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프랑스 전역에 내려졌던 두 달간의 봉쇄령이 지난 5월 중순부터 점진적으로 해제되자, 예정된 수순대로 피해 업계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정부에 구조요청을 했다. 가장 먼저 정부의 문을 두드린 곳은 대략 40만 명이 종사하는 자동차 업계다. 프랑스 자동차 업계는 3월 72%, 4월 88% 매출이 추락하는 초유의 불황을 경험했다. 이에 따라 5월 26일 정부는 자동차 업계에 대한 상세한 구제안을 발표했다.
두 달간 문 닫았던 발레오(Valeo) 공장에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가서 공개한 80억 유로(약 11조 원) 규모의 지원계획은 단순한 구제안이 아니었다. 고용안정을 확보하고 이 기회에 프랑스를 '녹색 자동차' 시장의 선두주자로 올려 놓으면서 기후문제에 적극 대응하고, 국내로 점차 핵심 산업기지를 이전하겠다는 지역화의 야심을 함께 담고 있었다.
동작 그만!
▲ 자동차 부품공장서 연설중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뉴스/EPA
우선 프랑스 정부는 '해고 제로'를 11조짜리 지원금 봉투를 내미는 선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손실을 메꾸기 위해 대대적인 규모의 감원을 계획하던 르노사에게 '동작 그만'을 요구한 것이다.
정부가 제시한 두 번째 옵션은 프랑스를 친환경 차의 선두국가로 만들라는 주문이다. 정부는 전기차, 하이브리드, 충전용 하이브리드 차량을 향후 5년 동안 매년 100만대를 프랑스 내에서 생산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기존 차량을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교체할 때 지급하는 보조금을 상향 조정하는 장려책도 제시했다. 전기차 신차 구입시엔 7천 유로(약 950만 원)까지, 하이브리드차 구입자에겐 2천 유로(약 270만 원)까지 지원하며, 2021년까지 전기차 충천소 10만기 설치를 약속했다.
낡은 디젤차나 휘발유차를 폐기하고 신차가 아닌 오래되지 않은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로 바꿀 경우, 기존에 지급하던 보조금 3000유로를 5000유로(680만 원)까지 증액한다. 또 해외에 있던 생산기지 국내 이전 비용과 설비 현대화, 친환경 자동차 제작 시스템 구축(10억 유로), 미래형 자동차 개발 연구 지원(1억5천 유로),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자동차업계의 중소기업들에 대한 구제 계획도 포함됐다.
세 번째 요구는 해외에 있던 주요 생산 기지 가운데 2곳을 국내로 이전 하라는 주문이다. 세계화의 후퇴, 지역화로의 유턴은 코로나 사태가 가져올 것으로 예견된 가장 명확한 변화이기도 하다. 마크롱은 이 모든 계획이 녹색 자동차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한 계획이라고 전하며 "메이드 인 프랑스"의 가치가 추가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핵심 부품 공장의 본토 이전을 주문하고 이에 상응하는 봉투를 따로 책정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자동차 업계를 위해 마련한 80억유로의 지원은 "기업과, 노조, 지역 의원들이 함께 모여 앉아 합의하는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밝혔다.
반항하는 르노... 정부의 깔끔한 판정승
▲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노차 본사
ⓒ 연합뉴스/EPA
그러나 이번 지원책에서 가장 큰 몫인 50억 유로(한화 약 7조원)를 가져가도록 되어 있는 르노 자동차는 정부 발표 사흘 뒤 마치 벌집을 쑤시는 듯한 결정을 보란 듯이 내렸다. 프랑스 내 공장 2개 폐쇄를 비롯하여 4600명의 프랑스 현지 노동자 해고가 담긴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어차피 정부는 자신이 최대 주주인 르노를 포기할 수 없고, 정해진 봉투는 자신들 손에 들어올 것이며, 해고는 경영자의 권리(?)라는 듯한 태도였다.
노조는 파업에 나섰고, 정치권과 해당 지자체장, 언론은 비난을 쏟아냈으며, 주식은 반대로 치솟았다. 과연 마크롱 정부가 르노사의 불응과 타협할지, 아니면 당초 발표한 원칙을 고수할지 주목되는 상황이었다.
6월 2일 재경부에서 열린 정부와 르노사의 협상 자리. 재경부 장관 브뤼노 르메르와 르노 사장, 노조 대표, 공장의 폐쇄가 예고된 모베즈 지역의 국회의원과 시장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여전히 르노 사장은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를 들며 고용 감축안이 불가피함을 역설했고, 노조 측과 지역 의원들은 고용 유지는 대통령의 약속이었음을 환기시키며 물러서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중재자 입장에 있던 르메르 장관이 르노 사장에게 아직 정부가 50억 유로 지원계획에 서명하지 않았단 사실을 확인시키면서 '딜'은 성사된다. 봉투를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부의 압박은 르노사의 모베즈 공장 폐쇄를 포기시켰다. 마치 예정되어 있던 각본이기라도 한 듯, 2시간 만에 거둔 깔끔한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14개에 달하는 프랑스 내 르노 공장 중 가장 작은 규모에 속하는 슈아지 르 루아 공장은 폐쇄되며, 그곳에서 이뤄지던 공정은 2020년 내에 200여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플랑(Flins) 지역의 공장으로 이전된다. 르노 자동차는 여전히 고용 축소 안을 완전히 덮지 않았으나,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어야 한다는 정부의 원칙에는 합의했다. 자발적 퇴직으로 생긴 빈자리를 충원하지 않는 식의 점진적 고용 축소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애증의 연대기
르노사는 1898년 자동차를 좋아했던 르노 가문의 두 형제가 설립한 회사다. 자전거를 재조립하여 만든 3륜차로 시작된 이들의 역사는, 현재 르노-닛산-미츠비씨 얼라이언스를 구성하는 자동차 왕국으로 성장했다. 양차 세계전쟁 중에는 군수물자를 실어나르고, 항공기, 포탄 등 군장비를 제조하는 등 전쟁에 적극 가담했다.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직후엔 나치 부역 기업에 대한 레지스탕스 임시 정부의 원칙에 따라 몰수되어 국영 기업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집권 2기에 들어선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며 르노사 민영화에 착수(1990)했고, 1996년 자크 시락과 리오넬 조스팽의 동거 정부에 이르러 르노는 민간기업으로 다시 탄생한다.
여전히 르노사 주식의 15.1%를 보유한 프랑스 정부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육성과 고용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책임을 진 행정 당국인 동시에 가장 많은 주식 배당금을 챙겨갈 르노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CGT(프랑스노동총동맹)의 위원장이자 르노 자동차 노동자 출신이기도 한 마르티네즈는 "정부가 그동안 여느 주주들과 다름없이 가져갈 배당금의 크기에 연연하는 모습을 주로 보여 왔다"며 이번 결정이 지속적으로 관철될지 의구심을 표했다.
르노사와의 줄다리기에서 당초에 내세웠던 원칙을 고수하며 최초의 의지를 관철한 바 있는 마크롱 정부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용 보장, 친환경, 국내생산"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정 운영의 이정표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6월말로 예정된 마크롱의 포스트 코로나 국정 구상의 발표를 통해 확인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보건 위기 이후엔 필연적으로 경제 위기, 고용 위기의 바람이 예외 없이 모든 사회를 엄습할 것이다. 노동자와 경영주, 지자체와 정부가 마주 앉아 현명한 윈윈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식이 우리에게도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