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6 18:24최종 업데이트 20.06.2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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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원문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해방 뒤 고국에 돌아온 백범 김구는 친일·보수세력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가 환국한 1945년 11월 23일은 친일·보수파가 미군정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지 2개월 보름 정도 흐른 뒤였다.

해방 이후 김구의 삶은 그들과 여러모로 얽히게 됐다. 특히 그들은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1949년 6월 26일 그들의 하수인인 안두희가 김구 숙소인 경교장에 찾아가 김구를 암살하고 사라졌다.


친일·보수세력은 김구를 이용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국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한 뒤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국임시정부와 협의해 신탁통치협정을 체결한다'고 발표했지만, 김구는 '임시정부 수립'보다는 '신탁통치' 부분에 격분해 반탁운동(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서둘러 주도했다.

친일·보수파는 이 운동에 편승해 반탁을 외치면서 스스로 '애국자'로 둔갑했다. 그런 뒤 대중과 진보 진영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이 문제를 활용했다. 미군 주둔으로 한숨을 돌리게 된 친일·보수파는 반탁운동에 편승함으로써 확실히 되살아나게 됐다. 물론 김구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친일 청산 역량을 약화하고 1949년에 반민특위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친일·보수파 그룹에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김구를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방법은 반탁운동 편승처럼 거창하지는 않았다. 이는 교묘하고 얄궂다는 느낌을 풍긴다.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파 이광수가 그런 방식을 구사했다. 

이광수의 교묘한 술책

이광수(1892년생)는 이미 그 전부터 김구(1876년생)를 알고 있었다. 김구가 1907년에 양산학교 활동을 개시한 이후로 이광수는 김구와 동지적 관계를 쌓아나갔다. 이 관계는 <백범일지> 중 1919년 3·1운동 뒤에 김구가 상하이(상해)로 망명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아래에 등장하는 '김보연'은 김구와 같은 황해도 사람이다.
 
다음날 아침에 상해에 가족을 이끌고 먼저 와서 살던 김보연 군이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숙식을 함께한다. 김군은 장연읍 김두원의 장자이고 경신학교 출신으로, 전에 내가 장연에서 학교 사무를 총찰(總察)할 때부터 나에게 성심으로 애호하던 청년이니라. 동지들을 심방하여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를 만나 악수하였다. 그때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1919년 당시의 김구(43세)는 이광수(27세)를 '옛 동지'로 생각하고 악수했다. 이 친분은 해방 뒤 이광수에게 요긴하게 활용됐다. 김구 회고록 <백범일지> 원고를 국사원 출판사의 위탁을 받아 윤색하는 책임을 맡게 됐던 것이다.

당시의 이광수는 '문단의 거성'이었지만, 김구는 반탁운동을 계기로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범일지> 윤문을 맡게 된 것은 문단의 거성 이광수한테도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광수는 윤문 과정에서 백범 독립운동의 의의를 교묘히 떨어트리는 한편, 반공주의 색채를 상당히 크게 부각했다. 친일·보수 세력의 논리를 슬며시 주입했던 것이다. 그런 부분 중 하나가 <백범일지>의 본문 첫 대목이다. 이 부분은 김구 집안이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게 된 내력을 다룬다. 아랫글은 이광수의 윤문을 거친 이후의 본문 첫 대목이다.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시어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8세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며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방계 조상인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양에 망명하였다. 하지만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의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김자점은 조선 효종 때 역모죄로 처형됐다. 2018년에 영화 <창궐>에서 배우 장동건이 연기한 극중 인물 김자준의 실제 모델이다. 그런데 김구가 집필한 원래의 글은 위와 확연히 달랐다. 김구가 출판사에 넘겨줄 당시의 본문 첫 구절은 이랬다.
 
우리의 조상은 안동 김씨이니 김자점 씨의 방계라. 당시 자점 씨가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멸망의 화를 당할 때, 우리 선조는 처음에 고양군으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이 서울과 가까워, 다시 멀리 해주읍에서 서쪽으로 80리 떨어진 백운방 텃골 팔봉산 아래 양가봉 밑으로 옮겨가 숨어 살았다.
 
