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 08:43최종 업데이트 20.06.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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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5일 오후 6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이 출구조사 발표 이후 당직자들과 인사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지난 기사] 노회찬에 '묘비명'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에서 이어집니다. 

'세상' 속으로: "전쟁을 경험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시인 김지하가 쓴 <1974년 1월>이다. 이 시는 유신독재에 저항하고, 그 부산물인 긴급조치에 도전하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발명가, 생물 계통의 일, 고기 잡는 어부,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 등 어린 노회찬의 '소박한' 꿈은 서울에 올라와 김지하가 '죽음'이라 부른 상황에 부닥친다. 1972년 10월유신 선포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시대를 겪으면서 노회찬의 길은 '고교생 반독재 민주운동가'로 바뀌게 된다.


방송인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노회찬은 부산고를 낙방하고 재수하기 위해 서울에 온 것을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43쪽)

노회찬 : "72년도에 서울에 왔죠. 그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아마 부산에 있었으면 이 길에 안 들어섰겠죠. 부산에 있었으면 반항심은 극대화되었을 거 같구,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상한 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요."
김어준 : "인문학적 소양 있는 지방건달, 하하하하."
노회찬 : "서울로 오면서 철이 든 거지. 나 혼자다 보니까, 친구들도 처음엔 없었을 거 아니에요. 재수하는 처지에 친구 사귀고 돌아다닐 처지도 아니고. 그러다보니까 사회를 보기 시작한 거예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서울 생활. 노회찬은 "전쟁을 경험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는 말로 그것을 압축한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당시 서울 경복궁 광화문 앞에 포진된 탱크. ⓒ 자료사진

 
서울에서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어떤 의미에서 나는 새 정치인이 아니다. 고입 재수생이었던 1972년 10월 17일 오후 5시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라디오 뉴스로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원내각제와는 달리 대통령제 하에선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는 것은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잘 기억하고 있던 교과서 내용이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으로 달려가 교과서를 펴고 확인하였으나 나의 기억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면 라디오 뉴스가 잘못된 것인가? 다시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시청 건너편의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버티고 서 있었으며 중앙청 앞에는 장갑차 두 대와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던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미 교과서를 믿고 어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부터 소년의 시야에는 들어올 수 없는 사회와 정치가, 그 뒷면의 비리와 불의가, 이에 대항하는 투쟁과 양심의 목소리들이 눈에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보도한 언론.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국제신보, 서울신문(1972년 10월 18일 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국회해산'이라는 문구가 사라진 반면, 국제신보와 서울신문에는 '국회해산'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참조] 대한민국 '국회 해산'의 역사
통상 민주적인 대통령제 하에서는 국회의원의 임기가 보장된다. 대통령의 의회해산권을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제 하에서는 의회가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임기가 원칙적으로 보장된다.

따라서 아무리 대통령이 무능하고 국민으로부터 신임을 잃었더라도 해임할 방법이 없다. 탄핵 제도가 있지만, 탄핵은 대통령에게 중대한 법 위반 사실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할 뿐, 단지 무능하다는 등의 이유로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내각제 하에서는 총리 및 정부가 무능하고 일을 못할 때에는 즉각 해임하고 교체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회 해산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공화국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국회가 해산된 경우는 없고, 1960년 4.19혁명 후 헌법개정을 실시한 후 자진해산(1차)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당시에는 박정희 군부에 의해 타율적인 해산(2차)을 당했다.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국회가 타율적으로 해산(3차)됐는데, 이는 헌법적인 근거가 없는 헌법파괴 행위였다.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7쿠데타로 국회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했고, 모든 실권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장악했다. 1980년 8월 27일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국회와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다(4차). 국회 역할을 대신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신군부의 제5공화국 출범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후 1981년 4월 11일 11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해산됐다.


"유신이 일어난 날, 그 날이 내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10쪽)

1972년 10월 17일 이후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노회찬은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이듬해 경기고에 입학한 노회찬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세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잡지와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던 서양사상의 지적 항해와 함께, 함석헌·박현채·김지하 등 '문제어른'들의 생각도 접하고 강연도 쫓아다녔다.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등 고민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회찬과 친구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보내며, 책에서 길을 찾고 앞선 사람들에게서 답을 얻기 위해 애썼다. 이들의 아지트는 주로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중국집 '영춘관' 2층과 '부산촌놈' 노회찬이 거주하던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외삼촌 집이었다.
 

서울 경기고 재학 당시 노회찬의 학생증. 위에서부터 1학년, 2학년, 3학년 학생증. ⓒ 노회찬재단

  
경기고 1학년 때인 1973년 노회찬은 정광필·이종걸 등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했다. 그런 가운데 11월이 되자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흔쾌히 동의한 정광필과 함께 노회찬은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로 시작되는 유인물('귀 있는 자 들으라')을 1200장 정도 등사해 새벽 어둠을 틈타 교실에 몰래 들어가 책상 속에 넣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었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학생 한 명이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놨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참조로 민청학련 당사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1974년 4월 3일 경기고 교문 밖에서 유인물을 건넨 대학생은 서울문리대 여학생인 강인선과 홍경훈이었다(민청학련계승사업회,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이 갖는 의미, <민청학련>, 메디치미디어, 2018, 369쪽).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됐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도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 노회찬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안재성, 약전: 멈추지 않을 진보정치의 꿈, 노회찬,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150-153쪽 참조)고 한다.

