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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4.21 08:25 수정 2020.04.21 08:25
 

낙태죄 반대를 외치던 시위자들이 2019년 4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속보]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2019년 4월 11일. 임신중지, 그러니까 '낙태'를 한 지 약 6개월 만에 들은 소식이었다. 하루종일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다. 언론사 앱에서 내 핸드폰으로 속보를 띄워주는 순간, 일하던 중에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당장 거리로 뛰어나가 "호외요! 호외!"를 외치고 싶었다.

퇴근 후 바로 인쇄소로 달려갔다. 헌법불합치 결정문을 프린트했다. 헌법재판소가 나와 자매의 권리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낙태죄는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한다, 국가는 여성이 낙태할지 말지 고민하는 기간에 여성을 지원해야 한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기본권의 주체인 임신한 여성의 의사에 따라 행사돼야 한다...

결정문을 읽는데 '내가 이 나라 국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 한다는 내용은 아니었긴 하다. 하지만 법안 개정과 사회적 논의를 위한 한 걸음을 뗐다는 것에 기뻤다. 무엇보다 헌법불합치 의견과 단순위헌 의견이 공통적으로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게 너무 기뻤다. 

그간 임신을 중지한 여성은 '살인마'라는 누명과 편견의 시선으로 온갖 억압과 차별에 시달려왔다. 국민은커녕 인간으로 봐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여성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해주니 내가 비로소 기본권을 행사하는 존엄한 인간, 국가의 당연한 보호를 받는 국민이 됐다고 느꼈다.

'국민'이 아니었던 순간들
 

2018년 7월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홀에서 레베카 곰퍼츠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 박정훈


낙태죄 폐지 전, 임신중지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몸이야 힘든 건 당연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미프진(미프진은 자궁을 수축시켜 임신산물을 배출하게 하는 약. 약 복용 후 2~3주간 하혈하며 임신산물을 배출한다)에 대한 의료인의 무지를 마주했을 때와 미프진을 먹었다고 의료적 조치를 거부당했을 때다.

일단 미프진을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미프진을 판매한다는 글과 전화번호는 인터넷에 많으나, 판매하는 이가 의료인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어서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네덜란드의 산부인과 의사인 레베카 곰퍼츠 선생을 알게 됐다. 그는 웹사이트 '위민 온 웹'을 운영하며 전 세계 여성에게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나눠주고 있었다. 약 12만 원 정도의 기부금을 내면 약을 받고, 위민 온 웹을 운영하는 의료진에게서 이메일로 진료도 받을 수 있었다. 약 복용 전 주의사항, 복용 후 해야 할 일, 복용 몇 주 후 임신 중지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냐는 안부 메일까지. 그렇게 친절할 수 없었다.

만리타향의 의사 덕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준비하는 동안 국내 의료인에게서는 진료를 거부당해야 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산부인과만 열 군데였다. 그러나 내 나라 의사에게 모국어로 진료받을 수 없었다. 일단 국내 의료인은 '미프진'이 뭔지를 모르고 있었다. 낙태약이라고 설명하면 "우리 병원은 좀 그렇고 다른 데 가보세요"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다 한 병원에서 일단은 오라길래 감사하다고 울면서 내원했다. 그 병원에선 비보험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고, 보험 진료보다 4배 많은 진료비를 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진료 내용도 엉망이었다. 터덜터덜 병원을 나서는 내게 의료인이 말했다. "다른 병원에 가선 약 먹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임신했는데 갑자기 하혈을 많이 한다고만 하세요"라고 조언했다. 따뜻하면서도 괴로운 조언이었다.

