빙그르르 돌며 치맛자락을 펄럭이는 춤을 보고 있으니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곱슬머리가 용수철처럼 난 음악 선생님이 가르쳐주었던 노래일 것이다. 하얀 꽃그늘과 함께 봄날이면 내 뇌리에 울려퍼지는 노래다. "목련꽃 피는 언덕에 긴 사연의 편질 읽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 휘파람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로 이어지는 가곡이다. 평화롭고 따뜻한, 포근하고 아련하고 고즈넉한, 뜻밖의 풍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와인마을 축제, 꽃그늘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들. ⓒ 막걸리학교

 
길 안내를 한 문화원장은 헝가리가 포도 재배의 북방 한계선이라 와인이 유명하고, 그 위쪽 지방인 체코는 와인보다는 맥주가 유명하다고 했다. 에텍 마을은 화이트와인이 유명했다. 레드 와인은 태양의 빛을 더 필요로 하는가 보다.

지나치게 농밀하지 않고 부드러운, 떫거나 두텁지 않고 맑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의 맛이 낯선 여행자에게는 더 편안하다. 화이트 와인은 웃으며 한 잔 즐기기에 좋은 떠돌이의 정서를 지녔다면, 레드 와인은 오래 한 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 사투리 짙은 강렬한 토박이 정서를 지녔다.

나는 화이트 와인에 살짝살짝 취해가면서, 마을의 춤과 전통 의상과 그리고 젊은 청년들의 활기찬 모습 뒤로 먼 하늘 흰 구름을 봤다. 멀리 떠나와 낯선 땅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무척 두렵기만 하다.

그날 마셨던 에텍의 화이트 와인 맛은 그 뒤에 마신 다른 화이트 와인의 맛에 가려져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포도나무 울타리의 꽃향기도, 음악 소리도 내게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뭉클하게 남아있는 것은 하얀 꽃그늘 아래서 서로 손을 잡고 실타래처럼 풀어지던 춤사위에 빼앗겼던 내 마음이다. 기억은 내 몸 밖에서 스며든 향기나 맛이나 풍경이 아니라, 연정처럼 내 마음 안에서 화답하는 감성이 있어야 새겨지나 보다.

문화원장을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가 하필이면 인사동 포도나무집이었다. 그를 만나면 어떤 기억이 남아있는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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