경기고등학교(1973년 3월~1976년 2월) 생활기록부를 보면 노회찬의 '학생의 희망'란은 1학년(정치가), 2학년(법관), 3학년(법관)으로 기재돼 있다. 조심스럽게 짐작해보면, 위의 두 사건이 중학교 때 의사를 꿈꾼 노회찬의 꿈을 정치가와 법관으로 변경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인물 살포를 함께 한 정광필(50+인생학교 학장), 45년 지기인 그는 고교시절 노회찬과 함께 한 시간들을 이렇게 떠올린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얘기부터 한 자락 시작하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은 시험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가던,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영춘관' 2층 방이다. 그곳에서 군만두를 안주 삼아 고량주를 꽤 마셨다. 그리고 이어지던 시국 얘기며 철학과 문화·예술에 관한 토론들. 헤어지기 아쉬워 2차로 몰려간 곳은 노회찬의 자취집. 밤새워 마시고 토론하고 음악을 들었다.

시험 때마다 치러진 이 의례는 노회찬의 제안으로 서양사상사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던 지적 항해는 중세로 접어들면서 좌초했지만 대학 시절 탐구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매일경제>, 2019.7.26.)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는 이종걸(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0대 소년들이 청춘을 즐기기에는 10월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통치가 너무나 분노스러웠다. 우리는 <창작과 비평>도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다녔다. 노회찬과 함께 퇴학 조치를 불사하고 유인물도 돌리고 데모도 했다. 그러면서 형성됐던 가치관과 사회관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격히 얘기하면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노회찬 친구가 주도하고, 만든 것에 제가 따라갔던 친구였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다 기획하고 한 것에 대해 함께 했던 기억에서 당당하고, 어린 소년 시절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들이 남아있다." (<세계일보>, 2018.7.26.)


훗날 노회찬은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72년 10월유신이다. 박정희는 세 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주동자다.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1969년의 '3선개헌 쿠데타' 그리고 1972년의 '10월유신 쿠데타'가 그것이다.

박정희 통치 18년 동안 계엄령은 3번 선포돼 31개월 동안 지속된다. 같은 기간 중에 위수령은 3번에 총 5개월 동안 발동되었고, 각종 비상조치가 9건에 69개월 동안 지속된다. 이들 비정상적인 기간을 합치면 총 105개월로 박정희 집권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해당된다. 특히 긴급조치로 상징되던 유신독재 중반기 이후는 취중언사에도 세심한 주의를 요했던 상호불신과 자기검열의 엄혹한 시대였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특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에요. 학교에서 불의에 대해 맞서 싸우라고 배웠지 불의에 머리를 숙이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살았다고 생각해요. 실은 굉장히 평범한 진리를 좇으면서 살아온 거죠. 그래서 돌이켜보면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에 오늘의 노회찬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죠." ([비하인드스토리] 노회찬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대통령", <더 팩트>, 2012.9.20.)


1972년 10월유신으로 헌법을 바꿔버린 박정희는 그해 12월 23일 8대 대통령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전원 참석, 찬성 2357표, 무효 2표, 99.9%라는 찬성률 속에서 '체육관 선거'를 통한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된다.

6년 뒤인 1978년 7월 6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박정희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6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2대 대의원들의 첫 집회를 갖고 84년 12월 26일까지 재임할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선출했다. 재적 대의원 2천5백81명(정원 2583명, 1명 사망, 1명 사퇴) 중 2578명이 참가한 이날 선거에서 박 후보가 2577표(무효 1표)를 획득, 당선이 확정됐다." (동아일보 1978.7.6.) 찬성률은 8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99.9%를 기록한다.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보도. 왼쪽이 1972년 12월 23일 '매일경제', 오른쪽이 1978년 7월 6일 '동아일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참고로 노회찬이 배운,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용 교과서 <승공통일의 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와 똑같은 선거 사기행위'를 저지른 박정희와 유신정권은 과연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까?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그 선거는 민주주의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사기행위이다. ... 우선 공산국가의 선거에서는 단 한 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반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 중에서 적격자 한사람을 고르는 선택행위인데 입후보자가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선거 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임을 알 수 있다."

 

왼쪽은 문교부가 발행한 1969년 중학교용 승공통일의 길. 오른쪽은 1970년 중학교용 승공통일의 길.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72년 10월유신이라는 첫 번째 '전쟁의 경험' 이후 '반독재 민주운동가'의 길을 걸은 노회찬은 두 번째 전쟁의 경험을 하게 된다. 1980년 5월 맞게 된 두 번째 전쟁과도 같은 충격은 그를 '혁명'을 꿈꾼 '반체제 노동운동가'의 길로 이끈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②] '반체제 노동운동가의 길'(6월 12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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