그동안 왜 그렇게 건강보험료를 성실하게 냈는지 의문이 들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도 미프진 복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놨을 정도로 안전성이 입증된 약인데, 이 약에 관해 내가 사는 내 나라, 내 동네의 병원에서 모국어로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미프진이 뭔지 모르는 의료진에게 이게 뭔지 설명하고 있으면 '나는 되레 의료적 정보를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왜 설명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한 이 약을 국내에서 의사에게 살 수 있었다면 2주간의 해외 배송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약을 기다리는 2주간 입덧, 소화불량, 두통, 구토 등 임신 초기 증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나는 국민이 아니었다. 제도와 불화하는 불법의 몸이었다. 이 이유로 간단한 의료 서비스 하나 받지 못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위민 온 웹 의료진과 미프진 복용 후기를 올려 준 수많은 여성들뿐이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국민' 여성들은 인터넷에 적극적으로 후기를 남기고, 누군가는 그 후기를 모으고, 또 누군가는 여러 정보를 보기 쉽게 시각화했다. 불법의 몸들은 이렇게 서로 연대하며 생존해 왔다.

그리고 낙태죄 폐지를 이뤄냈다. 작년 4월 11일 당일에 나는 집회에 참석하는 대신 글을 썼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쉬운 말로 바꾸고 요약했다. 여성이 이뤄낸 기쁜 소식을 한 명이라도 더 알았으면 했다. 또한 헌재가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한다는 의견을 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정문 내용을 제대로 알고 우리가 어떤 것부터 논의하면 되는지 한 명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SNS에 글을 썼고 400명이 공유해 갔다.

글을 쓴 후 집회에 참석한 이의 얼굴들을 사진을 통해 접했다. 66년만의 폐지라는 역사를 이뤄낸 얼굴들이었다. 울고, 부둥켜 안고, 환하게 웃고, 안아주고 있었다. 서로 연대하며 생존해온 불법의 몸들이 자기결정권이라는 기본권을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판결을 얻어낸 날이었다.

하지만 국회는 감감무소식

2019년 4월 11일 화제가 됐던 <오마이뉴스>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보도기사 제목 ⓒ 오마이뉴스


헌재 결정 이후 1년이 지났는데 발의된 법안이 하나뿐이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법이다. 임신 14주 이내면 제한 없이 임신을 중지할 수 있게 한 개정안이다. 사실 이것도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는 아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마저도 국회에 계류돼 있고 이번 국회가 끝나면 폐기된다.

헌법재판소는 올해 말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했다. 공은 최근 당선된 21대 예비 국회의원에게 넘어간 듯하다. 그런데 이정미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 공동 발의자로 참여한 사람 중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은 없었다. 또한 이정미 의원을 포함한 공동 발의자 10명 중 21대 국회에도 의원직을 유지하는 사람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 한 명뿐이다. 다른 의원은 불출마했거나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이번 총선에서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은 180석을, 미래통합당은 103석을 가져갔다. 이 두 당이 전체 의석의 94.3%를 차지하게 됐다. 이정미 의원의 개정안 공동발의에 두 당 의원 중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번 국회는 두 당 의원이 대부분이다. 

박아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 17일 한겨레21을 통해, "연말쯤엔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시스템과 매뉴얼, 의료인 교육이 다 돼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야 내년 1월 1일부터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회는 논의의 장조차 열지 않았고, 부족하지만 그나마 미프진이라도 국내에서 살 수 있도록 발의된 개정안은 계류 중이다. 법만 바꿔서 될 게 아니라 보건복지부 정책이나 각 지역 보건소 규정, 박아름 위원장이 말한 의료인 교육 등 할 게 산더미다. 그러나 국회는 감감무소식이다. 이정미 의원의 개정안에 관심 없던 거대 양당을 뚫고, 낙태죄는 온전히 폐지되고 여성의 권리는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다.

새 국회는 하루빨리 논의를 시작해 주기 바란다. 국회의원 대신 수많은 논의와 연구를 거치며 불법의 몸으로 연대해 왔던 여성의 목소리는 이미 준비돼 있다. 이미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여성의 몸이 완전히 불법이 아닐 수 있도록, 출산을 강제하며 머릿수 채우는 국가 주도 재생산에 여성의 몸과 생애를 갈아넣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안 마련에 힘써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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