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4 13:33최종 업데이트 20.04.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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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5년 10월 4일 저녁. 와인에 넋이 나간 지 채 한 달이 안 되는 걷잡을 수 없는 시기였다. 식탁 위에는 꿀처럼 샛노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고, 라벨에는 샤토 리유섹(Château Rieussec) 2010이라고 쓰여 있다. 프랑스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된 스위트 와인이다. 소테른은 세계 최고의 스위트 와인으로 평가받는 샤토 디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작 레드 와인 몇 병 마셔본 게 전부였던 때라 스위트 와인이 뭔지도 모르던 갓난쟁이 시절. 마트 와인 매장 직원에게 독특한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권하길래 덜컥 구입했다. 그 직원이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마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길래 시키는 대로 했다.


황금색 와인은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해하며 입안에 한 모금 털어 넣었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을 표현할 어휘력이 부족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달고나 같은 흑백의 단맛과는 차원이 다른,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단맛이 나는 것 아닌가. 혓바닥에 눈이 있다면 미각의 오로라를 감상하는 상태라고 하겠다. 가히 단맛의 문화충격!

 

ⓒ 고정미

 

샤토 리유섹 2010 프랑스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된 스위트 와인이다. ⓒ 임승수

   
황홀경에 빠져 한 잔을 다 비우고 두 잔째를 마시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강한 단맛은 쉽게 질리기 마련이다. 두 잔 넘어가면서 조짐이 심상치않다. 너무 강한 자극에 혀가 얼얼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별다른 고민 없이 준비한 안주도 와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750ml 한 병을 아내와 억지로 다 마셨는지 조금 남겼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다음날 숙취로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역력하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스위트 와인을 즐기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스위트 와인은 애피타이저, 메인요리를 즐긴 후 과일, 케이크, 초콜릿, 마카롱 등의 단맛 나는 디저트에 곁들여 입가심 용도로 마신다. 샤토 리유섹 750ml 한 병을 구매했으면, 다음과 같이 이용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셀러에 잘 보관했다가 집에 손님이 오는 날 미리 냉장고에 넣는다. 디저트 와인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차게 마셔야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방문한 손님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다가 단맛 나는 디저트를 즐길 때쯤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른다. 특히 디저트 와인과 블루치즈의 궁합이 좋으니 따로 준비하면 좋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식문화에서는 디저트 와인을 마시는 경우가 잘 없으니 손님은 이게 뭐냐고 물을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자세히 얘기하면 설명충이라는 오해를 살 테니, 간단하게 소개하고 직접 마셔보기를 권한다.

별생각 없이 한 모금 마신 손님은 처음 경험하는 무지갯빛 단맛에 안면근육 지진과 더불어 동공이 확대될 것이다. 과일 및 과자류의 단맛, 블루치즈의 꼬릿한 느낌이 와인과 시너지를 이루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바로 이 순간 와인에 대한 친절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면 당신에 대한 손님의 호감도와 신뢰도는 급격하게 상승한다.

스위트 와인은 여타 와인에 비해 잘 변질되지 않는 편이어서 남으면 코르크로 다시 막아 냉장고에 넣어두자. 일주일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 그러니 한꺼번에 다 마시려 하지 말고 집에서 디저트를 즐길 때마다 꺼내어 한 잔씩 가볍게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샤토 리유섹 같은 프랑스 소테른 지역의 와인은 왜 이렇게 단맛이 강할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곰팡이 때문이다.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된 스위트 와인을 귀부(貴腐) 와인이라고도 부르는데, 귀貴하게 부腐패한(영어로는 Noble Rot) 와인이라는 의미다.

밤새 안개가 끼고 습하면 포도에 '보트리티스 시네레아'라는 곰팡이가 자란다. 이 곰팡이는 포도 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내는데, 낮에 태양이 내리쪼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구멍을 통해 수분이 증발해 당과 산 성분이 진하게 농축된다.

이 곰팡이 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매우 높은 당도를 갖는다. 곰팡이가 잘 번지려면 껍질이 얇고 포도송이가 가깝게 밀집되어야 유리한데, 그런 조건에 적합한 세미용(Sémillon),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같은 품종이 주로 이용된다.

앞서 얘기했듯 곰팡이가 잘 번식하려면 밤새 안개가 끼고 습도가 높아야 한다. 하지만 계속 습기만 차 있으면 포도가 썩기 때문에 낮에는 태양도 내리쬐고 바람도 불어 수분이 증발하고 곰팡이 성장도 적당하게 억제해줘야 한다.

이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인가? 그래서 귀부 와인 생산지로 적합한 곳은 찾기가 무척 어렵다. 프랑스의 소테른 지역에서 귀부 와인이 생산되는 이유는 그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당과 산 성분이 잘 농축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포도알을 선별해야 한다. 모든 포도알에 일괄적으로 곰팡이가 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쭈글쭈글하게 잘 마른 포도알만 골라내는 작업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포도알만 사용하니 단위 면적당 소출량도 적다. 까다로운 기후 조건에 품은 많이 드는 데다가 생산량까지 적으니 여타 와인에 비해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맛과 향이 인상적이라 이런저런 와인에 익숙한 사람도 상급의 귀부 와인을 처음 마시면 구강에서 벌어지는 맛과 향의 다채로운 향연에 놀란다. 와인을 좋아한다면 꼭 체험해 보기를 권한다. 대신 한 번에 많이 마시지 말고 냉장고에 두고 며칠에 걸쳐 나눠 마시자.
 

ⓒ 고정미

 

돈나푸가타 벤 리에 2014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의 스위트 와인인데, 시칠리아에서 재배하는 지비보(Zibibbo)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다. ⓒ 임승수

   
샤토 리유섹의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1년이 지난 2016년 11월 5일. 갓 결혼한 지인 부부가 우리집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와인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손님이라 좀 특별한 것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돈나푸가타 벤 리에(Donnafugata Ben Ryé) 2014를 출격 대기시켰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의 스위트 와인인데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회사명, 벤 리에(Ben Ryé)는 제품명이다. 시칠리아에서 재배하는 지비보(Zibibbo)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다. 곰팡이를 이용한 귀부 와인과는 달리 시칠리아의 햇빛과 바람을 이용해 포도를 건조시켜 당도를 높이는 파시토(Passito) 공법으로 만들었다. 375ml 용량의 작은 병이라 남기지 않고 한 번에 마시기에도 좋다.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디저트를 내오는 시점에 벤 리에를 꺼냈다. 375ml 용량이니 우리 부부, 손님 부부 넷이서 한 잔씩 하기에 딱 좋다. 샤토 리유섹과는 또 다른 느낌의 진득하고 고급진 단맛으로 그날의 모임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9회에 등장해 한 이닝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을 말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아무리 처음과 중간이 좋아도 마무리가 어긋나면 찜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음식에 있어서는 스위트 와인이라는 강력한 마무리 투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고민하지 않고 뒷문을 맡길 수 있으니.

그러고 보니 와인 셀러에 스위트 와인이 없구나. 할인 장터 기간에 괜찮은 놈으로다가 한 병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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