이광수가 손댄 글에서 김구는 왕의 후손으로 묘사됐다. 반면, 원래의 글에서 김구는 역적 집안의 후손으로 묘사됐다. 과거시험 낙제 뒤 동학군에 가담해 조선왕조와 싸운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김구는 조선왕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 반감이 김자점으로 시작하는 본문 첫 구절에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경순왕의 후손이면서도 이를 자서전에서 뺀 것은 왕조 체제와 신분 질서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런 정신이 김구가 혁명가적 인물로 성장하고 독립투쟁에 인생을 거는 데 상당히 기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김자점의 반역으로부터 시작하는 원래 글은 김구의 태생적인 저항정신을 두드러지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올해 4월 <춘원연구학보> 제17호에 실린 방민호 서울대 교수의 논문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이광수 윤문의 의미'는 원래 글이 갖는 효과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김구의 원본 <백범일지>가 역도로 몰려 죽음을 당한 김자점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일생의 이야기를 시작함은, 원본 <백범일지>를 통해 김구가 내세우고자 한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구가 자신의 본래 저작의 첫머리에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조선의 반상 신분제도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다.
 
이광수의 윤문은 그런 효과를 떨어트렸다. 그의 손이 닿은 글에서는 김구 가문이 영광스럽게 묘사됐다.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사대부 가문이었다는 점이 강조됐다. 이로 인해 왕조체제에 대한 김구의 저항심과 혁명적 기질은 덜 두드러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같은 대문호가 그런 고려도 없이 <백범일지> 첫 대목을 바꿨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제 패망 뒤 민중의 저항을 걱정했던 친일파들로서는, 김구처럼 민족적 존경을 받는 인물의 자서전에서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것이 두드러지기보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이 강조되는 게 유리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광수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나의 소원', 김구의 원래 글에 없었다

<백범일지> 끝부분에 '나의 소원'이라는 부록이 붙어 있다. 김구의 정치사상을 요약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도 이광수의 손때가 묻었다. 이 부분은 이광수가 윤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작을 했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반공 이념이다. 해방 직후에 친일·보수파는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빨갱이요 공산당으로 몰아세웠다. 당시의 반공 이념은 친일 청산·분단 반대를 봉쇄하기 위한 논리였다. '나의 소원'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나의 소원'이란 부분은 김구의 원래 글에 없었다. 이광수의 윤문 뒤에 생겨난 부분이다. 김구가 최종적으로 승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광수의 머리에서 나온 부분이었다.

2016년에 김구의 원래 글을 기초로 <정본 백범일지>를 펴낸 김학민·이병갑은 '친필본 주해 <백범일지>를 펴내며'라는 부분에서 "'그 후의 일들' 및 '나의 소원'도 원본에는 없으나, 국사원 간(刊)에서 뽑아 추가하였다"고 말한다. 이광수가 윤문한 국사원 판본에만 있고, 원래 글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위의 방민호 논문은 '나의 소원'이 김구의 승인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백범일지>의 여타 부분과 문체가 다를 뿐 아니라 김구의 사상과도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김구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구의 생각이라고 보기에 어색한 부분들이 많다고 말한다. 아래는 위 논문의 두 대목이다.
 
이러한 문장은 필자가 보기에 확실히 김구의 원본 <백범일지>의 문체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구는 위의 문장들에 나타나는 마르크스나 헤겔 포이에르바하 같은 유물론 철학자들의 이름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아담 스미스 같은 경제학자, 뉴튼·아인쉬타인 같은 과학자들과도 확실히 거리가 멀다. 
어느 면에서 보면 확실히 이 '나의 소원'은 이광수가 김구의 자서전 저자명 아래 그리고 그의 승인 아래 자신의 생각을 삽입해 놓은 흔적이 역력한 텍스트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광수는 김구의 자기 생애 서술의 역작 <백범일지>를 국사원 판으로 윤문하는 가운데 자신의 반공주의적 사상을 알게 모르게 기입해놓은 것이다.
 
작가가 윤색한 글을 꼼꼼히 따지지 못한 김구의 책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김구의 <백범일지>에 친일·보수파의 논리를 교묘히 삽입한 이광수의 행동이 갖는 죄악성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보수 세력은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막기 위해 김구를 이용하기도 하고 암살하기도 했다. 살아남고자 발악을 했던 해방공간 친일파들의 흔적이 지금 시중에 있는 <백범일지>의 여러 판본들에 묻어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돌베개(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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